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시로에서 저는 더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열차는 특급 오오조라 호. 구시로에서 삿포로까지 홋카이도를 횡단하는 노선입니다. 하지만 저는 삿포로까지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내린 역은 신유바리 역입니다.
'유바리(夕張)'라는 지명은 그리 유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유바리에서 생산되는 '유바리 멜론'이 일본의 대표적인 멜론 브랜드로 알려져 있죠. 하지만 일본에서 유바리는 멜론 외에도 유명한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유바리 시가 2007년 파산을 선언한 지방자치단체였기 때문이죠.
홋카이도 개척 초기만 해도 유바리 시는 번화한 도시였습니다. 1888년 유바리에서 석탄이 발견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석탄 채굴이 시작되며 유바리는 광산 도시로 번성했습니다.
전성기였던 1960년대에는 인구가 10만을 넘었을 정도였습니다. 유바리에 탄광만 24개가 있었습니다. 미쓰비시를 비롯한 유수의 광업 회사가 유바리에 자리를 잡고 있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광산업은 사양 산업이 되었습니다. 한때 일본의 산업화를 지탱했던 석탄은 산업 구조의 변화와 함께 채산성을 잃어갔죠. 그나마 있는 석탄 수요는 값싼 수입산 석탄이 차지했습니다.
유바리 시의 탄광은 하나둘 폐광했습니다. 특히 1981년, 유바리 신탄광에서 화재 사고가 발생한 것은 심각한 타격을 안겼죠. 사고로 93명이 사망했고, 호쿠탄 탄광을 운영하던 회사는 파산했습니다.
1985년에도 미쓰비시 소유의 탄광에서 폭발 사고로 62명이 사망했습니다. 결국 1989년 미나미오오 유바리 탄광이 폐광하면서, 유바리에는 탄광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됐습니다.
유바리 시는 '탄광에서 관광으로'라는 구호 아래 주력 사업을 관광업으로 전환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인구의 유출은 막을 수 없었죠. 탄광 운영 회사들이 도산하면서 미납한 세금은 그대로 유바리 시의 재정 부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 유바리 시의 파산은 필연이었습니다. 인구는 10분의 1로 줄었습니다. 홋카이도와 중앙정부의 허가 없이 편법으로 빚을 내면서까지 버틴 재정은 결국 2006년 바닥을 보였습니다.
유바리 시의 몰락은 광산업의 몰락이 가져온 결과였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꼭 유바리 시만의 일이었을 리는 없겠죠. 광산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도시는 모두 비슷한 일을 겪었을 것입니다.
홋카이도에서도 아카비라 시, 유베쓰 정, 우타이나이 시 등이 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광산 사고의 빈발, 채산성의 감소 등으로 광산 회사는 도산하고 노동자는 떠나갔죠. 5만여 명에 달했던 우타이나이 시의 인구도 40여 년 만에 10분의 1로 줄었습니다.
광업 도시만의 일도 아니었습니다. 농업과 어업, 축산업에서도 마찬가지였죠. 농업 시장이 해외에 개반되면서 농민들의 피해는 컸습니다. 도심에서 떨어진 어촌의 경우 인구 감소 문제가 심각하죠.
일본 정부 통계를 보면, 홋카이도의 인구는 1995년 이후 계속해서 감소 중입니다. 인구 500만여 명 가운데 200만 명 가까이가 삿포로에 거주합니다. 홋카이도의 지자체 가운데 80% 이상이 급격한 인구 감소를 겪고 있습니다.
1997년 벌어진 홋카이도 척식은행의 파산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홋카이도 척식은행은 1900년에 설립된 홋카이도 최대의 은행이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지자체나 홋카이도 기반 기업과 거래하고 있던 은행이었죠.
물론 1차적인 원인은 홋카이도 척식은행의 무리한 사업 확장이었지만, 1차산업 위주였던 홋카이도 경제의 기초체력이 결국 파산의 근본적인 원인이었습니다.
