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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통치 공간이다. 경복궁이 들어선 해가 1395년이니 무려 630년이다. 통치에는 관리하고 통제한다는 '다스리다'가 내포되어 있다. 다스림은 다름 아닌 '군림'의 다른 표현이다. 군림하려면 없는 권위도 만들어내야 한다. 권위의 사전적 의미는 '남을 지휘하거나 통솔하여 따르게 하는 힘'이다.

아래로부터 위를 향하는 권위가 우러나오지 않을 때, 곧잘 총칼이 동원되곤 했다. 정통성의 문제였고, 이는 곧 나라 주권에 관한 문제였다. 왕조시대는 물론이고, 피식민지 시대를 거쳐 분단된 나라의 공화국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사안이었다. 곧 광화문과 광장의 역사 그 자체다.
 
광화문 광장 나라의 얼굴로서 상징성과, 시민의 의식을 지배하는 인식공간이다.
광화문 광장나라의 얼굴로서 상징성과, 시민의 의식을 지배하는 인식공간이다. ⓒ 이영천
 
경복궁과 함께 이 길도 생겨났다. 육조 거리다. 수레 7대가 다닐 수 있는 넓이라는 7궤(軌=8척=56척)로, 환산하면 약 17.5m(영조척營造尺=31.22cm)다. 1912년 '경성시구개수계획'으로 정한 넓이 53m가 1936년 확장된다. 1952년 100m로 정해지고, 1966년 불도저 서울시장이 지금의 넓이로 넓힌다.
 
세종로 확장(1966) 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방향으로 건물 철거가 진행되는 모습. 양편으로 확장된 길은 이때 지금의 넓이를 갖게 된다.
세종로 확장(1966)지금의 세종문화회관 방향으로 건물 철거가 진행되는 모습. 양편으로 확장된 길은 이때 지금의 넓이를 갖게 된다. ⓒ 서울역사박물관
 
이름의 변천 과정도 그대로 역사다. 왕조시대 '육조 거리'에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광화문통'이 된다. 해방 후인 1946년에 '세종로'라는 이름을 얻었고, 2010년 태평로와 남대문로를 합해 광화문∼서울역까지 '세종대로'가 된다.

차선을 줄여 2009년 광화문사거리까지 600m 구간에 광장이 들어선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었고, 광장이 내포한 다스림과 주권이라는 모순 대립을 통해 정반합으로 나아갔다.

열림과 닫힘

이 공간에 서면 필름처럼 지난 시대의 장면들이 스쳐 간다. 대부분 닫힘이다. 나라 살림을 거덜 내다시피 경복궁 중창을 몰아붙이던 흥선대원군의 결기에 찬 표정이 먼저다. 왕비를 잃고 궁녀 가마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향하던 왕의 황망함이 찬바람에 겹쳐 보인다.
 
광화문 광화문의 전면. 2023년 9월 현재 월대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광화문광화문의 전면. 2023년 9월 현재 월대 복원 공사가 한창이다. ⓒ 이영천
 
일제가 이 길에 전차선을 깔았고 광화문을 궁 동쪽 담장으로 밀쳐내 버린 상실감, 경복궁을 굽어보듯 백악산을 막아선 총독부 청사의 서늘함, 수탈과 탄압을 일삼던 무자비한 총칼, 이런 앗김에 피로 맞서던 저항이 점철되어 있다. 열어젖히진 못했지만 그나마 백성의 힘이 빛을 갈구한 최초의 몸부림이었다.

환희에 찬 해방 물결과 극심한 좌우 대립, 반쪽짜리 나라의 정부 수립 축하 행렬이 보이는 것 또한 당연지사다. 총독부 건물에 번갈아 깃발을 바꿔 걸던 비극의 한국전쟁, 질주하며 경무대 향하던 4·19 혁명의 물결, 뒤이은 쿠데타와 십수 년 이어진 지독한 독재 권력의 횡포가 장편 서사시처럼 흐른다. 독재자 사생아들이 광화문 옆에 세웠던 탱크에선 차라리 의분이 솟는다.

1987년 6월 항쟁이 그나마 형식적 민주주의를 열어젖힌다. 그 체제에서 맞이한 광복 50주 년, 총독부 청사 돔이 해체되는 장면을 보면서 비로소 해방을 실감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오히려 희화화하였다. 그런 까닭이었을까, IMF 환란이란 고통이 칼날처럼 떨어진다.

