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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아이들에게 과제 삼아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다. 하루 동안 한 대기업이 만든 제품을 사지도, 보지도, 먹지도, 타지도, 쓰지도 않으면 도서상품권을 선물하기로 했다. 당시 대한민국이 이 기업의 '공화국'이라는 말이 유행하던 때여서, 아이들에게 그 의미를 직접 체험하도록 하고 싶었다.

아이들은 식은 죽 먹기라며 너도나도 5000원짜리 말고 1만 원짜리 도서상품권으로 하자고 했다. 또 자기가 실패하면 한 달 동안 아침 교실 청소를 담당하겠노라고 호언장담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내가 이겼다. 아이들은 휴대전화에서부터 가전제품, 아파트, 신문, 방송, 식품, 편의점에 이르기까지 이 대기업 제품이 아닌 게 없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영어 써 있지 않는 물건, 있을까?
 
 세종대왕
세종대왕 ⓒ 픽사베이
 
최근 아이들과 비슷한 내기를 했다. 이번엔 영어다. 등교할 때 입는 옷과 가방, 문방구 등에 영어가 단 한 군데 적혀있지 않다면 '1인 1피자'를 쏘겠다고 통 큰 제안을 했다. 과거 삼성 제품을 피하는 것보다 백 배는 더 어려운, 아니 불가능한 미션이라고 여겨서다.

이번엔 아이들도 쉽지 않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휙 훑어보더니 대부분 지레 포기했다. 대신 개수를 늘려달라며 흥정을 걸어왔다. 아예 없을 순 없으니 5개 정도까지는 허용해달라는 것이다. 내심 그마저 불가능하다고 여겨 흔쾌히 수락했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 아이들의 포기 선언까지는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걸치고 있는 재킷과 가방 속 필통 하나만 열어봐도 승부는 그대로 끝났다. 한 아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 중에 영어 철자가 적혀있지 않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애초부터 잘못된 내기였다며 역제안하는 아이도 있었다. 차라리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 중에 한글만 적혀있는 걸 5개 정도 가져오면 되는 걸로 하자는 거다. 그마저 어렵다고 여겼는지, 약삭빠른 한 아이는 아무런 글자가 박혀있지 않은 것도 허용해달라고 떼쓰듯 했다.

그 또한 수용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이들은 연신 자기 옷과 가방, 책상, 사물함 등을 수색하듯 샅샅이 뒤졌다. 모두 허사일 걸 알기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기실 제품의 라벨 끝에 예외 없이 적혀있는 'Made in Korea' 하나로 끝날, 뻔한 승부였다.

아이들과 내기를 건 이유가 있다. 우리글과 말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태부족하다는 안타까움에서다. 그다지 어렵지 않은 낱말의 맞춤법이 틀리는 건 예사이고, 사자성어는커녕 속담이나 낱말의 뜻조차 몰라 되묻는 아이가 적지 않다. 분명 고등학생인데 초등학생을 보는 느낌이다.

한자어로 된 낱말은 의미를 모르다 보니 무작정 영어 단어 외우듯 암기한다. 내신 성적이 1~2등급인 최상위권 아이들조차 한자는 아예 젬병이다. 한자로 된 제 이름 석 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자가 익숙지 않으니 한자어가 영어 단어처럼 느껴지는 거다.

영어 영역 지문보다 국어 영역 지문이 어려워?
 
 한글
한글 ⓒ 픽사베이
 
국어 영역 지문이 영어 영역의 그것보다 더 해석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종종 듣게 된다. 특히 고전 문학에 등장하는 고어나 국한문혼용체 문장을 두고선 차라리 외국어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나아가 지금 쓰지도 않는 글과 말을 왜 굳이 배워야 하는지를 따져 묻기도 한다.

그 시간에 영어를 공부하는 편이 더 낫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아이도 있다. 우리글과 말은 의사소통에 문제가 없다면 그걸로 족하다는 거다. 옛 고전과 역사 등을 읽어야 한다면 전문 번역가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는 설명이다. 말하자면, 필요한 사람만 공부하자는 뜻이다.

의사소통에 아무런 불편함이 없다는 요즘 아이들의 국어 실력을 잠깐 소개한다. 노파심에 덧붙이자면, 수능이나 모의평가의 성적을 말하려는 게 아니거니와 교사로서 내가 만난 아이들의 사례로 성급하게 일반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없지 않다. 기성세대라고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다.

