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은 한국의 민주화 이행에 있어 중대한 공헌을 한 민주화 투사이자 동북아평화와 남북한의 평화통일에 관해서도 중요한 업적을 남긴 정치가다. 두 분야에 있어 그의 족적과 유산이 워낙 커 일반적으로 이 부분이 주로 알려져 있는데, 그에 못지 않게 의미가 큰 부분은 '경세가'로서의 면모와 업적이다.
김대중은 IMF구제금융사태 당시 국가부도위기를 넘기고 과감한 구조개혁을 단행해 한국 경제가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한류의 배경이 되는 문화강국 건설과 지식정보강국 건설 등 21세기 신성장동력을 창출했으며 복지정책의 패러다임적 전환을 통해 한국이 복지국가 반열에 오를 수 있게 했다. 이같은 사회경제분야에서의 큰 업적은 실용적이고 창의적인 그의 정치리더십에 기인한다.
김대중은 독재 정권에 맞서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할 때에도 정책연구에 매진했다. 그래서 그는 다양한 분야에서 관련 분야 석학들과 깊이 있는 토론이 가능할 정도의 지식을 갖췄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비전을 세우고 정책을 가다듬어서 대중참여경제론, 3단계평화통일론, 4대국안전보장론 등의 국가발전전략을 내세울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김대중의 활동은 그가 남긴 수 많은 텍스트자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음성 및 동영상 자료는 드물다. 특히 민주화운동시기인 1970, 1980년대에는 특히 그랬다. 그렇게 볼 때 최근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김대중의 인터뷰 동영상 자료는 사료적·학문적 가치가 크다.
이 자료는 김대중 2차 망명 기간(1982.12.23.~1985.2.6.)인 1984년 말과 1985년 초에 촬영된 것이며 13분 9초 분량이다. 원래는 더 길었던 것으로 판단되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이 정도다. 이 동영상 자료에는 김대중이 하버드대학교에 대중참여경제에 관한 논문을 제출한 이유, 3단계 통일론, 해방 직후 이승만 노선과 김구 노선을 평가한 부분 등 3가지 주제로 구성돼 있다.
이 자료는 목숨을 걸고 민주화 투쟁을 전개하던 시절에도 정책연구를 병행한 김대중의 진면목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 글에서는 특히 김대중이 하버드대학에 대중참여경제 논문을 제출한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래서 이 논문의 주요 내용과 작성 배경 등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김대중의 대중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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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만 수출이 안 되면 한국은..." 김대중의 진단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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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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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김대중은 대중참여경제의 핵심은 자유경제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그 하버드 대학에서 Mass Participatory Economy(대중참여경제) 해서 논문을 냈고. 그것이 이번에 하버드 대학 출판부에서 책으로 나오도록 그렇게 결의를 봤습니다. 그 안에서 내가 자세한 것은 설명했습니다만은, 나는 한국의 현재 경제가 관권 경제이기 때문에 이것을 진정한 자유 경제로 돌려야 한다 하는 것이 나의 주장입니다.
자유시장경제는 김대중 경제사상의 핵심이며 이와 같은 그의 입장은 그가 청년시절인 1950년대에 쓴 여러 글에서도 확인된다. 또한 김대중은 성장, 안정, 분배의 3가지 요소가 균형있게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대중경제는 경제의 목적이 뭐냐? 경제라는 말 자체가 말하자면 경세제민입니다. 나라를 어떻게 경영하고 백성을 어떻게 구하냐 하는 문제에서 나온 것이 경제입니다.
경제의 목적은 국민 전체를 잘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에서는 성장도 필요하고 또 안정도 필요하지만 분배도 병행돼야 나갑니다. 분배 없는 성장과 안정은 그건 사상누각입니다. 그렇다고 또 노동자에 대해서 그 사람들의 생산성 향상 이상으로 분배를 해주면 이거는 결국 인플레이션으로 연결되고 경제 파탄이 옵니다.
오늘날 유럽에서 우리가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피해야 한다. 나는 지금 얘기한 것은 중소기업 보호도 경제적 견지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이고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 보장도 물론 사회적 의미도 크고 인간적 의미도 인권적 의미도 크지만, 경제적 의미에서도 절대 필요하다. 하는 얘기를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김대중은 노동자의 권리보장과 생활향상을 인권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저곡가·저임금 등 농민과 노동자의 희생에 바탕을 두고 가격경쟁력을 확보해 수출 확대를 도모하는 경제발전전략은 장기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 김대중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김대중은 민주적 시장경제론에 근거한 대중참여경제론이 경제성장을 이룸과 동시에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수 있는 경제발전 구상임을 강조했다.
