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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현충원에는 세월호 참사 당시 희생되신 열 분의 선생님이 안장되어 계십니다. 또 승객들을 구하다 희생되신 세 분의 선원이 의사상자 묘역에 잠들어 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해역을 수색하고 복귀하던 도중 헬기 추락으로 사망한 다섯 분의 소방관이 계십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모아보았습니다.

세월호에는 갑판부 7명, 기관부 7명, 여객부 11명, 조리부 5명의 선원과 아르바이트 노동자가 승선해 있었습니다. 한국해양수산연구원이 발행한 <여객선> 교재에는 비상시 선원의 역할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승객들을 동요하지 않게 해야 하고, 사고 발생 사실과 구조 상황을 알려야 합니다. 대피하지 못한 승객이 있는지 수색해야 하고, 퇴선 준비가 끝난 후 승객들을 바다로 뛰어내리게 안내해야 합니다.

선장이 "총원 퇴선, 비상부서 배치"를 명령하면 각자 비상시 임무를 수행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참사 당시 대부분의 선원은 자신의 임무를 망각했습니다. 오히려 침몰하는 배 안에 승객들을 방치한 채 가장 먼저 배를 떠났습니다.

구명정을 준비해야 하는 기관부와 갑판부 선원들은 9시 39분 경 구명보트와 해경 123정을 타고 떠났습니다. 이준석 선장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몰하는 배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선원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한 사람은 양대홍 사무장과 여객부 직원 박지영, 정현선, 안현영 등 총 네 사람 뿐이었습니다. 대전 현충원 의사상자 묘역 51호에서 53호에 각각 양대홍, 박지영, 정현선 세 분이 안장되어 있습니다.
  
의사자 양대홍의 묘 (대전현충원 의사상자묘역 51호)
 의사자 양대홍의 묘 (대전현충원 의사상자묘역 51호)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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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장 양대홍은 끝까지 비겁하지 않았다

양대홍 사무장을 아는 지인들은 그를 책임감이 강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기억했습니다. "책임감이 강해서 일처리를 잘했고, 항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품"이었다고 전했는데요. 참사가 발생한 당시에도 그는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지 않았습니다.

선체가 90도까지 기울었던 상황에서도 그는 끝까지 학생들의 탈출을 도왔습니다. 3층 식당칸에서 오도 가도 못하던 아르바이트 노동자 송아무개씨는 양 사무장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조리 담당 직원 김아무개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양대홍 사무장은 다른 사람들의 구조에 힘쓰다 탈출할 기회를 놓쳤습니다. 참사가 발생한 지 한 달 후인 5월 15일에 그의 주검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는 침몰하는 배 안에서 아내와 통화를 나누었는데요. "수협 통장에 돈이 좀 있으니 큰아들 학비 내라.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한다"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침몰하는 배로 들어갔습니다.

유족들은 평소 고인의 뜻에 따라 부의금도 사양하며 장례를 간소하게 치렀는데요. 그의 의로운 죽음을 기억하기 위해 빈소 위에는 '사무장 양대홍은 끝까지 비겁하지 않았다'는 문구를 현수막에 써서 붙였습니다.
  
의사자 박지영의 묘 (대전현충원 의사상자묘역 52호)
 의사자 박지영의 묘 (대전현충원 의사상자묘역 52호)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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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

박지영씨는 2012년 수원과학대학교 산업경영학과에 입학했다가 가정형편이 어려워진 탓에 바로 휴학해야 했습니다. 학업을 잠깐 멈춘 채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했는데요.

사촌 오빠가 소개해 준 일자리가 바로 세월호의 선원 자리였습니다. 박지영씨는 매점에 근무하며 승객들을 안내했는데요. 하루 13시간 이상 근무하는 고된 일정에도 힘든 내색 한번 하지 않는 명랑하고 밝은 성격이었습니다.

세월호가 침몰하던 당시 지영씨는 학생들이 입을 구명조끼를 모으기 위해 선실 곳곳을 뛰어다녔습니다. 그렇게 구명조끼를 모아 학생들에게 차례로 입혔고요. 공포에 질린 학생들에게 "안심해, 우리 모두 구조될 거야"라 말하며 학생들을 토닥였습니다.

배는 점차 기울어서 이윽고 바닥과 천장이 위치가 바뀌고 마는데요. 열린 출입문들은 거대한 낭떠러지가 되어 승객들의 탈출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지영씨는 출입문을 열쇠로 잠그고 승객들의 탈출을 도왔는데요. 이때 이 '생명의 다리'로 탈출한 사람만 50명이 넘었습니다. 전체 생존자의 1/3가량 되는 숫자입니다.

