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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지 사람들에게 제주는 버려진 땅이었고 죄수를 보내는 유배지였다. 지금은 이익을 노려 자본이 몰려들지만 진정으로 제주를 위하는 이는 많지 않은 듯하다. 나 또한 제주 사람 눈에는 그렇게 비칠 수 있으리라. 그런 제주인의 한과 정서를 이해하려다 제주학에 빠졌고 도민이 됐다. 키아오라리조트를 운영하면서 제주가 진정한 미디어와 인문학 교육의 중심이 되게 하겠다는 각오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을 설립했다. 제주는 오름의 섬인데 키아오라 바로 뒷산이 대수산봉이고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었기에 '수산봉수'라는 팻말을 발견하고 반가웠다. '수산봉수의 제주살이'는 제주학을 배경으로 내 일상에 사회적 발언을 실어 보내는 글이다.[편집자말]
아름다운 제주 곳곳이 학살의 현장이라니...
 

2년 가까이 제주학에 빠져 올 봄부터 여름까지는 제주4.3 관련 책 11권을 읽었다. 4월 3일 <한겨레> 허호준 기자가 <4.3, 기나긴 침묵 밖으로>를 출간한 데 이어 7월에는 현기영 작가가 3권짜리 소설 <제주도우다>를 내놓은 게 계기였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 4.3평화재단에 가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구하고 제주4.3연구소 후원회에 가입해 관련 자료를 많이 받아와 읽었다.

요즘은 틈틈이 4.3 현장을 돌아다니며 유적지 확인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토록 아름다운 제주 곳곳이 학살과 암매장의 현장이라니! 키아오라리조트에서 매일 쳐다보는 성산 일출봉 아래 광치기해변부터, 제주에서 가장 넓은 백사장이 있는 표선 해수욕장, 서귀포 정방폭포, 대정읍 섯알오름, 함덕 해수욕장과 서우봉의 빼어난 절경까지 모두 먹먹함과 처연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일출봉 아래 학살터  일출을 보는 명소인 일출봉 아래 광치기해변에서 제주4.3 때 수많은 학살이 자행됐다.
일출봉 아래 학살터 일출을 보는 명소인 일출봉 아래 광치기해변에서 제주4.3 때 수많은 학살이 자행됐다. ⓒ 이봉수
 
연간 1500만 명이 설렘 속에 뜨고 내리는 제주공항 활주로는 총살형을 집행해 암매장한 곳이어서 지금까지 발굴한 유해만도 387구에 이른다. 페리선이 오가는 제주항 앞바다는 예비검속자 500명을 배에 태우고 나가 수장한 곳이지만 유해조차 찾지 못했다.

너무나 안타까운 사실은 서북청년회를 앞세운 토벌대 군경이 불법·부당한 학살 명령에 순응하거나 과잉집행을 했다는 점이다. 1948년 4월 3일 봉기 당시 무장대의 숫자는 300여 명에 총기라고는 일제 99식 소총 등 30자루에 불과했다.

8.15 해방 이후 남한이 미국의 트루먼 독트린에 의해 '반공의 보루'가 된 결과로 빚어진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과 무차별 학살은 이념과는 무관한 제주민까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산으로 숨게 만들었고, 무장대에 희생된 군경을 포함해 3만 명이 희생되는 참극으로 이어졌다.

문형순 경찰서장의 '의로운 항명'

예외도 있었다. 1949년 문형순 모슬포경찰서장은 입산한 가족에게 식량과 의복을 전달한 혐의로 주민 100여 명이 처형될 위기에 놓이자 자수와 전향이라는 형식으로 생명을 구했다. 이듬해 성산포경찰서장 때는 한국전쟁이 발발해 계엄군이 예비검속자 총살 명령서를 하달하자 그 위에 '부당함으로 불이행'이라는 사유를 쓰고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서북청년회와 군대가 경찰을 우습게 알던 시절이었으니 자신마저 빨갱이로 몰릴 수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일을 감행한 것이다. 쉰들러가 1100명 유대인 목숨을 구한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행동이었다. 일본군과 일제경찰 출신이 군대와 경찰의 요직을 차지한 이승만 정부에서 그가 '의로운 항명'을 한 것은 광복군 출신의 자존심 때문이었을까?

그는 퇴직 후 제주 첫 영화관인 대한극장에서 매표원으로 일하거나 남의 집 단칸방에 얹혀 사는 등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1966년 삶을 마감했다. 그러나 2018년에는 '경찰영웅'으로 추서됐고 그의 흉상이 제주경찰청 청사 본관 뒤에 세워졌다.
 
