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아홉, 서른은 내게 좀 이상한 나이였다. 다르게 살아보겠다며 하던 일, 살던 집 다 떠나 여행을 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 시절 만난 사람들의 정체가 이상했다. 한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자신의 꿈을 털어놓았는데, 그의 꿈은 대단한 명예나 부를 얻는 게 아니었다. 그가 망설이며 고백하듯 말한 꿈은 이것이었다.
"부처나 예수가 되고 싶어요."
살면서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처럼 번쩍이는 순간들이 가끔 있는데 그때가 그랬다. 그때까지 나는 인간이 꿀 수 있는 꿈의 반경에 부처나 예수가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부처나 예수가 되고 싶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된사람 혹은 성인군자가 된다는 말일까. 철학자나 사상가가 되고 싶다는 의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꿈이야말로 인간이 품을 수 있는 가장 큰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절 만난 또 다른 사람은 내게 물었다. 왜 글을 쓰세요? 당시에는 그냥 글이 좋고,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란 생각에 쓰고 있었기에, 내게 그 물음은 너무나 대답하기 난해한 것이었다. 왜 글이냐고. 그제야 그게 바로 근원의 질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왜 글이었을까. 머뭇거리던 나는 질문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왜 글을 쓰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요. 좋은 사람이 쓴 글이 좋은 글이라고 믿고 있어요."
인생의 갈림길에 서있던 내게 벼락처럼 가진 만남은 그렇게 선명한 자국을 남겼다. 부처나 예수라니. 좋은 사람이 쓴 글이 좋은 글이라니. 좋은 사람을 부처나 예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 커 보일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반짝이는 걸 몸에 두르지 않아도, 특출 난 외모나 스펙이 아니어도, 무엇을 가슴에 품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은 그 자체로 고유한 빛을 낼 수 있었던 것. 실제로 지향점에 도달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그런 삶을 추구한다는 것만으로도 나보다 훨씬 큰 사람으로 여겨졌다.
'좋은 글'을 쓰려다 '좋은 사람'이라는 꿈을 품다
나는 기질적으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좋은 건 내가 가져야 하고, 남들보다 위에 서야 마음이 편한 사람. 오랜 시간 내 안에는 승부욕이 도사리고 있었다. 때문에 늘 괴로웠다. 타인을 경쟁자로만 보는 건 얼마나 피곤한 삶인가.
아무리 가져도 구멍 난 가슴을 메울 수는 없다는 걸, 누구 위에 서서 나의 행복을 찾는 건 부질없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은 시점이 스물아홉 서른이었다. 움켜쥐려고만 했던 삼십 년의 세월을 뒤로 하고, 양손에 힘을 빼는 삶으로 건너가던 찰나에 만난 사람들은 내게 스승과 같았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내 안에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보이지 않는 걸 꿈으로 품기는 처음이었다. 인간으로서 도전할 가치가 있는, 부자보다 유명인보다 더 근사한, 꿈인 것 같았다. 그 중심에는 '글'이 있었다. 글 쓰는 삶을 선택했고 이왕이면 '좋은 글'이 쓰고 싶었기에, 그 마음이 별안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거대한 꿈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순서가 좀 뒤바뀐 듯하지만, 나는 덜컥 그 꿈을 내 안에 심었다.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도 모르고.
그날 이후 십수 년 동안 그 꿈을 간직하고 살았다. 내 뜻으로 낳았으나 내 마음대로 자라지 않는 두 아이를 키우고, 뼛속까지 다른 남편과 싸우고 화해하기를 반복하면서, 종잡을 수 없는 장사에 먹고사는 걸 걱정하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좋은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까. 좋은 글은 어떤 글일까. 글이라고는 쓰지도 못하는 환경 속에 있었지만, 언젠가 쓸 글을 떠올리며 마음의 내공을 다진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의 정의는 무엇일까
흔하디 흔한 '좋다'는 말의 의미를 세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화를 내지 않고 늘 미소 지으며, 마냥 온화한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의문이 생겼다. 불의를 보고도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게 과연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행복하지 않은데도 타인을 위해 희생만 하고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일까.
여전히 '좋은 사람'을 명료하게 정의할 수는 없다. 다만 오래 고민한 끝에 몇 가지 조건은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알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며, 도움을 줄 때와 받을 때를 구별하고, 나와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 늘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분투하고,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데 인색하지 않으며, 말과 글로 떠들기보다 발로 실천하는 사람. 때마침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런 글귀를 발견했다.
무엇이 선이냐? 그대들은 묻는다. 대답하노니, 용감한 것이 선이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내가 나열한 조건에는 모두 용기가 감춰져 있다는 걸, 이 문장을 읽은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좋은 사람'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80억 명의 사람이 있다면, 80억 개의 정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
나는 부자를 꿈꾸는 사람보다 '좋은 사람'을 꿈꾸는 이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각자의 경험과 지식으로 정의를 내리고, 그 정의를 지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정의가 흔들릴 때면 과감히 경로를 수정할 줄도 아는 사람들.
'좋은 글'이 '좋은 사람'을 만드는 씨앗이 되기를
좋은 사람을 꿈꾼다는 건, 물질보다 가치에 의미를 두는 삶을 산다는 뜻이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보이는 것에 기대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는 더 심오한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칭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걸 잘 안다. 평생 노력만 하다 끝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꿈을 포기하지 않는 건, '좋은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좋은 사람은 어쩌면 좋은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좋은 사람'이 되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달라지고는 있다. 이전의 나는 감정 기복이 너무 심해서, 하루에도 수십 번씩 롤러코스터를 타곤 했다. 여전히 흔들리기는 하나 흔들리는 정도가 많이 줄었다. '좋은 사람'은 나와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리고 나니, 타인을 사랑하기에 앞서 나를 먼저 사랑해야 했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타인을 감싸 안을 수 없었다. 나를 사랑하기 시작하니, 감정의 진폭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 길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해 가다 보면, '좋은 사람'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글이 나를 키운다. 오래 글을 쓰기 위해 운동을 하고, 매일 글을 쓰기 위해 마음을 다스린다. 더 배우고 싶어 책을 가까이 하고,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모두 글이 가져다준 변화다. 주변으로 돌리던 눈길을 내 안으로 돌려, 몸과 마음에 집중하며 살아간다.
내 안에 축적된 에너지는 다시 주변으로 돌아간다. 글을 지속적으로 쓴다는 건 글만 쓰는 게 아니라,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키며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글이 아니었다면 훨씬 흐트러진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내 안에 싹트기 시작한 '좋은 글'이라는 씨앗이 다른 사람에게도 널리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연재를 시작했다. 언제 뿌리를 내리고 잎을 틔울지는 모르지만, 씨앗은 간직하는 것만으로도 희망을 지닌 것과 같지 않을까. 그 작은 희망을 나누고 싶었다. 단 한 명의 가슴에라도 씨앗이 자리를 잡았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그렇게 '좋은 글'이 '좋은 사람'을 만드는 씨앗이 되기를.
가을이다. 열매를 맺는 계절, 가을. 글쓰기 참 좋은 계절이다. 당신도 함께 썼으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그동안 부족한 사람의 [생애 첫 글쓰기] 연재를 지켜봐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연재는 여기서 마치려고 합니다. 더 내용을 보완해 조만간 책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