홋카이도 척식은행의 파산과 함께 홋카이도 기반 기업의 도산이 이어졌죠. 하지만 홋카이도 경제의 구조는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이 홋카이도에서 멈출 수 있을까요? 일본의 경제력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어쨌든 일본은 전 세계 최고의 고령 국가입니다. 인구도 감소하고 있죠.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한다면, 일본 내의 수많은 지자체가 같은 일을 겪게 될 것입니다. 유바리와 홋카이도의 현실은 일본의 미래가 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가오는 재앙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죠. 유바리 시는 광산업의 몰락 끝에 결국 파산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유바리 시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그 안에서 활로를 찾고자 했습니다.
유바리 시가 재정 위기에 빠지자, 도쿄 도에서는 유바리 시를 지원하기 위해 직원을 유바리 시에 파견했습니다. 그들 중 한 명이 스즈키 나오미치(鈴木直道)였죠.
스즈키 나오미치는 파견 직원 신분이었지만 유바리 시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원래 1년 예정이었던 파견은 2년 넘게 이어졌습니다. 그 사이 스즈키 나오미치는 유바리 시의 재건을 위해 다양한 사업과 구조조정을 실시했습니다.
2010년 3월, 파견 기간이 종료되며 그는 도쿄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유바리 시에는 여전히 많은 과제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듬해 유바리 시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 그리고, 만 30세의 나이로 전국 최연소 시장에 당선됩니다.
2015년 한 차례 연임까지 성공한 그는 정치적 역량을 키워 갔습니다. 2019년에는 홋카이도 도지사 선거에 나섰고, 당선되었죠. 이번에도 47개 도도부현 지사 중 최연소였습니다.
그간 유바리 시도, 홋카이도도 많은 일을 겪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성과도, 그 성과로 가릴 수 없는 그림자도 있을 것입니다. 유바리 시의 인구는 더욱 줄어들어 1만 명 선이 붕괴했습니다. 신유바리 역에서 유바리 역을 잇던 철도는 폐선되었고, 공공요금도 인상됐습니다.
그러니 한편으로 철도를 대체할 버스망은 확충됐습니다. 유바라 시의 고령화에 맞춰 간호와 보건 서비스를 개선했고, 인구 감소에 따라 지역 공공 서비스도 집약시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유바리 영화제를 비롯해 파산에 따라 중단된 문화사업도 재개했죠. 시립 도서관과 커뮤니티 시설도 확충됐습니다. 그 사이 채무는 140억 엔 줄었습니다.
홋카이도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홋카이도의 인구 감소도 막을 수 없었죠. 하지만 코로나19 시기, 중앙정부보다 유능한 감염병 대책으로 홋카이도의 행정 능력이 주목받기도 했죠.
신유바리 역에서는 삿포로 남부의 치토세 시까지는 한 량짜리 열차가 하루 세 편 운영되고 있습니다. 유바리를 둘러본 뒤, 그 작은 열차를 타고 서쪽으로 향했습니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시골 마을이었지만, 서는 정거장마다 사람들이 몇 명 정도는 타고 내립니다. 그것이 조금은 신기하다고 느꼈습니다.
스즈키 나오미치라는 한 정치인의 사례를 주목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정책에도 언제나와 같은 빛과 그림자는 있겠죠. 다만 일본과 같은 고령화와 인구 감소 시대를 목전에 둔 한국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소멸의 위기에 처한 한국의 지방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던가요.
그 시대에 대응하려는 눈에 띄는 정치인은 있던가요. 그가 원하는 정책을 마음껏 펼치고, 그 능력을 기반으로 성장할 수 있는 지방정치의 구조가 한국에는 있을까요. 모든 것이 서울로 수렴하는 나라에서, 진심으로 지방의 미래를 그리는 청년 정치인이 한국에는 있었던가요. 서쪽으로 향하는 작은 기차 안에서도, 그 의문은 저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덧붙이는 글 | - 참고문헌
정세은, <맞서고 생성하는 섬>,세계 역사와 문화 연구, no.62, pp.183-220.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