월드컵 축구로 한 가닥 열림을 체험한다. 새로운 세계였고, 넓혀진 인식 지평이다. 그 힘으로 2016년 겨울, 차가운 겨울을 촛불로 녹여낸다. 우매한 권력자를 권좌에서 끌어 내린다. 희화화한 민주주의가 광장으로 다시 뛰쳐나온 것이다.
 
광화문(대한제국) 광화문 전면 양측에 선 해치사 인상적인 옛 사진.
광화문(대한제국)광화문 전면 양측에 선 해치사 인상적인 옛 사진. ⓒ 서울역사박물관
 
광장에서 바라보는 광화문은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 모로 서 있다. 그 뒤 궁궐과 백악산이 이루는 배경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 인식공간이다. 언제건 꺼내 보아야 하는, 집합 기억이자 상징 기호다. 수백 년 닫힌 저 기호를 활짝 열어젖힐 힘은, 앞으로도 오로지 시민에게 있다.

권력과 공간

세종대로 양편 건축물은 대체로 엄숙하여 경직되어 있다. 더구나 몇은 담장에 갇혀 스스로 결박한 모양새다. 경기도청이던 의정부 터는 복원이 한창이다. 그 옆으로 미국이 지은 쌍둥이 건물 중 하나는 박물관이고, 철조망에 갇힌 미국 대사관은 늘 삼엄한 섬을 자처한다.
 
박물관과 대사관 미국이 지은 쌍둥이 건물의 용처가 다르다. 좌측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고, 우측이 주한 미 대사관이다.
박물관과 대사관미국이 지은 쌍둥이 건물의 용처가 다르다. 좌측이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고, 우측이 주한 미 대사관이다. ⓒ 이영천
 
맞은편 정부서울청사는 볼수록 생뚱맞다. 공모에 당선된 설계를 무시하고 얼굴을 바꿨다. 외부로 노출된 두꺼운 수직 기둥으로 권위를 세우려 했음인가, 어설퍼 보인다. 이 역시 담장으로 자기를 가두고 혼자 우뚝하다. 옆으로 들어선 청사도 크게 다르진 않다. 도무지 친근해지지 않는 풍경이다.
 
정부 서울청사 당초 현상공모에서 당선된 설계를 배제하고, 저런 모습으로 청사가 들어섰다.
정부 서울청사당초 현상공모에서 당선된 설계를 배제하고, 저런 모습으로 청사가 들어섰다. ⓒ 이영천
 
시민회관 화재로 1979년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선다. 전통 양식을 내걸고 현상설계로 지어졌으나, 파사드(facade)를 제외하곤 직선의 근엄함만 도드라져 보인다. 또한, 안채와 별채로 나뉜 한옥 배치를 현대 건축으로 풀어냈다지만, 정작 이용자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는 의문이다.

대규모 공연장으로 건축물이 공간에 끼친 영향 또한 적지 않았다. 상징성은 물론 문화계 전반에 명암이 극명한 영향을 미쳤다. 공화국 권력의 격에 따라 쓰임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세종문화회관 광장을 다시 조성하면서 회관 앞으로 나무가 심어져, 전체를 보기가 어려워 졌다.
세종문화회관광장을 다시 조성하면서 회관 앞으로 나무가 심어져, 전체를 보기가 어려워 졌다. ⓒ 이영천
 
옛 육조에 속하지 않은 땅은 민간 차지다. 특히 교보빌딩은 지어질 당시 전면을 감싼 유리로 많은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곳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서게 된 연유는 구구절절하다. 일본을 견제한다는 의미라 하나, 55년이 지난 지금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러함에도 동상이 광화문을 상징하게 된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세종로에 정작 세종대왕 조형물은 없었다. 좌상이 들어선 건 광장이 조성된 2009년 한글날이었으니, 지엄한 권력들이 이 공간을 어찌 취급했는지를 간접적으로 증언하는 셈이다.

