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현충원 해설사 경험을 바탕으로 이곳에 묻힌 다양한 인물들의 생애와 사연을 소개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생각해야 할 점을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기자말] |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묘역을 둘러보다보면 묘비 앞면 안장자 이름 옆에 '배위' ○○○ 또는 '부군' ○○○이라고 적힌 경우가 눈에 띄는데요, 배위(配位)는 아내를 높여 이르는 말이고, 부군(夫君)은 남편을 높여 이르는 말입니다.
두 경우 모두 부부(夫婦)가 합장된 묘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배위 또는 부군이라는 문구 없이 '애국지사' 또는 '순국선열'이란 글자 아래 두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부부 모두 독립유공자로 인정돼 안장된 경우입니다.
2023년 3월 1일 기준으로 서훈을 받은 독립유공자 1만7748명 중 여성은 640명으로 3.6%에 불과합니다. 이 때문에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를 둘러보다 보면 부군이란 글자보다 배위라는 글자가 훨씬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여성이 대체로 남성보다 서훈 등급을 크게 낮게 받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점입니다.
독립유공자 중에서 부부 모두 서훈을 받은 경우가 80쌍 정도로 확인됩니다. 그중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부부 독립운동가로 현재까지 확인된 경우는 37쌍 정도인데요. 부부가 합장된 경우는 18쌍이고, 대전현충원 내에 각각 안장된 경우가 7쌍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나머지 12쌍은 부부 중 한 명만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고, 배우자는 다른 곳에 안장되어 있거나 묘지를 확인할 수 없는 경우였습니다.
합장된 18쌍 중 독립유공자 제1묘역에 안장된 경우는 이병화·허은(독립유공자1-26), 송세호·최갑순(독립유공자1-159), 박성관·최이옥(독립유공자1-193), 강석원·김두채(독립유공자1-263), 김지옥·윤경렬(윤경열)(독립유공자1-422) 등 5쌍이었습니다.
독립유공자 제2묘역에는 김영린·이옥진(독립유공자2-48), 정석규·장매성(독립유공자2-83), 주명우·윤악이(독립유공자2-279), 이원하·박기은(독립유공자2-378), 김재호·신정완(독립유공자2-413), 박상복(박성화)·임소녀(독립유공자2-414), 김연진·이정현(독립유공자2-466), 이두열·김영순(독립유공자2-862), 김사국·박원희(독립유공자2-1012), 송면수·김효숙(독립유공자2-1060), 송병채·심상순(독립유공자2-1078) 등 11쌍으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죠.
독립유공자 제3묘역과 제4묘역에는 김태을·신분금(독립유공자3-648), 이정호·한태은(독립유공자4-8) 부부가 각각 한 쌍씩 확인됩니다.
대전현충원 내에 각각 안장된 경우는 김성업·박현숙 부부(독립유공자1-251, 252), 정양필·이화숙 부부(독립유공자2-657, 658)와 권도인·이희경 부부(독립유공자3-77, 78), 김성권·강혜원 부부(독립유공자5-137, 138)가 바로 옆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장현근·신정숙 부부는 독립유공자 제2묘역에 618번과 652번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안장되어 있었고, 김근수·전월순(전월선) 부부는 독립유공자1-362와 독립유공자4-44에, 김준엽·민영주 부부는 독립유공자4-397과 독립유공자6-39에 각각 안장되어 있습니다.
배우자의 묘소가 확인되지 않아 남편 또는 부인 홀로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홍범도 장군의 부인 단양 이씨는 남편의 의병활동과 관련해 체포되어 취조를 받던 중 끝까지 비밀을 지키다 고문을 받고 1908년 3월 순국해 202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지만, 묘소의 위치를 알지 못해 홍범도 장군 홀로 독립유공자 제3묘역 917번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황병길(독립유공자1-28)·김숙경(미확인), 유창덕(미확인)·오항선(독립유공자3-283) 부부도 한명만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경우입니다.
묘소는 확인되지만, 배우자 중 한 명만 대전현충원에 안장되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성광복군 조순옥(독립유공자2-490)의 남편 안춘생과 1923년 중국 상해로 망명해 조국광복운동에 참가한 이순승(독립유공자2-84)의 남편 조용원(조시원)은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지낸 차리석은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고, 부인 홍매영은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 331번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정정화(독립유공자1-313)의 남편 김의한은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묘소가 평양 '재북인사의 묘'에 있습니다. 김순애(독립유공자4-313)의 남편 김규식과 노영재(독립유공자1-337)의 남편 김붕준, 연미당(독립유공자1-375)의 남편 엄항섭도 한국전쟁 때 납북돼 서울현충원에 위패로 봉안되어 있습니다.
이중 김규식과 엄항섭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이들 부부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분단으로 인해 묘 자리도 한 곳으로 모실 수 없는 분단 현실을 깨닫게 됩니다.
김온순(독립유공자2-112)의 남편 김광희는 1922년 7월 14일 조직된 고려혁명위원회 해외조직부장으로 활약하고 연해주로 가서 민족혁명 단체의 통일에 노력했고, 1926년 4월 5일 조직된 고려혁명당 간부를 거쳐 1930년 3월 3일 한족총연합회의 지도당으로 조직된 신한농민당 위원장을 역임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1년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부인 김온순의 묘에 부군으로 합장되어 있어 묘비명 수정이 필요합니다.
백일규(독립유공자2-975)의 부인 김낙희도 1919년부터 1945년까지 독립의연금, 대한민국임시정부후원금 등의 명목으로 여러 차례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한 공훈을 기려 2016년에 건국포장을 추서 받았는데, 김낙희 또한 대전현충원에는 배위로 합장되어 묘비명 수정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부부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같은 조직에서 독립운동을 한 경우도 있고, 서로 다른 시기 또는 다른 지역, 다른 조직에서 서로 다르게 독립운동을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물론 독립운동을 하던 청춘남녀가 부부의 연을 맺는 경우도 있었죠. 이런 부부들은 함께 독립운동에 나서면서 서로를 응원하고, 의지하는 동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부부가 함께 독립운동에 나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죠. 누군가는 가족을 챙기고, 살림을 도맡아야만 했습니다. 그일 대부분은 여성들의 몫으로 간주되던 시절이다 보니 서훈을 받은 여성의 비중이 현격하게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헌신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에 나설 수 있었기 때문에 독립 운동가를 지원하고 뒷받침해줬던 이들의 역할 또한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한편 독립유공자 제1묘역 264번에 안장된 강영석, 신경애 부부도 부부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었지만, 강영석이 1939년에 친일 월간지 <녹기>를 발간하고, 잡지에 친일 글 다수 게재한 사실이 밝혀져 2011년에 서훈이 취소되면서 부부 독립운동가 명단에서는 빠지게 됐습니다.
하지만 강영석의 유해는 이장하지 않은 채 묘비명만 '애국지사 강영석, 신경애의 묘'에서 '부군 강영석 애국지사 신경애의 묘'로 바뀌면서 서훈 박탈자에 대한 조치로는 미흡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