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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뭉술한 계획이었을지언정 몇 해 전부터 마음은 먹고 있었다. 예산만 뒷받침되면 '현대사 속 여성'을 주제로 달력을 만들어 보는 것도 의미 있겠다고 생각했다. 2018년부터 아이들이 낯설어하는 현대사 사건과 인물 등을 주제 삼아 수업 보조 교재로 쓸 요량으로 탁상 달력을 제작해 왔다.

교육 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코로나 시기엔 비대면 수업 지원을 위한 예산의 도움을 받았다. 한번은 학교의 예산 지원을 한 푼도 받을 수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독지가가 나타나 선뜻 제작 비용 일체를 대주었다. 감사하게도 올해엔 학교에서 역사 달력 제작을 위한 예산을 별도로 책정해 놓았다.

올 초 세운 교내 자율활동의 목표가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 깨기'였으니, '현대사 속 여성'은 맞춤한 주제이기도 했다. 얼마 전 쓴 글에서도 밝혔듯, 아이들과 함께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소감을 나누고 토론도 벌여보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편견의 완고함만 깨달았을 뿐이다. 어렵사리 전문가를 초청해 대중 강연도 열었으나, 아니함만 못한 결과를 낳았다.

10대 남자아이들의 페미니즘에 대한 혐오는 상상을 초월한다. 페미니즘 공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아이조차 부지불식간에 혐오 발언이 튀어나올 정도다. 몇몇 아이들이 자극적인 유튜브에 길들어진 탓이라며 짐짓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반 페미니즘'이 요즘 10대 남자아이들의 공통적인 정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아이들도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의 신장을 주장하는 사조라는 페미니즘의 사전적 의미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그 의미와 취지가 왜곡되는 경우도 있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아이들 사이에서 페미니스트임을 자인하는 건 나름의 각오가 필요한 일이 됐다.

아이들의 강고한 편견을 바루기 위한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세상의 절반이 여성일진대, 장구한 역사에서 여성들의 업적을 찾아 그 의미를 재평가해보는 작업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하늘의 절반은 여성이 떠받치고 있다'는 마오쩌둥의 일갈을 역사적 사실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면, 페미니즘을 향한 날 선 반응도 조금은 누그러지리라 기대했다.

온전히 아이들의 손에 맡긴 달력 
 
오롯이 여성 인물의 이름과 업적만 담은 2024년 역사 달력이 완성됐다. 달력 맨 뒤에 제작한 다섯 명 아이들의 이름과 메일주소를 실었다.
 오롯이 여성 인물의 이름과 업적만 담은 2024년 역사 달력이 완성됐다. 달력 맨 뒤에 제작한 다섯 명 아이들의 이름과 메일주소를 실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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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즈음으로 한정했다. 전근대사의 경우, 참고할 만한 자료도 많지 않을뿐더러 오랜 봉건적인 인습 속에 여성은 이름조차 찾기 힘든 게 현실이다. 우리 역사 중 아이들이 가장 관심이 많고 뿌듯해하는 영역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사인 점도 두루 고려했다.

당장 달력의 제목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독립운동사도 절반은 여성의 몫'이라고 뽑았다. 앞서 언급한 마오쩌둥의 말을 차용한 것이다. 달력엔 오롯이 여성의 이름과 사진, 업적만 기록하기로 했다. 몇 사람이나 찾아내 싣게 될진 몰라도, 업적과 나이 고하를 막론하고 여성을 주인공 삼았다.

달력 만들기에 몇몇 아이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들 중엔 '역사 덕후'도 있고, 웹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는 아이도 있었다. 속독 능력과 글재주가 있어 여러 자료를 대조하고 정리하는 데 특출난 아이까지 합세했다. 재능이 제각각이라 그들끼리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나의 역할은 프로젝트의 취지를 설명하는 게 전부였다. 기초 자료 조사부터 편집, 디자인, 교열에 이르기까지 온전히 아이들의 손에 맡기기로 했다. 인물의 업적을 한 줄로 요약한 문장을 감수하는 것과 작업이 마무리된 후 원본 파일을 인쇄소에 넘기는 일 외엔 내가 한 일은 없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아이들을 도우려야 도울 수도 없었다. 컴퓨터 다루는 것도 잘 못하는 데다 여성 독립운동가에 대한 지식 역시 그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서다. 하긴 교과서에 수록된 여성 독립운동가의 수가 얼마 안 돼 기억하고 말고 할 게 없다. 교과서에만 의존한다면 한 달에 두세 명 소개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소수다.