문형순 경찰서장 흉상 4.3 때 많은 생명을 구한 문형순 서장의 흉상이 제주경찰청 안 열린시민공원에 세워졌다. 뒤에 보이는 추모비에는 당시 순직한 경찰관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문형순 경찰서장 흉상4.3 때 많은 생명을 구한 문형순 서장의 흉상이 제주경찰청 안 열린시민공원에 세워졌다. 뒤에 보이는 추모비에는 당시 순직한 경찰관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 이봉수
 
부당한 지시에는 '항명'을 해야

지금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씌워진 '항명'은 혐의 자체가 틀린 것이다. '항명'은 정당한 명령에 따르지 않을 경우에 해당되는데, 경북경찰청에 이첩하는 혐의 내용을 축소하라는 대통령실 국가안보실과 국방부의 지시 의혹 그리고 이를 '항명' 사건으로 규정한 군검찰단의 소환 지시를 정당하다고 볼 근거는 없다.

불법·부당한 명령은 당연히 거부해야 하고 오히려 이행하면 처벌해야 마땅하다. 하나회가 주동한 12.12 쿠데타도 불법 명령을 이행했기에 주동자들은 처벌받았다. 사단장이 '해병대가 눈에 확 띄도록 적색 티를 입고 작업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도 책임질 일이지만, 수심과 물살의 위험성을 목격한 일선 지휘관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고 작업을 중단하거나 구명조끼를 입혔더라면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

지금은 군인이든 공무원이든 언론인이든 불법·부당한 지시나 간섭에 저항한다 해도 해방 직후처럼 생명을 위협받을 부담은 없다. 그런데도 사고가 날 때마다 왜 부당한 지시를 거부한 사례가 거의 없고, 오히려 비리를 묻어버리려 한 정황이 드러나는 걸까?

다른 분야도 비슷하지만 군대의 경우 그 이유를 나는 우리나라 장교 충원 제도와 승진 관행에서 찾는다. 군의 고위장교단은 육·해·공군, 해병대 할 것 없이 대부분 사관학교 출신들로 구성돼 견제와 소통이 어렵다. 그들은 질 높은 군사교육을 장기간 받기에 자부심이 강하지만 학사장교 출신 등에게 배타심을 갖기도 한다. 그들끼리도 '기수문화'가 워낙 강해 감히 선배에게 쓴소리를 하기 힘들다.
 
'집단항명' 혐의 박정훈 해병 수사단장 국방부 조사 거부 고 채수근 상병 수사와 관련해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1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검찰단 앞에서 입장을 밝힌 뒤 경례를 하고 있다. 군 검찰단 출석이 예정됐던 박 전 수사단장은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를 명백히 거부한다"고 밝혔다.
'집단항명' 혐의 박정훈 해병 수사단장 국방부 조사 거부고 채수근 상병 수사와 관련해 '집단항명 수괴' 혐의로 입건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이 11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검찰단 앞에서 입장을 밝힌 뒤 경례를 하고 있다. 군 검찰단 출석이 예정됐던 박 전 수사단장은 "국방부 검찰단의 수사를 명백히 거부한다"고 밝혔다. ⓒ 연합뉴스
 
OCS 출신이기에 가능한 '항명'인 듯

박정훈 대령이 소신껏 처신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사관학교 출신이 아닌 점도 작용했던 것 같다. 언론에는 '해군사관후보생(OCS) 출신'이라고 소개돼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오해하는 독자가 있을 텐데, 'OCS'는 해군·해병 장교후보생을 함께 교육하는 사관후보생과정(Officer Candidate School)을 뜻한다.

그들은 대학 이상 졸업자를 대상으로 시험을 쳐서 선발하기에 자유분방한 편이고 대부분 중위로 전역해 사회에 진출한다. 사관생도 출신은 4년간 군사교육에 집중하고 진급이 초미의 관심사여서 분위기가 다르다. 개인 경험을 말한다면, 나도 OCS 출신으로 백령도 레이더기지 등 최전방에 배치됐다가 해군본부에서 감찰감 부관으로 근무했는데, 감찰감이 "이 중위도 말뚝 박아, 잘하면 대령까지는 올라갈 텐데"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해병대사령관과 <한겨레>의 '악연'

OCS 출신 해병장교 중에는 장기근무자로 잔류하는 이도 있지만 진급에서는 밀리는 경우가 많다. 해병대는 1980년대부터 24명의 사령관이 취임했는데 전도봉 장군을 빼고는 전원 해사 출신이다. 그도 김영삼 대통령과 같은 거제도 출신에 경남고 후배여서 가능한 발탁이었다. 미국은 사관학교 말고도 다양한 경로를 거쳐 참모총장이나 해병대사령관이 되는 이가 많아서 한국과는 매우 다르다.

