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9월 1일)은 관동(간토) 조선인 대학살 백주기가 되는 날이다. 사망자가 9만 9331명, 부상자가 10만 3733명에 이를 정도로 큰 피해가 발생한 대지진을 수습하려고 당시 야마모토 곤베에 내각은 '조선인 습격설'을 명분으로 계엄령을 발동했다.
조선인을 진압하라는 임무를 받고 출동한 계엄군에 경찰, 자경단이 합세한 연합 대오가 만들어졌고 조선인은 갑자기 재해의 원흉처럼 내몰렸다. 조선에서는 한 번도 겪지 못한 지진에 넋이 나간 상태에서 조선인은 갑자기 공격 목표가 되어 거리에서 무차별로 학살당했다. <독립신문>은 1923년 12월 5일 6661명이 희생당했다고 보도했다.
백년 전 이날을 기려 국회 소통관에서는 백주년을 맞아 더불어민주당 유기홍 의원이 10시에 기자회견을 열고 올 3월 여·야 의원 100명의 서명을 받아 자신이 대표발의한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하 특별법) 통과를 촉구했다. 31일 그를 만나 특별법에 노력을 경주하는 이유와 앞으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들어보았다.
흥분한 사람들 소행 아닌 국가가 저지른 범죄
- 간토 학살 사건 관련 특별법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이건 복잡한 얘기가 필요하지 않다. 영국이 런던 한복판에서 식민지 백성 인도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적이 있었나? 프랑스가 파리 도심에서 알제리인을 마구 죽인 적이 있었나. 오직 일본에서만 일어난 식민 모국에서 아무 죄 없는 조선인을 죽인 범죄다. 백년이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묻혀 둘 수는 없다."
유 의원이 발의한 특별법은 현재 행정안전위원회에 상정되어 있다. 특별법의 필요성을 강조할 때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유기홍 의원은 2014년에도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을 발의한 바 있다.
- 19대 국회 때부터 헤아리면 10여년 이상,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간토 학살 사건을 끌어안고 왔다. 특별한 까닭이 있는가?
"흔히들 유언비어에 흥분한 자경단원의 소행이라고 알고 있으나 본질은 일본의 국가 범죄다. 그렇기 때문에 1923년 당시 일본 중의원 본회의에서 다부치 도요키치(田淵豊吉) 의원이 야마모토 곤베에 수상에게 '조선인에게 사죄하고 유족을 구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3년에는 일본변호사협회가 자체 조사를 거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조선인 학살을 인정하고 사죄할 것'을 권고했다. 국가가 주도하고 관여한 민족 범죄, 제노사이드 범죄가 묻혀져서는 안 되기에 관심을 별로 받지 못하지만 이 법의 통과를 위해 매달려왔다."
그의 말대로 일본 국회에서는 정부의 책임을 묻는 추궁이 계속되어 왔다. 가장 최근에는 2023년 5월 23일 입헌민주당의 스기오 히데야(杉尾秀哉) 의원이 국가공안위원장을 향해 "교과서에도 다수의 기록이 있고, 중앙방재회의 보고서도 있다. 도쿄도도서관에도 국립국회도서관에도 자료가 있다"며 학살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자경단 개개인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국가를 향한 질문이고 추궁이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제까지 정부 내에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앵무새 같은 답변만 되풀이하며 사죄는 말할 것도 없고 진상규명조차 거부해왔다.
- 일본에서는 진보 성향의 국회의원만이 아니라 수많은 시민운동가가 간토의 진실을 밝히려고 노력해 왔다. 정작 당사자인 한국에선 간토 학살에 대한 관심이 미약하다. 원인을 뭐라고 보는가?
"일단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김복동 할머니, 이용수 할머니처럼 상징적인 인물이 있다. 강제동원 문제는 피해자가 연대하여 한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수십 년간 법정 투쟁을 해왔다. 하지만 간토 학살 사건은 생존 피해자가 없다. 유족은 2세조차 없지 않은가."
유기홍 의원의 분석대로 간토 학살 사건에서는 유족의 힘이 약하다. 이는 간토 학살 당시 이주 노동자로 갔던 조선인이 대개 20대로 자손이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고향에 남아있던 일부 어린 자손이나 유복자도 오랜 세월이 지나며 3세로 넘어갔고 이들마저 고령인 상태라 유족연합회를 구성해서 일본 정부와 조직적으로 맞서는 게 어려운 실정이다.
"윤석열 정부 태도 절망스럽기 짝이 없다"
- 100주년을 맞아 그 어느 때보다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특별법 통과의 전망은 어떤가?
"사실 쉽지 않다. 행정안전위에서 다루어지려면 여야 간사의 합의가 필요하다. 행안위를 통과하더라도 법사위 문턱을 넘는 과정이 남아있다. 내년에 세수가 40조 가까이 줄어들면서 기구를 만드는 문제에 대해선 묻지마 반대를 할 가능성이 있다."
