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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발칸 반도 여행의 시작입니다.

발칸 반도는 다른 유럽 지역에 비해 관광업이 크게 발달한 곳은 아닙니다. 최근까지 분쟁을 겪어 온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겠죠. 하지만 크로아티아는 예외입니다. 아드리아 해에 접해 있는 크로아티아는 오래 전부터 관광지로 유명했죠. 물론 수도인 자그레브보다는 더 유명한 관광지들이 많이 있지만요.
 
 크로아티아의 국기
크로아티아의 국기 ⓒ Widerstand
 
안타깝게도 제가 자그레브에 방문했을 때에는, 대부분의 관광지가 공사 중이었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올라간 언덕 위의 박물관은 아예 내부를 완전히 허물고 다시 짓고 있더군요. 내부에는 들어갈 수 없는 성당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즐기기에는 충분한 며칠이었습니다. 시간에 여유가 있었던 덕에 작은 미술관 몇 곳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도 얻었습니다. 오히려 크고 화려한 미술관들보다 재미 있는 그림들을 발견하기도 했고요.

유명한 성 마르카 교회의 내부에는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특징적인 지붕의 타일 장식은 멀리서도 충분히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구시가로 올라가는 길의 작은 제단에서는 사람들이 성화 앞에서 촛불과 함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성 마르카 교회
성 마르카 교회 ⓒ Widerstand
 
낭만적인 도시였습니다. 짧은 도심 산책에서도 그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도시가 언제나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였던 것만은 아니었겠죠. 크로아티아는 역사의 이편과 저편을 끝없이 오간 국가였습니다. 발칸 반도의 모든 나라들이 그렇듯이 말이죠.

크로아티아인들은 7세기경부터 이 지역에 크로아티아 공국을 세우고 자리잡았습니다. 한때는 영토를 크게 확장하기도 했죠. 하지만 11세기 왕가는 단절되었습니다. 분쟁 끝에 왕위는 헝가리의 왕에게 돌아갔죠. 크로아티아는 헝가리와 동군연합을 이루었습니다.

이후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에 의해 멸망합니다. 크로아티아 역시 오스트리아의 영토가 되었죠. 1차대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니 중세 이후 1천 년 가까이 독립 국가를 이루지 못한 셈이었습니다.
 
 자그레브 중심의 반 옐라치치 광장.
자그레브 중심의 반 옐라치치 광장. ⓒ Widerstand
 
1차대전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패전했습니다. 제국은 뿔뿔이 흩어졌죠. 발칸 반도의 슬라브인들은 따로 국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슬로베니아인, 보스니아인, 몬테네그로인 등이 모여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각 민족의 이해관계는 크게 달랐습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주도권을 쥔 세르비아인과, 이에 불만을 품은 크로아티아인은 심각하게 갈등했습니다. 크로아티아는 분리 독립을 주장했고, 세르비아인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발칸 반도라는 지역 자체가 그랬습니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모두 남슬라브인으로 인종이 유사하고, 언어도 서로 유사합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아주 다양한 민족이 살고 있었고, 이들을 하나의 국민국가로 통합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죠.

당장 종교만 해도 그렇습니다. 크로아티아인은 주로 가톨릭을 믿습니다. 세르비아인은 주로 정교회 신자죠. 보스니아인 가운데에는 무슬림이 많습니다. 이들을 유기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죠.

1차대전이 발생하게 된 원인부터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당한 사건이었습니다. 발칸 반도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충돌하고 있는 화약고였던 것이죠. 1차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도 크게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
 
 공사 중이던 자그레브 대성당. 가톨릭 성당이다.
공사 중이던 자그레브 대성당. 가톨릭 성당이다. ⓒ Widerstand
 
결국 크로아티아는 2차대전 와중에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했습니다. 독립을 위해서는 나치의 손을 잡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죠.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지역에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나치의 괴뢰 정부가 세워졌습니다.

권력을 잡은 크로아티아인은 세르비아인 학살에 나섰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거든요. 이 땅도 크로아티아의 영토가 되었으니, 인종 청소에 나서는 데 거리낄 것은 없었습니다.

당시 크로아티아의 파시스트 조직이었던 '우스타셰'의 학살은 독일군조차 비판했을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세르비아인 수천 명의 학살을 지시한 우스타셰의 군종 목사가 독일군에 의해 재판을 받은 경우도 있었죠. 전쟁 과정에서 최소 20만 명의 세르비아인이 학살의 피해자가 되었습니다.
 
 성당 앞의 성모상
성당 앞의 성모상 ⓒ Widerstand
 
하지만 발칸반도의 역사는 그리 일방적으로만 진행되지는 않았죠. 나치 독일의 패전과 함께 크로아티아 독립의 역사도 끝을 맺었습니다. 크로아티아는 이제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어 유고슬라비아에 속하게 되었죠.

전쟁 전과 다를 것은 없었습니다만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을 뿐이었죠. 발칸 반도의 다양한 민족과 문화는 유고슬라비아라는 단일한 국가 아래 모였습니다. 불만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였습니다. 오히려 2차대전을 겪으며 그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말았죠.

그나마 티토의 지도력과 민족주의 억압 정책에 의해 유지되던 유고슬라비아는 티토 사후 돌이킬 수 없는 붕괴의 길을 가게 됩니다. 유고슬라비아 안에서는 세르비아인의 권력 독점이 더욱 가속화되었고, 타 민족에 대한 차별과 배제도 노골적으로 벌어졌습니다.

1991년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나라들도 독립을 선언합니다. 크로아티아 역시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의 주도권을 쥔 세르비아는 구성국의 독립을 허용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세르비아는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 독립을 원하는 국가들과 전쟁을 이어갔습니다. 1991년부터 벌어진 전쟁은 길게 보면 2001년까지, 1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발칸 반도 각 국가의 국민들이 겪어야 했을 고통은 굳이 더 언급할 필요가 없겠죠. 이 과정에서 세르비아가 벌였던 전쟁 범죄도 막대한 수준입니다. 당시 세르비아를 이끌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국제형사재판소에 의해 반인륜범죄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다 사망했죠.
 
 자그레브 전경
자그레브 전경 ⓒ Widerstand
 
한때 제3세계를 주도하던 유고슬라비아는 뿔뿔이 흩어졌고,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손실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 재건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금까지도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자그레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크로아티아 역시 한때는 나치의 전쟁범죄에 가담했고, 세르비아에 대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또 다시 독립된 국가를 만들기 위해 전쟁과 폭력의 시대를 거쳐야 했던 것도 크로아티아의 역사였죠.

크로아티아는 역사의 이편과 저편을 오갔습니다. 꼭 크로아티아뿐이 아니었습니다. 발칸 반도의 민족들은 수없이 그 역사의 줄을 오가며 살아갔죠.

크로아티아는 독립된 국가를 만들었습니다. 전장이 되어 무너졌던 도시는 재건되어 지금까지 왔습니다. 크로아티아의 도시와 해변에는 오늘도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도시의 골목 안에는, 여전히 학살과 탄압, 보복의 역사가 숨어 있을 것입니다. 이 도시의 지층 깊은 곳에 새겨져 있을 것입니다. 자그레브는 다시 낭만적인 도시가 되었지만, 끝내 영광의 시절을 회복하지 못한 도시가 발칸 반도에는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크로아티아의 골목을 둘러보며, 이제야 발칸 반도 여행을 시작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낭만적인 거리와 성당의 틈에 숨어 있는 슬픈 역사를 살펴본 뒤에야, 발칸 반도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


#세계일주#세계여행#크로아티아#자그레브#발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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