전도봉 장군은 소위 임관 직후 동기생들과 함께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을 주동하는 사고도 쳤지만, 해병대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각종 일화를 남겨 해병대 마니아에게는 '레전드'로 통한다. 그런데 나와는 직무상 어쩔 수 없었던 '악연'이 있다. 1998년 <한겨레> 경제부장 시절 '야간국장' 당직을 서고 있는데 그가 해병대사령부 참모들 대여섯과 함께 전투복 차림으로 편집국에 들이닥친 것이었다.

진급 청탁과 뇌물을 받은 혐의를 <한겨레>가 1면에 단독 보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기사가 잘못됐으니 들어내라"라고 을러댔다. 참모 중에는 OCS 우리 기수 훈육관으로 낯익은 대령도 있었지만 모른 체하면서 애꿎게 사진부를 질책했다.

"사진 야근은 지금 뭐하고 있냐? 군인들이 편집국을 점거했는데… 이거 사진 찍어서 1면 사진 교체해!"   

그들은 곧 물러갔는데 사진은 원래 교체할 생각이 없었다. 사진부를 질책한 것은 부당한 압력에 대항하는 수단이었으니까. 그는 결국 대법원에서 500만 원의 벌금형과 자격정지 1년형을 받았고, 나중에 한전KDN 사장으로 재직했다.

해병대는 제주와 인연이 깊다

사실 해병대는 제주와 인연이 깊다. 해병대는 1949년 4월 진해에서 창설됐지만 12월에 제주도로 사령부를 옮겼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신병 3000여 명을 제주에서 모집해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때 제주여중과 교사양성소 여학생 그리고 미혼 여교사 등 126명은 해병대 제4기로 '자원입대'해 여군의 효시가 됐다.
 
해병대사령부 주둔지 49년부터 해병대사령부가 주둔했던 제주시 관덕로 65에 표지석이 서있다. 2015년에는 해병대9여단이 제주도에 창설됐다.
해병대사령부 주둔지49년부터 해병대사령부가 주둔했던 제주시 관덕로 65에 표지석이 서있다. 2015년에는 해병대9여단이 제주도에 창설됐다. ⓒ 이봉수
 
사관후보생 시절 해병대 훈육관은 '자원입대'라는 해병대 전통이 제주도에서 만들어졌다고 가르쳤는데, 제주4.3을 공부하면서 '자원입대의 진실'을 알게 됐다. 전시임에도 목숨 건 '자원입대'가 성행했던 것은 워낙 많은 제주민을 '빨갱이'로 몰아 죽였기에 자신과 가족의 신분을 보장받으려는 이가 많았기 때문이다.

'공정수사' 촉구한 역대 해병대사령관과 해병전우회

나는 일상에서 군대 얘기를 삼가려고 하는 편이다. 군대 얘기에 관심 없는 이들에게는 '민폐'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전쟁과 평화, 남북미 이슈, 군대 폭력 문제 등을 주제로 강연하거나 칼럼을 쓸 때는 군대 경험을 말하곤 한다. 해병대 수사단장 '항명' 파동이 옛 얘기를 꺼내게 했다. 마침 다부동 전적지에는 제주4.3 관련 최고위 정책결정권자였던 트루먼과 이승만의 동상이 세워졌다.

역대 해병대사령관과 해병대전우회는 14일 "사고의 책임을 수사함에 있어 공명정대하고 외부개입이 없어야 한다"는 요지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도 실립니다.


#항명파동#박정훈수사단장#해병대사령부#제주살이#키아오라리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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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제주 키아오라리조트 공동대표,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한미리스쿨) 원장, MBC저널리즘스쿨 교수(초대 디렉터)로 일하고 있습니다. 글쓴이는 조선일보 기자, 한겨레 경제부장,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초대원장(2008~2019), 한겨레/경향 시민편집인/칼럼니스트, KBS 미디어포커스/저널리즘토크쇼J 자문위원, 연합뉴스수용자권익위원장 등을 역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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