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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린에서 파리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습니다. 비행 시간은 예상 외로 길었습니다. 에든버러에서 벨파스트에 올 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이 섬과 유럽 대륙 사이의 거리감을 실감했습니다. 거기에 한 시간의 시차까지 더해지고 나니, 파리에 도착한 것은 저녁 시간이었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오전에는 부슬비가 내렸습니다. 흐린 하늘을 보며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갔는데, 관람을 마치고 나온 오후에는 벌써 하늘이 맑아져 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 Widerstand

도시 곳곳을 바쁘게 쏘다녔습니다. 파리에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많은 것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랜 시간을 쓸 수는 없었습니다. 일정을 한없이 늘릴 수도 없었고, 예산의 문제도 있었으니까요.

파리 도심 속 미술관을 여러 군데 돌아다녔습니다. 교과서에서만 보던 그림이 곳곳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 사이 파리의 거리와 센느 강변을 걸었습니다. 맑은 하늘 아래 비치는 파리의 도심은 어찌나 아름답던지요. 도시 전체가 하늘 아래 반짝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들이 파리를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파리의 오후
파리의 오후 ⓒ Widerstand

하지만 파리의 도심을 걸어 들어갈수록, 이 도시가 가진 독특한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여행자의 짧은 감상이겠지만, 여느 대도시와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 있었습니다.

제가 파리에서 받은 인상은, 이 도시가 무척이나 평면적이라는 것입니다. 눈에 걸리는 곳 하나 없이, 어느 하나 이질적이지 않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었습니다. 평면적이라는 말을 평등하다는 말로 바꿔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일부 현대 건물을 제외하고는 높은 건물을 찾아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옆 건물과 같은 높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건물은 대부분 오래되었지만, 도시가 명확한 계획 아래 만들어졌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파리와 에펠탑
파리와 에펠탑 ⓒ Widerstand

파리는 오래된 도시입니다. 로마가 이 땅을 지배하기 전부터 갈리아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도시였다고 하니까요. 파리의 구조는 고대부터 중세를 거쳐 천천히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파리의 여러 랜드마크는 앙리 4세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 많습니다. 앙리 4세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첫 국왕입니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재위하면서, 프랑스의 눈부신 발전기를 이룩한 왕이었죠. 우리에게는 "모든 국민들이 일요일에는 닭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겠다"는 말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앙리 4세의 집권 이전, 프랑스는 종교 전쟁에 빠져 있었습니다. 다수의 가톨릭 신도와, 소수의 개신교도 사이에서 전쟁이 벌어진 것이죠. 프랑스에서는 이 개신교도를 '위그노'라고 불렀습니다. 1572년에는 위그노를 향한 '성 바르톨로뮤 축일 학살 사건'이 벌어지며 수만 명의 위그노가 목숨을 잃기도 했죠.
 
 파리 시청
파리 시청 ⓒ Widerstand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 이어진 수 차례의 전쟁 끝에, 프랑스의 패권을 쥔 사람이 바로 앙리 4세였습니다. 앙리 4세는 원래 개신교도였습니다. 하지만 프랑스 전역을 장악하고 파리에 입성하기 직전, 가톨릭으로 개종했죠.

그렇게 앙리 4세는 파리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왕이 되었죠. 물론 자신이 가톨릭으로 개종했다고 해서, 과거 자신과 함께했던 신교도를 탄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앙리 4세는 1598년 '낭트 칙령'을 발표해 종교의 자유를 선언했습니다.

오랜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파리는 관용과 자유의 선언 아래에서 다시 성장했습니다. 루브르 궁전과 튈레리 궁전을 연결해 현재와 같은 루브르의 형태를 만든 것이 바로 앙리 4세였습니다. 이외에도 지금은 나폴레옹의 관이 안치되어 있는 앵발리드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죠.
 
 엥발리드
엥발리드 ⓒ Widerstand

보다 현대적인 파리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은 나폴레옹 3세 시절인 1850년대의 일입니다. 당시 파리 행정을 담당한 조르주 오스만(George Haussmann)은 개선문과 샹젤리제 거리를 축으로 파리의 도시 구획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을 지나오며 '프랑스인'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히 만들어내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프랑스라는 국가와 프랑스인이라는 국민의 정체성이 형성된 것이죠.

말하자면 내셔널리즘과 근대적 국민국가라는 형태를 처음으로 만들어가던 시기였습니다. 평등한 '국민'이라는 개념이 처음 창조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기에 정비된 현대 파리는 분명 과거의 모습과는 달라야 했을 것입니다.

건물 사이의 좁은 골목은 넓은 대로(Boulevards)로 바뀌어 여러 사람이 함께 이용하는 공공의 공간으로 변해 갔습니다. 오페라 극장과 시장, 도시 공원이 곳곳에 만들어졌죠. 모두 파리의 시민 모두가 접근할 수 있는 공유의 공간이었습니다.
 
 파리 개선문
파리 개선문 ⓒ Widerstand

파리의 도심 건축은 17세기 초반부터 강력한 규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건물의 높이가 대부분 비슷해 보이는 것도 착각은 아니었습니다. 건물의 높이가 대표적인 규제의 대상이었으니까요. 이 규제는 정도가 달라졌을 뿐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파리 도심은 다른 도시와 달리 현대적인 건물을 찾기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이 역시 엄격한 규제가 원인입니다. 새로운 건물을 지어도 충분한 높이를 올릴 수 없으니까요. 2011년까지 파리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1972년에 만들어진 몽파르나스 타워였습니다.

파리 부동산 협회의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파리 내 건물의 62%가 1949년 이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합니다. 20%는 1949년에서 1974년 사이에 만들어졌고, 1974년 이후에 지어진 건물은 18%에 불과하다고 하죠. 2차대전에서도 파리 도심은 큰 피해를 보지 않았던 영향일 것입니다.
 
 에펠탑
에펠탑 ⓒ Widerstand

어쩌면 평등한 국민국가를 창조해내던 시기의 유산이 여전히 파리의 도시 구조 안에 남아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보면, 같은 높이로 뻗어 있는 파리의 도심 속에 홀로 우뚝 솟은 에펠탑이 건설 초기 여러 비판을 받았던 이유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비판의 초점이 너무 현대적인 디자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파리의 중심을 흐르는 센느 강 주변으로, 비슷한 높이의 건물이 늘어서 있습니다. 그 사이사이 모든 사람들이 방문할 수 있는 공공 미술관이, 공원이, 또 넓은 광장이 펼쳐져 있을 것입니다.

그 광경은 프랑스라는 정체성이 만들어지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면 파리는 평등한 국민들이 모여 만든 공화국의 수도로 가장 적절한 곳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죠. 프랑스라는 국민국가의 정체성이 그대로 응축된 도시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파리는 평등한 이들이 모여 만든 평면의 도시,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독특한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맑은 하늘 아래 반짝이며 빛나던 도시가 우리의 시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는 것을, 저는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세계일주#세계여행#프랑스#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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