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원사 입문 6개월 5일째 되는 날이다. 몸무게가 3킬로그램이나 빠졌고 얼굴은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처럼 새까매졌다. 제법 정원사 티가 난다. 그동안 수많은 정원을 섭렵하면서 경험도 많이 쌓았다. 사부는 더 이상 구체적 작업지시를 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허리에 도구벨트만 있으면 정원에서 뭐든 할 수 있는 정도가 됐다. 명실공히 일본정원 새끼정원사가 된 거다.
하늘이 무겁게 내려앉은 날씨. 오늘 작업은 동네 관리계약 정원의 청소다. 작업이랄 것도 없다. 풀 뽑고 청소하고 바닥에 제초제를 뿌리고 나면 끝이다. 오전 중에 끝날 것이다. 손쉬운 작업 중에도 여전히 사부 눈치가 사납다. 건너오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짜증이 묻어난다. 내 입은 더욱 무거워졌다.
트집과 짜증만 내는 사부
사부의 정당한 가르침이라면 언제든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다. 나는 제자니까. 이건 아니다. 이렇게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한다. 내가 열다섯이라면 가능할까. 예순다섯살은 뭔가를 꿈꾸며 현실을 견디기에 비참해지는 나이다. 열다섯처럼 한번 견뎌볼까.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내일 귀국이니 오늘 거취를 결정해야 한다. 비상사태 후 며칠 동안 작업하며 생각이 많았다. 정원사 수업을 계속하려면 지금 어떤 문제가 있는지 원인을 분명히 하고 개선책이 나와야 한다. 그냥 이대로는 안 된다. 사부도 나도 어느 쪽도 도움이 안 되는 일상이다.
하루미씨 말대로 사부가 어제 오른쪽으로 가라고 했다가 오늘 왼쪽으로 가라면 그렇게 해야 하나? 지금 내게는 불가능한 주문이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렇게 해 오지 않았다. 나는 이미 사부와 합리적이고 좋은 관계에 익숙해있다.
문제의 원인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 무엇이 잘못 됐는지 드러내놓고 해결책을 논의해봐야 한다. 이대로 덮어두고 지나가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언제 헤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불안한 관계만 지속될 뿐이다.
비상사태가 언제든 다시 표면화될 불씨를 안고 있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사부가 쥐고 있는데 그럴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트집과 짜증만 점점 심해지고 있다. 내 귀를 의심할 정도다. 이 사람이 내가 여태 경험한 사부가 맞나 싶었다.
좋았던 옛날의 기억들이 새삼스럽다. 이해할 수 없는 사부 언행들에도 나는 말 한 마디 할 수 없는 입장이고. 완전히 외통수에 걸렸다. 나가라는 말은 직접 안 하지만 알아서 나가라는 의미다. 이 사람은 왜 가장 치사한 결별 방법을 택했을까.
내가 존중받지 못하는 관계라면 그것이 제도건 관습이건 계속할 이유가 없다. 정원 손질 작업은 지금까지 경험만으로 충분하다. 3킬로그램 감량의 과도한 노동강도는 얼마든 견딜 수 있지만 신경질적인 잔소리 속에서 느끼는 모멸감은 견디기 힘들다. 나는 이곳에 극기훈련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일본 정원 공부를 하러 온 거다.
비상사태 이후 시간들은 어쩌면 이별의 격식을 차리기 위한 조정 기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좋았던 사제 관계를 뒤돌아보며 아름답게 헤어지는 절차같은 거다. 인간사 헤어짐은 도처에 있는 것. 지금까지 인연에 감사하고 이별을 받아들이면 좋은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 현실은 다르다. 쌓았던 관계까지 파탄나고 배가 산으로 가고 있다. 이런 이별은 모양이 빠진다. 모든 이별에는 예의가 필요한 법이거늘.
다른 길을... 마음을 굳히다
사실은 달콤한 이별을 기대했었다. 옛날의 사부라면 적어도 이별의 예의는 지켜줬을 것이다. 모처럼 일본까지 정원공부하러 왔는데 나한테 노가다만 배워서 되겠느냐고. 6개월 정도면 현장 경험은 충분하니 범위를 넓혀 더 다양한 공부를 해보라고. 한번 제자는 평생 제자니까 공부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 다시 찾아오라고.
