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이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에는 많은 흠집들이 있습니다. 때문에 이 렌즈를 통과하는 사실들은 굴절되거나 아예 반사돼 통과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언론들이 의도적으로 비틀어 왜곡하거나 감춘 사실들을 찾아내 까칠하게 따져봅니다.[편집자말] |
'불리한 이슈는 정쟁이라 회피, 유리한 이슈는 정쟁으로 적극 대응'
대통령실의 언론 대응 지침을 요약, 정리하면 이렇다.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를 비롯해, 서울-양평고속도로 논란, 대통령 장모 구속 등 대통령실 차원에서 해명할 숱한 논란들이 있었지만, 대통령실은 사실상 침묵했다.
그런 대통령실이 적극적으로 언론 대응을 할 때가 있다. 뉴스타파의 김만배씨 녹취 보도 논란, 문재인 정부 통계 조작 논란 등에 대해선 '조작', '기망', '거짓' 등 원색적인 표현을 써가면서 거칠게 비판했다. 정부 여당에 불리한 이슈는 정쟁(정치적 이슈)이라 빠져나가면서, 조금이라도 유리할 법한 이슈는 적극 정쟁화시키는 행태다.
[홍범도 흉상 철거] "대통령실 나서지 않는 건 문제 아냐"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과 관련해 대통령실은 명쾌한 입장을 밝히지 않아 논란을 키웠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정도 논란이 커졌으면 대통령실이 나서서 논란을 정리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고 정면 비판하자, 그제서야 대통령실의 반응이 나왔다. 불쾌감 표현이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다음날인 4일 브리핑에서 문 전 대통령의 글과 관련한 기자들의 질문에 "전직 대통령이 지나치게 나서는 게 문제"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문제(흉상 철거 논란)는 대통령실이 나서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이 역사 왜곡 문제로 비화되고 있지만, 대통령실이 나서지 않더라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일본 원전 오염수 방류] "국무총리가 전달했다"
일본이 원전 오염수 방류를 시작한 지난 8월부터 현재까지 대통령실은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오염수 방류 시작 시점인 8월 24일, 대통령실 측은 "국무총리의 입장이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 국무총리가 정부 입장을 상세하고 충분하게 전달했다"고 했다. 국무총리가 입장을 밝혔으니, 대통령실은 별도로 입장을 내지 않는다는 얘기였다.
대통령실의 입장은 대통령실 예산 집행에서 간접 확인된다. 오염수 방류를 앞둔 지난달 '대한민국 정부' 유튜브 채널에 '국내 최고 전문가들이 말하는 후쿠시마 오염수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영상이 올라왔다. 이 영상은 대통령실 예산 3800만원이 투입된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 장모 법정 구속] "사법부 판결은 언급 대상 아냐"
지난 7월 21일 윤석열 대통령의 장모 최아무개씨가 법정구속됐다. 법원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경도된 나머지 법과 제도, 사람이 수단화된 것"이라고 질타하면서 법정 구속이라는 초강수를 뒀다. 현직 대통령 장모가 법정 구속되는 것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장모 관련 의혹을 부인해왔는데 2021년 12월 14일 관훈토론회에서는 "(반대로 장모가) 상대방에게 50억원 정도 사기를 당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사법부 판결은 대통령실이 언급할 대상이 아니"라는 짧은 입장만을 언론에 전했다. <한겨레> 등이 사설을 통해 대국민 해명이나 사과도 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지만, 대통령실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다.
[고속도로 장모 일가 특혜 의혹] "국토부에서 다룰 문제"
지난 7월 국토교통부의 서울~양평 고속도로 노선 변경과 관련해 종점지 인근에 대통령 장모 일가가 토지를 대거 소유한 사실이 알려졌다. 이후 원희룡 국토부 장관이 일방적으로 백지화를 선언하면서 의혹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대통령실의 언론대응은 '해명'이 아닌 '회피'였다. 대통령실에서 핵심이라 불리는 관계자는 7월 9일 "야당이 정치적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대통령실 입장이 간접적으로 나간 것은 있지만, 이 문제는 국토부에서 다룰 문제"라고 했다.