그가 발의한 특별법은 ▲ 진상조사와 책임규명, 피해자 및 유족심사, 명예회복을 위한 활동 등을 위해 국무총리 소속으로 간토대학살진상규명및피해자명예회복위원회 구성 ▲ 피해자 추도를 위한 추도 공간, 역사관 조성, 역사 교육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특별법이 통과되면 위원회를 만들고 인력과 예산이 투입되어야 한다. 19대 국회 때도 예산 문제가 걸림돌이 되어 박근혜 정부 시절 특별법이 본회의에 오르지도 못하고 폐안이 된 바 있다.
- 그럼 어떻게 할 생각인가?
"김교흥 행정안전위원장과 깊이 있게 얘기를 나눌 생각이다. 그리고 박광온 원내대표, 이재명 당대표와도 특별 면담을 해 당의 의지를 모을 생각이다. 이 특별법은 법 통과도 의미 있지만 역사정의와 관련된 문제다. 예산 이전의 문제다."
- 예산을 떠나 역사정의를 세운다는 의미 부여가 다가온다. 그런데 앞서 의원님도 얘기했듯 윤 정부의 태도는 거꾸로 가고 있지 않은가?
"맞다. 100년 전 일로 무릎 꿇으라고 요구하란 말이냐 이런 인식은 정말 실망스럽다. 후쿠시마 오염수 문제에 대한 태도, 강제동원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제3자 변제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윤석열 정부의 태도는 절망스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한숨만 내쉴 수는 없지 않은가?"
유기홍 의원에게는 서울대 국사학과를 다니던 1979년 3·1운동 60주년을 맞아 토론회를 준비했는데 무산된 아픔이 남아있다. 박정희 친일 정권은 대학생의 교내 학술행사까지 막을 정도로 민족 정기를 세우는 노력을 집요하게 탄압했다.
그런 기억을 간직하면서 그가 원내에 진출해 가장 서둘렀던 것이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한 의원모임'이었다. 19대 국회에서 특별법이 좌절된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21대 국회에서(유기홍 의원은 20대 국회에는 진출하지 못했다) '올바른 역사교육을 위한 의원모임'과 '민평연' 같은 당내 다른 의원단체와 함께 국사편찬위원회 전 위원장 이만열 교수를 모셔서 간토 특별강연을 듣는 등 나름 준비를 해왔다.
안타깝게도 21대 국회 들어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이뤄지지 못했지만 그가 한일의원연맹에 들어간 것도 일본 내 진보적인 국회의원과 소통하면서 공동으로 간토 진상 규명의 목소리를 내보자는 취지였다.
그런데 지금 윤석열 정부는 예산도 예산이지만 역대 그 어느 정부보다도 친일 행보를 걸어가니 과연 국민의힘을 설득할 수 있을지 난감한 게 사실이라고 유기홍 의원은 속내를 털어놨다.
- 그래도 100주년을 맞아 많은 보도가 쏟아지고 있다. 일본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보수적이냐 진보적이냐 이런 매체 특성을 떠나 간토 학살에 대한 다양한 조명이 이뤄지고 있다.
"맞다, 모든 게 다 때가 있다. 일본의 식민지배와 관련된 사할린 동포문제, 우키시마마루 폭침 사건 최근 재일코리안에 대한 차별과 혐오 범죄 등 우리가 돌아봐야 할 문제가 수없이 많다. 간토 학살 특별법 통과가 단죄하지 못한 일본의 민족 범죄를 역사 앞에 드러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한일 양국 시민운동 활발, 이제 국회가 손 내밀 때
인터뷰 시간은 한 시간 남짓 짧았지만 그는 평소 지니고 있던 깊은 문제 의식을 들려주었다. 학살 백주년을 맞아 한일 양국에서 추도와 진상 규명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김태영 감독이 만든 다큐 <100년의 진실, 간토 조선인 학살>이 개봉되었고 모리 다쓰야 감독이 만든 극영화 <후쿠다무라 사건>(福田村事件)도 관객에게 선을 보인다.
한일 양국의 시민운동은 연대하여 각종 추모 집회를 열고 있다. 지난 28일 대방동 스페이스 살림에서는 '간토 학살 100주기 추도사업추진위원회' 주최로 100주기 추모 문화제가 열렸고 일본에서는 도쿄 요코아미초 공원에서 오늘(9월 1일) 오전 11시에 '관동대진재 100주년 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전'이 열리고 오후 1시 30분에는 '도쿄 동포추도모임'에서 '조선인학살 100년 동경추도회'가 개최된다.
9월 2일 10시에는 가나가와현 구보산 묘지에서 가나가와 추도회가 예정되어 있고 이날 오후 2시 30분에는 도쿄 아라카와 강변에서 호센카 주최로 '한국·조선인 희생자 추도식'이 계획되어 있다.
유기홍 의원은 이런 흐름을 받아 안아갈 생각을 갖고 있다. 인터뷰 말미에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간토 학살을 평생 학문적으로 규명한 강덕상 선생이나, 조선인 유골을 발굴하기 위한 일본시민운동가의 노력은 참으로 의미가 컸다. 한국의 시민운동도 그동안 헌신적인 노력을 해왔다. 이런 노력에 국회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100주기를 넘어서도 나는 이 노력을 멈추지 않을 생각이다. 일본은 제노사이드 범죄에 대해 반드시 사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