사실은 나도 요즘 같은 작업만 매일 반복되고 있어서 거취를 고민하던 중이었다고. 예상보다 빠른 졸업이지만 사부의 혜안에 감사드릴 뿐이라고... 아름답게 마무리되는 사제 정담을 적고 싶었다. 준비해 놓은 작별 인사말도 있었다. 사부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가르쳐주신 은혜 평생 잊지 않고 그 가르침에 누가 되지 않도록 앞으로 잘하며 살겠습니다... 마음이 아프다.
마무리가 좋으면 다 좋은 거다. 오늘 사부의 모습이 내가 당신을 평생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이 될텐데... 나는 아름다운 이별을 꿈꿨지만 그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같은 사부갑질 모드로 모든 게 물거품이 돼 버렸다. 나는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람은 어디서든 들고 남이 분명해야 한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이 아름다운 법이니.
회자정리. 누구나 만나면 헤어지는 거다. 이별은 만나면서 이미 정해져 있는 것. 인연에 감사하며 앞길을 축복해 줄 수 있는 마음이라면 누구나 좋은 이별이 되는 거다. 좀 더 넓고 깊게 정원 공부할 수 있는 다른 길을 찾아보자. 마음을 굳혔다.
왜 하루 아침에 사부가 변했는지 수많은 가능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 중의 한가지 가설에 이런 게 있다. 시키는 걸 척척 해내는 걸 보니(내 일에 대해 아무 말씀이 없으시니 드는 판단이다) 열정페이 기간은 다 된 것 같고 나를 정식 고용하려면 복잡한 문제들이 따른다. 아깝지만 버려야겠다(사정이 그렇다면 말하면 되잖아!). 70여 평생 동안 한 번도 제자를 들여 본 경험이 없으니 가능한 추론이다.
또 한 가지. 그동안 나를 경험해보니 호랑이 새끼라는 판단이 들어 일찌감치 몸을 피하는 것인지도... 키워 놓으면 사부 잡아먹을 놈이라는 생각이 든 거다. 근대 이전 600년의 사무라이 역사는 반란의 역사다. 권모술수가 난무했다. 먹고 먹히는 하극상의 역사가 아직도 핏줄 속에 흐르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가능한 추론이다.
이 사람들에게는 혼네(本心,본심)와 다테마에(建前,겉 표현)라는 의식구조가 있다.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지만 속은 다른 것을 감추고 있다. 피비린내나는 역사속에서 속을 함부로 드러내면 상대에게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만든 본심과 표현의 이중구조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 거다. 겉 다르고 속 다르다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혼네를 다테마에로 감추는 건 사회의 평온을 유지하기 위한 거란다. 속에 있는 대로 감정의 여과없이 표현해 버리면 서로 다툼이 생긴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모임에 싫은 사람이 새로 들어와서 거기를 안 나간다고 치자. 이럴 경우 바빠서 못 나간다고 말하는 게 완곡한 어법이고 엘레강스한 상황 정리다. '싫은 사람이 있어서'라고 직접 말하지 않는다. 이 상황이 혼네와 다테마에의 초근접 비유다.
우리도 보통 그러지 않나. 직접 '싫은 사람이 있어서'라고 표현하는 것을 삼간다. 충돌을 예방하자는 것이다. 혼네와 다테마에는 의사소통의 완충지대같은 거다. 이 사람들은 이렇게 표현하고 이해하는 게 일반적이다. 이런 식의 이심전심이 축적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나름 공존의 지혜이긴 하다.
건조하고 씁쓸한 이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이별이지만 사부에게 말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다. 헤어지는 마당에 밝히기 힘든 개인 사정은 피차 묻지 않는 게 매너다. 생각을 바꿔보면 세상일 마음 먹기에 달렸다. 지금 이 최악의 상황이 내게 다른 길이 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수없이 경험해 왔던 내 삶의 반전 드라마처럼. 포기하지 않는 한 내 손 안에는 아직 패가 남아 있는 거다.
피폐해지는 자존감으로 견디기 힘들었던 마지막 한 나절은 아프고 길었다. 인간관계의 바닥을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었다. 어떻게 견뎠는지 모른다. 신경질적인 사부의 잔소리가 극에 달할 무렵 작업이 끝났다. 도구 정리까지 깔끔하게 마치고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나는 그동안 여러가지로 감사했다고 인사했다.
지난 6개월의 감사를 담기에는 턱없이 짧은 인삿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사부는 언제 다시 올 것인지 내게 묻지 않았다. 헤어지는 마당에 의례적인 덕담 한 마디조차 없었다. 6개월 5일의 인연. 건조하고 씁쓸한 이별이었다.
덧붙이는 글 | 내 블로그 일본정원이야기(https://blog.naver.com/lazybee1)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