미국에서 대중참여경제론을 출간한 목적은 무엇인가
김대중은 2차 미국 망명 기간 중인 1983년 9월부터 1984년 6월까지 하버드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에서 초청연구원 자격으로 연구를 진행했다. 이때 자신의 경제정책구상인 대중경제론을 논문으로 제출해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이 논문이 1985년 미국에서 'Mass-Participatory Economy'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될 수 있었다.
그러면 당시 김대중이 논문 주제로 이 주제를 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김대중이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은 좀 의외였다. 당시 김대중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주인권지도자로서 미국에서도 많이 알려졌었고 신망이 높았다. 그리고 제3세계의 인권과 민주화는 미국에서도 관심을 갖는 주제였고 김대중도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김대중의 3단계통일론과 동북아평화구상은 미국의 대외정책, 대아시아정책과 관련해서 많은 정책적 함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이 역시 좋은 주제가 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대중참여경제를 주제로 삼았다. 왜 그랬을까? 김대중은 이 책의 서문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한국의 경제 발전 성과를 선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서방의 관측자들에게는 현 정책에 반대하는 '대안'을 제기한다는 것이 불필요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오해가 바로 이 책을 필요로 하는 이유이다.
(중략) 같은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제반 문제를 이해하고 이를 곧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보다 더 심한 불안정 속에 빠질 것이고 미국은 거대한 경제적 동반자를 잃을 뿐만 아니라 가장 믿을 수 있는 우방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 책을 통해 한국 민중에게 도움이 되고 장기적으로는 미국에게도 도움이 될 경제 발전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냉전 시기 미국은 한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전폭적인 지원을 했다. 그 이유는 공산주의 세력의 확장을 막고 소련과의 체제 경쟁에서 우위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한국의 독재정권은 인권과 민주주의 분야에서 큰 한계가 있었지만 경제성장에서는 성과를 내고 있었다. 당시 미국은 후자에 초점을 맞춰서 한국의 경제 발전을 미국 대외정책의 성공 사례로 내세웠다.
이에 대해 김대중은 미국이 피상적 관찰에 근거해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대중은 미국에게 한국의 현 경제상황이 화려한 외향과 달리 내부 모순이 심각하다는 사실을 알리려고 했다. 그래서 한국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도 한국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여 독재정권을 지지하는 미국의 대한정책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설득하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민주적 시장경제론에 근거한 대안적인 경제발전구상이 있음을 보여줘서 한국의 민주세력에 대한 미국의 신뢰를 높이려고 했다. 이는 한국의 민주세력을 용공세력이라고 선전하는 독재정권의 의도를 무력화시키려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결국 김대중은 한국 민주화를 위한 국제연대의 폭을 넓히기 위한 목적에서 대중참여경제 논문을 하버드대학교에 제출한 것이다.
투쟁하면서도 정책연구에 매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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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중의 단호한 3단계 통일론 "이것 외엔 길이 없습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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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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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공개된 영상자료에는 3단계 통일론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이와 함께 해방정국 당시 이승만 노선과 김구 노선에 대해 평가하는 부분도 포함돼 있다. 김대중은 한국의 민주회복과 남북한의 평화통일이 자신의 정치적 목표임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하나의 꿈이 어떻게 하면 남한의 민주정부를 수립해 가지고 남한 사천만에게 자유와 정의와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된 사회를 이룩하느냐, 그리고 이것을 토대로 해서 이북과 대화해서 공존하는 통일 방향의 길을 열어가느냐, 그래 가지고 우리 자손들에게 전쟁의 위협도 없고 분단의 슬픔도 없는 그리고 장래 문제는 자기들의 말하자면 남북 양쪽의 민족적 화해와 의견 교환에 의해서 민족적 지혜를 가지고 해결해 나갈 길을 열어주느냐, 이것이 내 소원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통일을 추진하는 데에 있어서 이성과 감성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의 조화를 강조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언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통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정말 뜨거운 정열과 더불어 얼음 같은 이성 가지고 이걸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절대로 이 문제는 낭만주의적인 민족적인 그런 어떤 감상만 가지고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또 그런 통일에 대한 열망 없이 이해타산만 갖고 또 이건 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여기서 보듯 이 인터뷰 자료을 통해서 김대중이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할 때에도 정책연구를 중시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김대중이 유능한 정치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어 국정 주요 분야에서 역사적인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배경이다.
* 전체 동영상 자료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유튜브 채널(클릭)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playlist?list=PLM3KYQ3ld15EsrA86RgFIyJuvJUFxDgfQ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과 중국>(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이며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