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수업 날. 입추 지난 지가 한참됐는데 마지막 더위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한낮이면 숨이 턱턱 막힌다는 말을 몸으로 실감한다. 이 땅에서 에어컨 없이 여름을 견디는 건 무리다. 도대체 살 수가 없다.
오후 2시. 약속한 시간에 요시다 선생 집에 도착했다. 기역자 현관을 거쳐 거실에 들어왔는데 의외로 시원한 느낌이다. 그녀 집은 전통 가옥이라서 단열이 안 되는 구조다. 더구나 이곳은 전통가옥 보존지구로 지정돼 집을 손대지 못하고 산다. 그럼에도 놀랍다. 거실이 냉방기를 켠 것처럼 쾌적하게 느껴진다. 나무 그늘의 단열효과다.
내추럴한 잡목 정원은 그녀의 디자인 스타일이다. 그래서 정원 안쪽을 그대로 둔 것이다. 골목 옆 마키나무와 생울타리 바깥쪽은 손질했다. 울타리는 내 것이지만 골목길과 연접한 바깥은 공공영역이다.
이 사람들은 자기 울타리라도 안쪽은 내맘대로 할 수 있지만 바깥은 공공영역으로 생각하는 게 기본이다. 항상 말끔하게 잘라야 하는 곳, 내 스타일을 고집할 수 없는 공간이다. 안쪽으로 묵은 매화나무 두 그루에 가운데 단풍이 들어서 있다. 자르지 않았으니 하늘이 빽빽하다.
언젠가 처음 사부네 둥근달을 손질하고 와서 였던가. 그녀의 정원을 보면서 내가 불쑥 한 마디 했었다. 디자이너 집 정원이 전혀 디자인 되지 않았네요. 그녀는 쑥스러운 듯 게을러서라고 대답했었다. 천방지축 기고만장한 초짜 정원사의 생각없는 한마디가 속으로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녀 집은 남향집이다 오후 2시면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실내는 더위 상승효과로 찜통을 경험해야 하는데 시원하게 수업을 했다. 옛사람들이 얼마나 지혜로웠는지 생생하게 절감한 시간이었다. 정원에 왜 나무를 심는지 몸으로 깨닫게 됐다.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
요즘 사람들은 나무를 잘라내고 냉방기를 켜고 산다. 도시는 땅이 좁으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됐다고 치자. 시골조차도 그게 문명 생활의 상징인양 따라하는 집이 늘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시계 소리만 들리는 거실에서 앉은뱅이 책상을 사이에 두고 두 번째 수업이 시작됐다. 책상 위에는 수업 자료인 에부치씨의 평면도가 펼쳐져 있다. 그녀는 나를 위해 에부치씨에게 부탁해 자료 활용 허락까지 받아냈다. 훌륭한 선생님이다. 항상 감사하며 배우고 있다. 수업은 대개 복습부터 시작한다. 공부는 반복인 거다.
어느 정원이든 디자인의 골격은 거기에 사는 사람들 눈높이가 기준입니다. 정원을 만들어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의뢰인 입장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데서 출발하죠. 그게 디자인의 첫 번째 과정 히어링(Hearing, 고객 요구사항 청취)이에요.
건물과 부지의 관계를 나타낸 도면을 배치도라 합니다. 거기에 의뢰인의 요구사항과 현장에서 본 것들을 면밀하게 기록하는 거죠. 가족 구성원이 어떻게 되는지, 개를 키우고 있는지, 의뢰인이 정원에서 뭘하고 싶은지, 바베큐를 하고 싶다면 어디가 좋은지 관찰하며 히어링 노트를 채워 나가는 거죠.
히어링은 디자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핵심이죠. 모든 게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의뢰인의 희망이 디자이너의 존재 이유라면 디자인의 최종 목표는 고객이 행복할 때까지가 되는 거죠. 현황 조사를 마치면 디자인 절반이 끝나요. 그만큼 중요해요.
다음은 배치도에서 사람들의 동선을 고려합니다. 주차장은 어디에 둘 것인지, 차에서 내려 정문에서 현관까지 이동은 어떻게 되는지, 구체적인 움직임을 상상하면서 구역을 나눠 놓습니다. 그게 정원의 조닝(Zoning, 땅가름)이죠.
조닝이 끝나면 이번에는 어디를 감추고 어디를 드러낼 것인지 결정해야 돼요. 나무의 역할이 필요한 곳을 결정하는 단계죠. 시선이 신경 쓰이는 곳은 나무로 감춰 줘야죠. 특히 현관과 화장실, 욕실은 반드시 메카쿠시(가림나무)를 염두에 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옆집 이층에서 시선을 차단하고 싶다면 겨울에도 푸른 잎이 달려 있어야 하니까 상록수를 심는 게 좋겠죠. 상록수라면 무슨 나무를 심는 게 좋을까? 여기는 햇볕이 좋은 곳이니까 양수를 심자.
또 한 가지 결정해야 하는 것이 크기죠. 좁은 공간에 한없이 크는 나무를 심으면 관리가 어렵습니다. 몇 년 후 크기를 고려에 넣는 거죠. 전정을 해도 괜찮은 나무, 강전정을 하면 죽는 나무도 있으니까. 그런 고려를 하다보면 이곳에 어떤 종류의 나무를 심을지 자연스럽게 좁혀지죠.