교과서에 등장하는 역사 인물 중 여성은 남성과 비율로 견주는 게 무의미하다. 일일이 헤아려 보진 않았지만, 백 명에 두세 명꼴이 될까 말까다. 그조차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되기보다 여성 독립운동가나 여성 노동자, 신여성 등 집단으로 뭉뚱그려 호명되는 게 보통이다. 역사 교과서 속 여성은 제 이름을 잃은 채 기껏해야 남성의 보조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의기투합하자마자 아이들은 교과서를 이 잡듯이 뒤졌다. 이어서 인터넷 등에 탑재된 독립유공자 명단을 검색해 인물을 뽑아냈다. 포털의 인물 백과사전 등을 활용해 교차 검증했고, 열거된 공적 중 서로 부합하지 않는 내용을 걸러냈다. 그렇게 며칠간 마른빨래 쥐어짜듯 선정한 인물이 총 60명이었다.
 
달력 뒷면에도 가급적 여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 실었다. 여성 독립운동가 중에 사회주의 계열이 많아 놀랐다는 아이도 있었다.
 달력 뒷면에도 가급적 여성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 실었다. 여성 독립운동가 중에 사회주의 계열이 많아 놀랐다는 아이도 있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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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인물 별로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한 줄로 요약해냈다. 한눈에 들어오려면 짧고 강렬한 문장이 좋다. 너무 많은 내용을 담으려 했다간, 그러잖아도 여백이 부족한 달력이 답답해 보일 수 있다. 아무리 수업 보조 교재라고는 하지만, 달력이 지닌 고유의 기능도 무시할 순 없어서다.

이게 끝이 아니다. 인물을 특정 기간에 쏠리지 않도록 월별로 배치하는 일이 남았다. 그러자면 해당 월이 인물과 직접적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우선 생몰년 월일을 조사하고, 관련된 사건이 벌어진 날까지도 꼼꼼하게 확인해야 한다. 기실 해당 월일이 그들의 이름과 업적을 기억하는 '기념일'이 되도록 하는 게 굳이 달력의 형식을 빌린 가장 중요한 이유다.

아이들끼리 보름 남짓 땀을 흘린 결과 달력이 완성됐다. 제작 과정에서 어려웠던 점을 물으니, 불과 한 세기 전 인물인데도 자료가 태부족했다는 걸 첫손에 꼽았다. 생몰년 월일을 알 수 없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 명색이 독립운동가인데도 사진 한 장 구할 수 없는 인물도 있었다며 혀를 내둘렀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 아닐까요?"

역사 기록에 여성의 비율이 턱없이 낮고, 그마저 자료가 누락되거나 부정확한 이유를 아이들은 이렇게 단언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버젓하던 봉건 시대에 여성이 이름을 남기기란 쉽지 않았을 거라는 해석을 덧붙였다. 한 아이는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이 저평가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십분 고려한 역사 서술의 융통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달력을 만들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도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여성이 숱하다며, 이를 우리 사회에 온존한 성차별로 치환하기 시작했다. 업적을 요약한 문장에도 '여성'을 써넣어야 자연스럽게 읽힌다며, 각자 내면화한 남성 중심적 시각을 은연중에 고백하기도 했다. 누구의 아내, 딸, 며느리라는 소개조차 거북하게 느껴질 수 있겠다는 이야기까지 오갔다.

아내, 딸, 며느리가 아닌... '독립운동가'
 
현대사 속 여성 인물 중에는 생몰년월일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고,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는 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그냥 비워두는 게 좋겠다고 했다.
 현대사 속 여성 인물 중에는 생몰년월일을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고, 그 흔한 사진 한 장 없는 이도 있었다. 아이들은 그냥 비워두는 게 좋겠다고 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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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은 여성 독립운동사를 개괄한 교재이면서, 페미니즘 입문서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일제강점기 그들의 파란만장했던 생애를 읽어가다 보면, 그들의 당찬 포부가 여느 남성 독립운동가의 그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이구동성 '여성'이 아닌 '독립운동가'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고 강조한 이유다.

달력은 고1 아이들 300명 모두에게 한 부씩 배부됐다. 교실과 공부방 책상이나 거실의 식탁 위에 놓여 일상 속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성 독립운동가들의 이름과 업적이 아이들에게 익숙해지는 만큼 우리 사회는 진보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달력을 나눠준 11월 17일은 1905년 을사늑약의 치욕을 기억하자는 뜻으로 지정된 '순국선열의 날'이다.

사족. 파일을 인쇄소에 넘긴 뒤에야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해방 직후 동아일보가 '조선의 잔다르크'에 비유했던 불세출의 여성 독립운동가 김명시를 빠트렸다. 그에 관한 평전까지 출간됐는데도 까맣게 몰랐던 나의 불찰이다. 조선독립동맹의 예하 부대였던 조선의용군 소속 여성 중에 유일하게 장군으로 불렸던 그의 빛나는 업적으로 여기에 대신 남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교육희망에도 중복게재합니다.


태그:#여성독립운동가, #역사달력, #페미니즘, #순국선열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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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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