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기자말] |
이 땅이 기름진 건, 경기 남부 젖줄인 진위천 덕분이다. 용인에서 발원해 몇 고을을 적시며 서쪽으로 흐르는 물길이, 오산천과 황구지천을 만나 몸집을 불린다. 그곳에서 아산만을 향해 남쪽으로 급격히 머리를 꺾어 도는 곳 아래, 거대한 비행장이 앉아 있다. 경기 평택시 주한미군 '오산공군기지'다. 하지만 이 땅은 송탄이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미군에 의해 생겨난다. 미군 조종사들이 편의를 위해 Songtan(송탄)에 비해 철자 수가 적은 Osan(오산)을 선택함에 따라, 비행장 이름이 결정되었다.
어디나 그렇듯 미군 부대 주변은 경비가 삼엄하다. 마치 철옹성이 연상된다. 이 비행장이 밑바탕이었는지, 21세기 들어 평택은 '미군의 도시'로 재탄생한다. 당연한 귀결이겠으나, 이곳도 미군이 주둔하는 여느 도시처럼 그들로 인해 탄생한 음식이 하나의 문화가 되었다.
1914년 여러 면이 통합되어 탄생한 진위군 송탄면이 1938년 평택군 송탄면이 된다. 한적하던 이곳에 들어선 비행장 때문에 어디서나 그랬던 것처럼 기지촌이 들어선다. 그렇게 탄생한 기지촌과 미군 기지를 바탕으로, 송탄은 불과 10여 년 사이 급격한 도시 확산을 보이며 1963년 읍(邑)이 된다. 1981년 송탄시로 독립하지만, 1995년 다시 평택으로 되돌아온다.
비행장에 잇닿아 있는 도시 공간은, 미국의 어느 카운티(county)에 와 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공간도 2천년대 초반까지 극심한 갈등에 시달렸다. 공간을 지배하던 기지촌이 미군 재배치라는 변화에 맞닥뜨리면서부터다. 관광특구 지정을 두고, 관청은 물론 경제적 기반을 잃지 않으려는 상인회와 시민단체 사이 갈등이었다.
그들의 관문
항(港, port)은 엄밀한 의미에서 '화물'이 우선이다. 선박에 비해 뒤늦게 발명된 비행기 발착 시설에도 항을 붙여 공항이라 하였다. 공항은 화물보다 오히려 여객 운송이 주 기능으로 전환되었다. 군사 목적의 전투비행단 기지를 'Air force base'로 부르지만, 의미에서 공항과 큰 차이가 있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 귀빈은 성남 비행장이나 인천공항을 이용한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우리 하늘에 열린 우리 공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은 예외다. 그들은 송탄 비행장을 이용한다. 이곳이 우리나라를 오가는 미국 대통령 등 고위 관료들 전용 통로다. 공적인 업무로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면 반드시 이 기지를 이용한다.
주한 미군 재배치의 깊숙한 이면까지 헤아리긴 어렵다. 다만 상식에 기반한 추정으론, 북한보다는 중국 견제에 역점을 두고자 하는 그들의 의도를 쉽사리 엿볼 수 있다. 그 결과 평택은 이제 주한 미군의 본산으로 탈바꿈하였다.
과거 서울 용산이 갖고 있던 지위와 권한이 온전히 평택으로 옮겨졌다. 대추리는 완벽한 한국 속 미국이 되었다. 송탄 공군기지와 평택항의 우리 해군 기지까지, 군사적으로 완벽한 체계를 갖춘 셈이다. 이 도시는 어느덧 그들의 관문이 되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최혜국으로서 그들이 누리는 지위는 논외로 하자. 동아시아로의 회귀나 중국과의 패권 다툼,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같은 담론도 차지하자.
하지만 지난 80여 년 이어져 온 군사적 긴장 관계 속에서 주한 미군의 존재와 그 무게는 역사적 사실이다. 명과 암이 공존했고, 현재 진행형이다. 이런 복잡한 서술에도 결국 남북분단이라는 풀리지 않는 현실 모순이, 기울어진 관계 해결을 가로막고 있음을 우린 수없이 보아왔다.
철길 풍경
비행장이 송탄의 공간구조 형성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건 다름 아닌 철도다. 비행장이 들어선 1952년 지금의 송탄역이 신호장(열차의 교차 운행과 대피를 위하여 설치한 시설)으로 문을 연다. 이때는 순전히 비행장만을 위한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도시가 커지면서 지금의 송탄역이 되었다. 대추리 미군 전용 철도가, 평택-포승 선으로 탈바꿈했듯 말이다.
