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울의봄> 대흥행으로 12.12군사반란과 그 전후 한국 현대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1979년 10.26과 12.12, 그리고 1980년 5.17과 5.18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는 격동의 시간이었으며 짧은 희망과 길고 깊은 좌절과 상처를 남긴 아픔의 시간이기도 했다. 이때의 역사는 지금도 많은 영향을 주고 있어서 이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그 교훈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공개한 김대중의 1979년 12월 12일 <뉴스위크> 동경지국 버나드 크리셔 기자와의 인터뷰 음성자료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김대중에 대한 가택연금도 함께 해제되었다. 그래서 이뤄진 크리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대중은 당시 정국현안에 대해서 자신의 입장을 밝혔는데 여기서 중요한 내용이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주장을 반박한 부분이다.
그러면 당시 정승화는 무슨 발언을 했으며 김대중은 여기에 어떻게 반박을 했나? 그리고 이것의 역사적 의미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이번에 공개한 음성자료와 정승화가 1987년에 낸 자신의 회고록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까치, 1987)의 내용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1979년 11월 말, 김대중에 대한 용공혐의가 있다고 밝힌 정승화
정승화의 회고록 136쪽에서부터 141쪽까지의 내용을 보면 계엄사령관 시절 정승화는 당시 정국 상황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판단하고 있다.
1) 10.26 이후의 국가안보와 관련해서 보면 일부 과격 세력들의 잘못된 행동이 사회의 안전을 흔들 수 있는데 용공세력들이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반국가적인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한다.
2) 김대중의 과거 행적을 보면 김대중은 용공혐의가 있으며 그가 전향했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에 김대중이 군통수권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우려한다.
정승화는 정보기관에서 생산한 김대중에 대한 보고서를 읽었다고 밝혔다. 이 보고서는 해방 이후 김대중의 활동 중에서 용공혐의가 있는 부분을 정리한 것인데 당시 주요 인사들에게 이 자료가 유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에 대한 왜곡된 정보에 기초한 것으로 김대중에 대한 편견이 시작되는 계기였다고 볼 수 있다.
정승화는 자신의 생각을 언론계 인사들에게도 알렸다. 그는 1979년 11월 26일에 언론사 사장, 다음날인 27일에는 언론사 편집국장 그리고 3일 뒤 30일에는 국방부 출입기자 등과 간담회를 갖고 자신의 입장을 언론계 인사들에게 밝혔다. 당시 정승화의 발언 내용은 언론에 보도가 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비보도를 전제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 내용은 '정보보고서' 형태로 언론계 내부, 정관계 등 주요 인사들에게 알려졌으며 외신들도 해당 정보를 입수했다. 당시 정승화의 위상을 고려할 때 그의 발언은 매우 무게있게 받아들여졌으며 1979년 12월 11일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김대중의 인터뷰 기사에도 이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크리셔 기자가 정승화의 발언을 비중있게 질문한 것도 그 이유다. 당시 정보보고서는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정승화가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 내용을 남겨놓았기 때문에 알 수 있게 되었다.
김대중, 정승화의 주장을 반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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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은 반드시 중립적이어야 합니다" [김대중의 1979년 발언]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이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가택연금 해제 직후인 1979년 12월 12일 <뉴스위크> 동경지국 버나드 크리셔 기자와의 인터뷰 음성자료를 공개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은 정국 현안에 대한 입장을 밝히며 자신에게 용공혐의가 있다고 한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주장을 반박합니다.
이 자료는 당시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정보에 의한 편견이 매우 심했고 이를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악용하여 정권찬탈의 구실로 삼았음을 알려주는 단서입니다. 이것의 반작용이 결국 민주화의 동력이 됐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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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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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셔 기자가 김대중에게 정승화의 발언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대응하려고 하냐고 질문하자 김대중은 이렇게 말했다.
"어쨌든 정 장군이 말한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저는 많은 증거와 증인을 가지고 있고 상황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 고향 목포에 있었을 때 정치적 라이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제가 공산주의 배경을 갖고 있다고 하면서 저에 대한 모욕적인 내용의 보고서를 당국에 제출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과 군사쿠데타 이후의 군사정권에서 여러 차례 저를 조사했지만 저에 대한 혐의는 사실이 아니라는 점이 밝혀졌습니다. 일본에 돌아가시면 제가 일본어로 쓴 책에 이에 관한 내용이 있으니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우익과 좌익이 모두 참여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에 얼마나 빨리 참여했는지를 설명하면서 해방 이후(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저의 과거 경력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저는 해방이 될 때 21살이었고 건준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선배들이 일하는 것을 도왔고 공산주의가 우리에게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좋지 않은 수 많은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많았어요."