우선, 자음 'ㅌ'을 제대로 읽는 아이가 많지 않다. '티긑'이라고 읽는 경우가 절반이 넘는다. 종이 위에 발음 나는 대로 적어보라고 하면 '티긑'에서 '티긋', '티귿' 등 그야말로 각양각색이다. 틀렸다고 말하면, 대번 굳이 이걸 알아서 어디에 쓰냐며 되레 반문한다.

'넓다(널따)'와 '밟다(밥따)'를 정확히 읽는 아이는 손에 꼽을 정도다. 묻는 의도를 유추해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으로 맞히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대부분 '넙따'와 '밥따'로 읽는다. 이 또한 교정하려 들면, 발음법도 표기법도 세월이 흐르면 변하기 마련이라며 너스레를 떤다.

요즘 아이들은 '맞히다'와 '맞추다', '다르다'와 '틀리다', '가르치다'와 '가리키다' 등도 헷갈려 하며 마구 혼용한다. 그들 말마따나, 잘못 사용돼도 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 대화 도중 쓰는 표현이 적확한지 따져보며 말하는 아이도 없고, 상대방에게 지적하는 경우는 더더욱 없다.

초등학교 시절 받아쓰기 숙제를 숱하게 했을 텐데도 맞춤법 또한 아이들이 힘들어하는 부분이다. 소리 나는 대로 적거나 받침이 틀리고, 한자어의 경우엔 의미를 잘 몰라 '배열'이 뒤죽박죽인 경우가 허다하다. 무늬를 '무니'로 적고, 반대로 잔디를 '잔듸'로 쓴다. 빼앗다를 '빼았다'로 적는가 하면, 맞서자를 '마써자'로 쓰는 황당한 경우마저 있다.

교과서 속 '낭중지추'나 '천의무봉'과 같은 사자성어를 '낭지중추'나 '천봉의무' 등으로 적어 헛웃음을 짓게 한다. 한자에 서툴다 보니 맹목적으로 외운 결과다. '동분서주'나 '오월동주'처럼 잘 알려진 표현조차 '동서분주'나 '동주오월'처럼 뒤집기 일쑤여서 딱히 놀랍진 않다.

이는 교사가 서술형 시험 출제를 주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맞춤법이 틀렸다고 오답 처리하면, 몇몇 아이들은 찾아와 국어 시험도 아닌데 너무 엄격한 채점 기준이라며 하소연한다. 심지어 교과목의 성취 기준과 직접적 관련성이 없다며 문제 삼는 학부모도 드물게 있다.

하긴 맞춤법까지 갈 것도 없다. 당최 무슨 글자인지 알아보기 힘든 '악필'이 태반이다. 시험 답안이야 어쩔 수 없지만, 글자의 판독이 어려워 과제물을 인쇄된 출력물로만 받는다는 동료 교사가 많다. 요즘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재는 '펜글씨 교본'이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교사마다 원인에 대한 진단은 한결같다. 요즘 아이들이 책 읽기를 멀리하고, 짧고 자극적인 스마트폰 영상에 길들어져 있다는 점을 첫손에 꼽는다. 여전히 막강한 사회적 위상을 지닌 영어 능력에 대한 선망에 애꿎은 우리글과 말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분석을 내놓는 이도 있다.

내수용 물건에 영어 이름을 붙이고 죄다 영어 철자로 된 디자인이라는 점을 지적했더니, 아이들은 대뜸 "세련돼 보인다"는 반응을 보였다. 옷과 가방 등에 우리 이름이 붙어있다면 '촌스럽게' 느껴진다는 거다. "영어로 꿈을 꿔보는 게 소원"이라는 마당이니 더 말해서 무엇 할까.

요즘 아이들끼리 사용하는 단어의 가짓수가 나날이 줄어드는 느낌이다. 어휘력은 사고력과 정비례한다는데, 그만큼 아이들의 사고력이 퇴화하고 있다고 한다면 나만의 억측일까. 부족해진 '한글식 사고력'을 '영어식 사고력'이 벌충하게 될까. 공교롭게도 오늘은 한글날이다.

#한글날#영어 사대주의#맞춤법#독서량 부족#어휘력과 사고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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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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