[김건희 여사 명품가게] "정쟁 소재 만들지 않는다"
지난 7월 김건희 여사가 대통령 리투아니아 순방 중 현지 명품 가게에 들르는 장면이 현지 언론에 포착됐다. 논란이 알려지자 대통령실 한 관계자는 '호객행위에 들어갔다'는 취지로 해명했다. 곧장 여러 명의 수행원을 뚫고 호객행위가 가능하냐는 반박이 이어졌고, 청와대 대변인을 했던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닭 머리를 가진 자"라고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이후 대통령실은 굳게 입을 닫았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팩트를 갖고 이야기해도 그 자체가 정쟁 소재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더 정쟁 소재를 만들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반면 대통령실은 '공세적 이슈'에는 역대 어느 정권보다 적극적이다.
뉴스타파 김만배 녹취 보도, 문재인 정부 통계조작 등엔 적극적
이달초, 2022년 대선 당시 <뉴스타파>에 김만배씨 녹취록을 건낸 언론인 출신 신학림씨가 김씨로부터 책값 1억6500만 원을 받은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당시 보도된 녹취에는 김씨가 윤석열 당시 대선후보가 저축은행 수사를 무마했다는 취지의 발언이 담겨 있었는데, 신씨의 금전 수수는 보도 신뢰도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사실이었다.
대통령실은 재빨리 반응했다. 대통령실은 지난 5일 '대통령 고위관계자 성명'을 별도로 발표했다. 익명의 성명서는 김만배씨와 신학림씨간 대화 녹취 보도를 '거짓'으로 규정하면서 맹공했다. 신씨의 금전 수수와 달리 검찰의 저축은행 무마 의혹은 앞으로도 검증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대통령실의 성명은 '거짓 인터뷰' 여론몰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 성명은 "김만배와 신학림의 거짓 인터뷰 대선 공작은 대장동 주범과 언노련(전국언론노조) 위원장 출신 언론인이 합작한 희대의 대선 공작 사건이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렵다"면서 "마치 대장동 게이트 몸통이 윤석열 후보였던 것처럼 조작하고 대선을 사흘 앞두고 녹취록을 풀어 대선 결과를 바꾸려 한 것"이라고 했다.
성명은 또 "날조된 사실, 공작의 목표는 윤석열의 낙선이었다"며 "조모씨는 부산 저축은행 수사 당시 윤석열 검사를 만난 사실이 없다. 보도를 위해서는 충분한 확인과 검증 과정을 거치고, 공익적 목적으로 보도할 가치가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 언론의 정도이자 상식"이라고 밝혔다.
"날조", "조작", "공범", "기망" 등 날선 표현으로 십자포화
감사원이 지난 15일 문재인 정부 당시 집값과 소득, 고용 등의 분야에서 수년간 통계 조작이 있었다고 발표하자, 대통령실은 또다시 팔을 걷고 나섰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가 여러 언론과의 전화통화에서 밝힌 입장을 보면, 여느 때보다 강도 높은 표현들이 등장한다. 정제되지 않은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의 말은 격앙되고 분노하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국가 기본 정책인 통계마저 조작해 국민을 기망한 정부"
"주식회사 문재인 정권의 회계 조작 사건을 엄정하게 다스리고 바로잡아야 한다"
"기업으로 치자면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주주인 국민은 말할 것도 없고 거래 상대방인 해외 투자자, 해외 시장을 속인 것"
"바로 잡지 않으면 우리도 회계 조작 공범"
대통령실 관계자의 이같이 격앙된 반응은 오히려 정쟁을 부추기는 소재가 되고 있다. 대통령실의 이중적 언론 대응 행태를 두고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역대 어느 정부 중 가장 편향적인 공보 대응이란 얘기마저 나온다.
전대식 전국언론노조 수석부위원장은 "대통령실은 행정부 수반을 보필하는 고위 기구로, 여러 이슈에 대해 국민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면서 "그런데 자신들이 이슈를 선별해서, 유리한 것만 말하면서 욕을 퍼붓고, 오염수 방류, 대통령 장모 구속 등에 대해선 입을 닫고 있는데, 역대 어느 정부도 이렇게 하진 않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수십년을 기자로 일했던 전 부위원장은 "행정부의 공적 공보 기능 자체가 오로지 대통령의 사적 심기만을 경호하는 형태로 전락해버렸다"면서 "대통령실의 이런 행태를 보면서도 불이익을 우려해 더 묻지 않는 기자들도 비판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