최근의 모습

2016∼2017년 겨울에서 봄까지, 촛불로 광장은 뜨거웠다. 주권이 시민에게 있음을 재확인하는 과정이었다. 뒤이은 정부는 이런 열망을 받아안아 '광화문 시대'를 내세웠다. 하지만 현실적·물리적 여건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뒤이어 들어선 정부는 아예 광화문을 외면하고, 옛 일본군 군영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더구나 외교를 비롯한 최근 일본과의 관계에서, 아연실색하게 만드는 장면을 연발하고 있다. 우리는 정녕 어느 나라 백성이란 말인가?

최고 권력자 집무실이 옮겨갔다 해서, 나라 얼굴인 광화문의 권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공간이 가진 권위엔 역사가 배어들어 있기 때문이다. 지우개로 지워내듯 쉽사리 지워지는 게 아니다.
 
세종대로 부감(1930) 백악산-경복궁-총독부-세종대로로 이어지는 축선의 1930년 모습.
세종대로 부감(1930)백악산-경복궁-총독부-세종대로로 이어지는 축선의 1930년 모습. ⓒ 서울역사박물관
 
어느 한 시민단체에서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은 왕정 시대 인물이니, 동상을 옮기자고 우기나 보다. 극우 성향의 이 단체는, 대신 공화국 인사 동상을 세우자고 한다. 그들이 말하는 공화국 인사가 누구인지는 명확해 보인다. 독재자를 우상화하고 싶은 것이다. 이 단체 행사에 여당 인사들이 참여해 구설에 올랐다. 하지만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이념 이전에 역사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변치 않을 광화문에 권위를 부여한 건, 왕정도 일제도 공화국도 아니다. 오로지 시민의 힘이다. 누구나 자기 얼굴에 먹칠하지 않으려 경계하고 조심하며 삶을 살듯, 나라도 마찬가지다. 나라의 얼굴로써 상징 공간을 어떤 모습으로 가꾸고 키워가야 하는지는 전적으로 시민의식에 달려있다.

다시, 광장으로

도시에서 광장은 허파와 같은 존재다. 이곳을 통해 도시는 숨을 쉰다. 소통하고 생각을 나누는 장소다. 광장이 가진 개방성 때문이다. 특히 광화문 광장에선 정치·경제·법률·상업·문화가 논의되고 다듬어진다. 이런 까닭으로 광화문 주변 곳곳에서 수많은 생각과 구호가 날카롭게 대립한다. 이런 대립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 무척 건강하다는 방증이다. 획일화한 시민의식보다 훨씬 더 개방된 다양성이 표출되기 때문이다.

국가와 국민보다 도시와 시민이 우선이어야 한다. 심각하게 왜곡된 우리 근대화 때문에라도 더 그래야 한다. 시민사회의 성장을 바탕으로, 우린 근대화를 맞아들이지 못했다. 고양된 시민의식을 통해 왕정 해체를 경험하기도 전에, 침략과 수탈이라는 이식된 근대화를 황망하게 맞아들여야 했다. 흠결 많은 가부장이 강제로 자식을 훈육하듯, 우리는 국가와 국민이라는 담론에 먼저 매몰되어 버렸다.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상 뒤로 백악과 경복궁, 광화문과 광장의 모습.
광화문 광장세종대왕 상 뒤로 백악과 경복궁, 광화문과 광장의 모습. ⓒ 이영천
 
그 주 무대가 광화문이었다. 이제라도 올곧은 시민의식을 다시 세워야 하는 이유다. 광장을 시민의 자발성과 창의성으로 채워 갈 방향성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서 광장은 열려 있어야 하고, 시민의식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

그나마 광장은 많이 밝아졌다. 차량이 점령했던 공간이 시민 품으로 돌아오면서부터다. 광장 옆에 도열하고 있는 엄숙한 표정의 건축물은, 부족한 도시설계가 낳은 사생아들이다. 광장의 표정이 밝아질수록 이들 건축물도 언젠가는 변하리라 확신한다. 자라날 시민의식이 다시, 광장에서 꽃피워야 하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 금번 40회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감합니다. '우리 도시 에세이'란 이름으로, 피맛골에서 시작한 여정을 원점으로 회귀하듯 광화문 광장에서 끝을 맺습니다. 성원해 주신, 혹은 날카롭게 비판해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고생해 주신 오마이뉴스 편집진에게도 고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다른 이야기로 곧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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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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