이 내용은 지금은 많이 알려졌지만 당시에는 언론의 자유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고 정보가 유통될 수 있는 통로도 매우 적어서 일반인들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김대중은 기회가 닿는대로 설명하고 또 설명하고 했던 것이다. 그와 함께 군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버나드 크리셔: 현 정국에서 한국 군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김대중: 군이요, 군은 반드시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버나드 크리셔: 물론 군은 중립적이야하는데요, 다만 그들이 이미 당신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는 단서를 준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 김대중: 저는 우리 국민들이 저를 지지해준다면 군은 우리 국민들의 뜻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 버나드 크리셔: 하지만 정 장군은 이미 당신의 지시를 따를 수 없다는 뜻을 내비쳤거나 혹은 이러한 것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김대중 : 제가 믿기로는 정 장군의 발언은 잘못된 정보에서 나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만약 그가 진짜 정보, 진짜 사실을 안다면, 그는 저를 의심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그의 말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버나드 크리셔: 하지만 그는 세 번이나...
- 김대중: 네, 저도 알아요. 제가 말씀드렸듯이, 당신이 원한다면, 누군가가 구체적인 것에 대해 듣고 싶다면, 저는 모든 것을 설명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정승화는 전두환 신군부 세력과 달리 군의 정치적 중립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실제로 그는 정치적인 욕심을 드러낸 적이 없고 1979년 11월 언론계 인사들과의 간담회가 비보도를 전제로 해서 이뤄진 것을 보면 정승화는 군의 정치개입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에 대한 왜곡된 정보에 의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공음해를 쿠데타의 구실로 삼은 전두환
정승화는 회고록에서 자신의 주장에 대해 군의 주요 인사들이 동조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여기에는 당시 보안사령관인 전두환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승화는 1979년 11월 말 언론계 간담회 이후 12월 초에 이뤄진 것으로 보이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보고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김대중씨에 대한 나와 언론인과의 대담이 상당히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고 보고했다. 전 소장은 앞으로 김대중씨 세력이 나에게 어떤 모략을 해올지 모른다며, 보안사에 있는 김대중씨의 용공혐의 자료들을 각지구 보안사 파견대에 보내어 각급 주요지휘관들에게 알리도록 조치하겠다고 보고하였다. 나는 이를 허락하였다.(정승화회고록 141쪽)
이 내용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정치적인 야심을 갖고 있던 정치군인 전두환은 김대중에 대한 용공혐의를 자신의 쿠데타에 이용했기 때문이다. 12.12군사반란을 통해 사실상 군권을 차지한 전두환은 집권을 하기 위해서 1980년 5.17쿠데타를 일으켰다. 5.17로 인해서 서울의 봄은 끝났는데 이때 전두환 신군부가 내세운 명분은 국가안보를 위해서 '김대중을 중심으로 한 과격 용공세력들의 내란음모에 대한 대응'이었다.
이들은 재야세력으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던 김대중이 용공혐의가 있다고 사건을 조작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장하였다. 그리고 이를 자신들의 정권찬탈의 명분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이 김대중내란음모조작사건이고 김대중은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김대중은 1971년 대선을 통해서 한국의 민주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재야로부터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고 야당 내에서도 절반에 가까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가 유신 선포 이후 정당활동을 할 수가 없어서 야당 전체를 자기 세력권으로 넣지는 못했지만, 민주 세력 전체로 보면 김대중은 가장 많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지지세를 갖고 있던 김대중이 왜곡된 정보에 의해서 용공세력으로 몰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심한 반발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 시장경제, 한반도평화통일 등 우리 사회가 보편적으로 지향하는 가치를 위해 노력한 정치가와 그 지지세력을 용공세력으로 음해하고 탄압하는 것에 대한 반발은 당연히 컸다. 이것이 1980년 이후 한국 민주발전의 동력이 된 것이다.
결국 이 자료는 김대중에 대한 왜곡된 정보에 의한 편견이 매우 심했고 이를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악용하여 정권찬탈의 구실이 되었음을 알려주는 단서가 된다. 그리고 이것의 반작용이 결국 민주화의 동력이 되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사회학 박사이며 김대중 연구자입니다. <김대중과 중국>(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 <김대중 1차망명과 반유신민주화운동>(연세대학교 출판문화원, 2023)의 공저자이며 김대중 재평가를 위한 김대중연구서 <성공한 대통령 김대중과 현대사>(시대의창, 2021)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