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유아교육학과를 나온 까닭에 졸업하자마자 유치원 교사를 했다. 유치원 교사를 하면서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내 노동이 쌓이지 않고 자꾸 흩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열심히 준비한 수업은 아이들의 한쪽 귀로 들어가 다른 쪽 귀로 나가는 것 같고, 열심히 만든 자료들은 주제가 바뀌면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특히나 큰 행사를 하고 나서 심혈을 기울였던 전시 자료들을 버릴 때는 허무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뭔가 성취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내가 한 노동이 눈에 보였으면, 남았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회사에 가면 내가 한 일이 남아 그 일로 평가받겠지. 회사에서 일하고 싶다'라고 생각했다.

아동 출판사에 지원했고 다행히 붙어서 유치원 교사에서 출판사 직원이 되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도 고충이 있었다. 내가 하는 기획은 처음에는 잘 진행되는 듯하다가 자꾸 막판에 엎어졌다. 일 년 이상 진행했던 수학 교구 프로그램이 엎어지고, 자연 관찰 제품이 엎어지고, 심지어는 우리 회사 제품을 중국에 홍보해서 거의 중국 주재원으로 가기 일보 직전에 다 없던 일이 되었다.

회사를 옮겨도 마찬가지였다. 일 년 이상 기획하고 진행하던 동화 전집이 엎어졌다. 간간이 맡았던 소 전집들은 출시됐지만, 회사를 옮기는 동시에 판권 편집자 칸에 있던 내 이름이 사라졌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간혹 전집에 들어가는 원고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나중에 출간된 책을 보면 내가 쓴 글이 아니다. 편집자가 많이 수정한 까닭이다. 왜지? 무슨 문제가 있었던 거지? 이름이 있는 작가가 아니라면 출판사 내부나 외부의 윤문 과정을 거처 글이 바뀐다 (물론 출판사마다 작가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
 
야구 선수들이 그라운드 위에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야구 경기 장면 야구 선수들이 그라운드 위에서 각자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다.
ⓒ 김지은

관련사진보기

 
그러다 최근에 야구를 즐겨보며 뜬금없이 야구 선수라는 직업에 대해서 생각했다. 야구 선수는 팀과 선수를 응원하는 팬이 있기에 존재 가능한 직업이다. 어떻게 보면 연예인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철저하게 실력이 데이터화 되어 평가된다.

한 번의 운으로 빛을 발하는 '반짝'이 있을 수 없다. 요행도 바랄 수 없다. 노력이 쌓여 실력이 된다. 그러나 야구 선수의 플레이는 경기하는 바로 그때, 한 번뿐이다. 그렇다면 선수의 플레이는 그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것인가.

야구 선수의 노력이 응축된 플레이는 팬들에게로 건너간다. 경기가 끝나더라도 팬들의 마음에, 기억에 남는다. 그렇다면 어쩌면 내가 유치원 교사로 했던 노동이 가장 남는 노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그 노동이 나에게 남지 않고 아이들에게로 건너가 남았을지도.

내가 전시한 자료들을 보고 아이들은 새로운 것을 알고 즐거워했을 것이다. 그 자료는 그걸로 쓰임을 다했다. 자료가 쓰레기통에 들어간 모습을 보고 그렇게 허무해 할 필요가 없었다.

처음 직업을 가졌던 때로부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에야 알 것 같다. 내 노력이 내가 원하는 형태 그대로 남는 직업은 거의 없다는 걸 말이다. 나의 노력이 아예 없어진 것 같아도 그 순간의 기억으로, 또한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서 어쩌면 시행착오로 내 경험속에 남는다.

내 노력이 내 눈에 보이든 안 보이든, 내가 원하는 형태로 남든 그렇지 않든, 그건 내 소관이 아니다. 내 소관은 노력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
 
롯데 자이언츠 팝업 스토어 한 켠에 빼곡하게 걸려있는 롯데 긴 팔 맨투맨 티셔츠 & 유니폼
▲ 롯데 자이언츠 긴 팔 티셔츠 롯데 자이언츠 팝업 스토어 한 켠에 빼곡하게 걸려있는 롯데 긴 팔 맨투맨 티셔츠 & 유니폼
ⓒ 김지은

관련사진보기

 
아이와 함께 오는 10일까지 성수에서 열리는 롯데 자이언츠 팝업스토어에 다녀왔다. 선수들 이름이 있는 키링은 사직 야구장에 가야만 뽑을 수 있었는데 팝업스토어에도 있었다.

아이는 신이 나 랜덤 키링 자판기에서 키링을 두 개 뽑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선수 이름이 있는 키링이 나왔다며 좋아한다. 우리 말고도 여러 사람들이 바구니 하나 가득 자이언츠 굿즈를 산다.

가을 야구에 가기 힘들 것 같은데도 긴 팔 맨투맨 티셔츠를 산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에서 선수들의 헬멧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생각보다 헬멧이 가볍지 않다. 매 경기 헬멧을 쓰고 뛰는 선수들을 떠올렸다.

갑자기, 선수들이 있음에 감사하단 생각이 들었다. 선수들이 있어 일상의 학업에서, 일에서 벗어나 아이와 야구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할 수 있다. 선수들의 플레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가을 야구가 힘들어 보이는 이 상황에도 긴 팔 티셔츠를 사는 팬들이 있다. 사실... 나도 샀다.

팬들이 보지 않을 때 한 연습이 쌓여서 팬들이 볼 때 좋은 플레이, 기억에 남는 플레이가 나온다.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나의 글들도 그와 같을 것이다.

태그:#노동, #야구선수, #롯데자이언츠팝업스토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