이번에는 이 공간을 어떻게 마무리하는 게 좋은가 생각해야 합니다. 공간 디자인이 되겠네요. 시선을 끌어줘야 하는 메인트리도 결정하고. 거기까지 생각하면 어떤 장소에 어떤 나무가 어울릴 것인지 더 좁혀지요. 이제 거의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에요.
현관을 들어갈 때 어떤 분위기로 할 것인가. 어울리는 나무를 고려하다보면 종류가 좁혀지죠. 예를 들어 평면도에 나와있는 대로 야마보오시(산딸나무)대신 소나무를 넣어보면 많이 달라보이겠지만 나무 종류가 변한다해도 추구하는 기본 분위기가 변하면 안 되겠죠.
일본의 조원 회사들은 개인이 많아 디자이너들에게 의뢰하지 않는 경우가 굉장히 많죠. 대개 자기들이 내용을 정하고 공사까지 합니다. 정원 디자이너가 활약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에요. 조원 회사가 시공하는 경우는 자기 묘목밭에 나무들이 있니까 거기서 골라 심으면 되죠. 나는 내가 직접 공사를 하지 않으니까 어울리는 나무를 보러 다녀야 돼요.
(조원 회사들이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은데? 어울리는 나무를 폭넓게 찾아봐야 할텐데 자기 나무를 심는다는 건...) 그렇게 허술하게 결정하지는 않아요. 고객들이 만만하지 않죠. 지금은 책도 있고 기본적인 정보는 다들 알고 있어요. 몇 십년 전부터 NHK에서 취미의 원예라는 것을 방송도 하고 있고. 의뢰인 수준이 장난이 아닙니다. 조원 회사 마음대로 자기나무를 뚝딱 결정할 수는 없어요.
특히 가드닝 계는 여자들이 주류거든요. 가정에서 정원을 만들 경우는 사모님 주도로 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이 세심해지는 거죠. (가드닝과 정원만들기는 어떻게 구분해서 써요?) 현장에서는 별로 구분하지 않아요. 예를 들면 화려한 꽃을 심고 아기자기 가꾸는 게 가드닝이라는 뉘앙스를 풍기기는 하는데 원래는 같은 말이거든요.
가드닝이라는 말이 일본에서 통용되기 시작한게 얼마 안됐어요. 십년 전쯤 되려나. 잉글리시 가든이 처음 계기였다고 생각되는데. 홋카이도에 유명한 잉글리시 가든이란게 만들어졌어요. 거기에 숙근초를 심어서 키우기도 하고 그랬죠. 그후 가드닝이라는 말이 일반적으로 쓰이기 시작했을 겁니다.
지금도 정원공사 현장에서는 가드닝이라는 말은 잘 쓰지 않거든요. 니와즈쿠리(정원만들기)라면 폭넓게 가드닝까지 포함하는 거니까 특별히 가드닝을 구분할 필요가 없죠. 가드닝이라는 단어는 양식정원에서 귀여운 꽃을 키운다든지 그런 의미가 강하긴 하죠.
어울리는 나무를 고르는데 공사비가 중요한 조건이죠. 예산이 얼마인가 가이드가 없으면 안 되니까. 여기는 가림나무가 필요하다든지 각 장소에 필요한 나무들을 결정할 때 예산에 맞춰 구체적 종류를 결정해 나갑니다.
나는 공사하기 전에 묘목밭에 먼저 가봐요. 시공회사에서 거래하는 묘목밭이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거기에 가서 실제로 보고 골라서 결정하는 경우가 많죠. 의뢰인과 함께 갈 수 있으면 더 좋고요. 다들 바쁘니 대개 '그냥 맡길게요' 하는 경우도 많죠. 공사를 맡은 사람과 함께 가서 나무를 결정하는 경우도 있고요.
우리가 지금 공부하는 평면도는 공사가 완료한 시점에 만든 사후평면도예요. 나무종류라든가 그런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공사 후에 작성한 자료죠. 설계 전에 작성한 사전 평면도와는 달라요. 배치가 좀 달라졌을 수도 있고.
디자인 단계에서 평면도 위에 대충 위치는 정하지만 심을 때 여러가지 상황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예를 들면 나무들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든지 밸런스가 안 맞는다든지. 그건 현장 분위기를 보면서 결정하는 경우가 많죠. 사전평면도든 사후평면도든 도면이 중요하진 않아요. 중요한 것은 항상 현장이니까.
나무도 사람처럼 생긴 모습들이 각각 달라요. 같은 야마보오시(산딸나무)라 해도 수형이 제 각각이거든요. 위로 곧게 자라 단정한 것도 있고 옆으로 퍼진 것도 있고. 한줄기로 자란 나무가 있는가 하면 가부다치(다간)으로 자라난 것도 있으니까. 그중 어떤 나무를 선택하느냐하는 것은 현장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거죠.
(도면을 보면 어느 곳에 어떤 나무를 심는다는 게 정해져 있잖아요) 정해져 있긴 하지만 현장 상황이 훨씬 더 중요하죠. 예를 들어 네지메라고 큰나무 아래 작은 나무를 곁들이는 건 도면에 대충 정해놓긴 하지만 현장에서 감각으로 진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죠. 도면은 참고용 정도로 생각하시면 돼요. 항상 중요한 건 현장 상황이니까. 도면은 리허설이에요. 현장이 본방이죠.
- 2편으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내 블로그 일본정원 이야기(https://blog.naver.com/lazybee1)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