배에 물이 차오르던 급박한 상황에서도 박지영씨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무릎, 가슴, 목까지 물이 들어찼고, 침몰 직전의 상황에 지영씨는 학생들에게 "빨리 바다에 뛰어들어"라 외쳤습니다. 학생들은 죽을 힘을 다해 헤엄쳐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생존 학생들은 "승무원 누나가 나보고 빨리 위로 올라가라고 다그쳤다"고 이야기했고, "배가 기울자 그 승무원이 '높은 데로 올라가셔야 한다'며 승객들의 대피를 도왔고, 물이 차오르자 승객을 문 밖으로 빠져나가도록 도왔다"고 증언했습니다.

한 학생이 "언니도 어서 나가야죠"라고 하자, 박지영씨는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라고 답합니다. 이것이 지영씨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유언이 되었습니다.
  
의사자 정현선의 묘 (대전현충원 의사상자묘역 53호)
 의사자 정현선의 묘 (대전현충원 의사상자묘역 53호)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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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배로 다시 들어가다

정현선씨는 배에서 일한 경력이 10년이 되는 베테랑이었습니다. 게다가 스킨스쿠버 다이빙에도 능했기 때문에 충분히 배에서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승객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침몰하는 배로 들어갔고, 결국 살아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정현선씨는 같은 배에서 불꽃놀이 아르바이트를 하던 김기웅씨와 동갑내기 연인사이였는데요. 4년 동안 사랑을 이어온 두 사람은 그해 가을 결혼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김기웅씨는 배가 기울자 잠을 자고 있던 동료들을 깨워 탈출했고요.

동료들과 나오던 도중 여자친구 현선씨가 선내에 있는 것을 알고 다시 배로 들어갔습니다. 그 역시 침몰하는 배에서 승객들의 구조를 돕다 희생되었는데요. 기웅씨도 현선씨와 마찬가지로 훗날 의사자로 인정받게 됩니다.
  
세월호와 계약한 이벤트회사 대표였던 안현영씨는 사고 당시 배가 기울자 의자를 쌓아 디딤판을 만들어 승객 15명을 4층으로 빠져나오도록 돕고 부상당한 4~5명은 직접 이동시킨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본인은 배 안으로 밀려드는 바닷물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확인돼 현영씨도 훗날 의사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세월호 참사 수색 중 순직한 순직 소방관들의 묘
 세월호 참사 수색 중 순직한 순직 소방관들의 묘
ⓒ 임재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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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순간까지 소방관이었던 이들

순직소방관 묘역 110호에서 114호에는 소방관 다섯 분이 안장되어 계신데요. 순서대로 정성철 소방경, 박인돈 소방위, 안병국 소방장, 신영룡 소방교, 이은교 소방사입니다.

이들은 강원 소방본부 제1소방항공구조대 소속이었는데요. 강원소방본부는 2014년 4월 28일부터 인원을 파견하여 사고 해역 수색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7월 14일과 16일 해상 수색을 실시했는데요.

한 사람이라도 더 찾아내기 위해 모든 신경을 집중하며 바다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리고 17일에는 수색을 끝내고 강원도로 복귀하기로 결정합니다.

오전 10시 49분 헬기는 광주 비행장에서 이륙해 강릉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소방관들은 세월호에서 더 많은 사람을 찾아내지 못해 아쉬운 마음을 애써 뒤로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처럼 날씨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시야가 어두웠습니다. 헬기가 이륙한 지 4분이 지났을 무렵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헬기가 광주 시내에 추락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소방관들은 학교와 아파트를 피하기 위해 조종간에서 손을 뗄 수 없었습니다.

헬기는 추락과 동시에 불이 붙으며 폭발했고, 이들 5명 소방관은 그 자리에서 숨졌습니다. 헬기 추락 이후 블랙박스 분석이 이어졌고, 소방 조직 내 열악한 교대근무와 계기 비행 자격에 대한 관리 부재 등 문제가 발견되었습니다.

슬픔에 잠긴 국민들을 위로하기 위해 자기 한 몸 아끼지 않고 참사 현장에 뛰어든 소방관 분들은 그렇게 하늘의 별이 되어 대전 현충원에 고이 잠들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여러 사람에게 큰 상처와 흔적을 남겼습니다. 침몰하던 배를 버리고 도망친 선원이 있었는가 하면, 생판 모르는 남을 구하기 위해 참사 현장에 뛰어든 소방관들과 자기 한 몸 희생하여 여러 사람을 살린 인물들이 있습니다.

어떤 삶이 옳은 길인지 대전 현충원의 안장자들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태그:#대전현충원, #세월호참사, #의사상자, #순직소방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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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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