송탄역에서 분기하여 비행장 향하던 철길도 분명 그때 생겨났음을 추정할 수 있다. 군산 경암동이 일제 강점기 종이 공장을 향하는 철로였다면, 이곳은 순전히 미군을 위한 철길이다. 철길 옆으로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군산과 매우 흡사하다. 이 좁은 철길로 기차가 다녔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 철길로 분명 미군 보급품 등이 운송되었을 것이다. 흡사 곡식 낱알 떨구듯, 그중 뭐라도 철길 가에선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미군 부대에 기생해야만 했던 헐벗고 굶주린 우리 과거가, 활자처럼 이 공간에 박혀 있다. 하지만 길은 누추하지 않다. 그리고 곧다. 언덕도 없이 평탄하다. 철길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다. 이 길처럼 우리 삶도 과연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송탄역에서 미군 비행장까지 약 8백여 미터 철길이 보존되어 있다. 이곳이 벽화 거리로 얼굴을 바꾸었다. 멋스러운 벽화들이 즐비하다. 벽에 그려진 그림들은 흡사 미국의 어느 골목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규모는 작지만, 국제시장이라는 이름의 장터가 이웃한다.
장터 먹거리
국제시장에선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품을 취급했을 것이다. 부산 국제시장이 그러했듯 말이다. 시장의 존재는 송탄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먹거리 문화를 창조해 냈다. 이 또한 미군의 영향이다.
미군 부대가 있는 곳 어디나 그렇듯, 부대에서 흘러나온 먹거리를 재료로 새로운 음식이 탄생하였다. 그런 이유로 의정부처럼 송탄도 '부대찌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의정부 그것과 재료에 차이가 있다 한다. 일종의 차별화다. 이곳이 고향인 사람들에겐 추억의 맛인 모양이다. 이 부대찌개를 즐기러 일부러 먼 길을 찾는 발길도 상당수고, 프랜차이즈로 곳곳으로 퍼져나가는 추세다.
햄버거도 빼놓을 수 없는 이곳 먹거리다. 마니아들 사이에 이곳 햄버거가 상당히 좋은 평을 얻고 있나 보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3대 버거가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분명 미군을 상대로 시작되었을 터이다. 그렇게 시작된 햄버거가, 서구화 하는 우리 식문화를 따라 점차 토착화하지 않았을까. 명성에 걸맞게, 이를 즐기려는 젊은이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당면 떡볶이가 이곳에서 유명해지게 된 사유는 분명하진 않다. 미군과 연관성은 낮아 보인다. 하지만 맛으로 유명해진 건 분명한 사실이다. 추측하건대, 같은 자리에서 변치 않는 맛으로 옛 추억을 소환시키는 성실함이 제1의 요인 아닐까.
이미 맛집으로 송탄에서 유명해진 상태에서, 텔레비전 음식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전국적 명성을 얻는다. 떡볶이는 익숙한 맛이지만, 이곳 당면 떡볶이는 좀 색다르다는 평이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아련함으로 수십 년은 찾았음이 분명한 여럿의 중년여성이 이를 대변하고 있었다.
공간 지속성은
미군에 의존했던 다른 도시와 평택은, 분명 다르다. 파주나 동두천 등 지역 경제의 상당 부분을 미군에 기대야만 했던 도시는, 미군 재배치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 도시가 잃어버린 기회비용을 평택이 다 차지한 모양새로 귀결되었다.
평택은 온통 공사판이다. 미군의 대추리 배치에 따른 특별법으로 많은 재정이 투입되었다. 신도시가 들어서고, 교통시설 등 인프라가 개선되었다. 반도체 산업의 입지는 평택에 또 다른 활력소로, 급격한 인구 증가를 몰고 올 것이다.
이로 인한 도시 내 공간 불균형 또한 심화할 것이다. 기존 도심은 슬럼화가 가속화 할 것이고, 자본의 흐름에 따라 편차가 극심해질 것이다. 공간의 기능적 재배분이 그만큼 절실해진 시기다.
다행히 평택은 다양한 기능 입지가 가능한 도시다. 생산이건 물류건 아니면 소비건, 특화할 필요가 있다. 고속도로와 철도, 공항과 항만을 다 갖추었다. 추상적인 국제도시라는 구호보다 융·복합형 도시로 거듭나야 할 당위성이다.
군사적 측면을 배제하더라도, 송탄 비행장이 이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비행장 입지는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한 지형적 조건이 필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행장의 존재는 앞으로도 송탄의 도시 공간구조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될 것이다.
공간 지속성은 여러 조건을 갖춰야 한다. 친환경은 물론 문화 다양성과 접근성, 생산기능이 제대로 작동해야 한다. 송탄은 전적으로 미군에 의존하는 공간구조다. 부대찌개 맛처럼 공간구조도 철저한 차별화가 필요한 이유다. 기지촌이라는 아픔을 기억해야 하듯, 이런 여러 요소를 잘 지켜내야만 공간 지속성이 담보된다는 사실 또한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