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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영화 <서울의 봄>의 한 장면. ⓒ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의 하나회는 군 내 대부분의 요직을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반란에 동참하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군 장성들은 전두환의 하극상에 맞설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용기 있게 신군부 반란을 저지하기 위해 끝까지 맞섰던 군인들이 있었습니다. 12.12 진압군 3인방인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소장과 9공수특전여단장 윤흥기 준장,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안종훈 소장,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장 박동원 대령, 제3야전군사령관 이건영 중장, 특전사령관비서실장 김오랑 중령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최근 1000만 관객이 본 영화 <서울의 봄> 주인공 이태신(배우 정우성)역의 모티브가 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은 1931년 경상북도 칠곡 출생으로, 한국전쟁 시절 육군종합학교 11기(육종11기)로 1971년 육종 출신으로는 최초로 장군이 됐습니다.

이후 수경사 참모장, 26사단장, 육군본부 교육참모부 차장을 거쳐 12.12 군사반란이 발발하기 약 한 달 전인 1979년 11월 16일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임명돼 수도 서울을 지켜야 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도 나오듯 장태완 장군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신군부의 반란에 맞서 최선두에서 끝까지 진압을 위해 힘썼고, 신군부에 의해 서빙고 대공분실에서 45일간의 고문 조사를 받은 후 강제 예편됐습니다. 2010년 7월 26일 사망한 그는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132호에 안장돼 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132호에 안장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132호에 안장된 수도경비사령관 장태완 소장 ⓒ 정성일
 
영화 속 소소한 장면도 실제 장태완 장군의 이야기가 많이 포함돼 있었습니다. 먼저 영화에서 정상호 총장은 이태신 장군을 불러 논문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실제로 장태완 장군은 육군대학 시절 군의 정치화 문제를 제기하고 보안사령부 해체를 주장하는 졸업논문을 제출했습니다. 정승화 총장은 장 장군의 이러한 군인 정신을 높이 사 수도경비사령관이라는 중책을 맡긴 것입니다.

다음으로 12.12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 빠지지 않는 장태완 장군의 명대사가 있습니다. 장태완 장군이 수경사로 돌아와서 유학성, 황영시와 차례로 통화하며 이들의 반란행위를 파악한 장 장군은 반란군에게 인상 깊은 경고를 날립니다. 당시 육성기록을 확인해보면 "마, 느그한테 선전포고다 인마! 난 죽기로 결심한 놈이야!"라는 장 장군의 목소리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영화 속 연출과 차이는 있지만, 군 지휘부가 우왕좌왕하는 동안 결단력 있게 행동했던 장태완 사령관의 성격이 잘 드러납니다.

장태완 장군이 강제 퇴역한 뒤 가족사는 반란군들의 화려한 삶에 반해 비극적이었습니다. 1980년 2월 감옥에서 나온 장태완 장군은 가택연금돼 보안사령부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대구에 계신 부친은 자식의 소식에 식사를 끊고 막걸리만 마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장 장군이 아버지 임종을 맞는 그 순간에도 대구보안대 요원들은 근처를 맴돌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도 언급됐던 장태완 장군의 아들 장성호는 1981년 서울대 자연대에 입학해 2학기에는 학년 수석을 할 정도로 명석했습니다. 그랬던 아들은 1982년 1월 12일 아침 실종돼 2월 9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습니다.

장태완 장군 본인도 심근경색 수술과 폐암 수술을 받으며 고생하다 2010년 7월 26일 향년 78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로부터 두 해도 지나지 않는 2012년 1월 17일, 장 장군의 부인인 이병호 여사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들 성호 군이 실종된 지 30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장태완 장군의 묘소(장군2-132) 바로 옆에는 반란군 정도영(장군2-131)의 묘가 있습니다. 그는 12.12 군사반란 당시 보안사령부 제1처장(보안처장)으로 보안사령부에서 장태완 장군을 비롯한 진압군들의 통화를 도청하고 상황을 반란군 수뇌부에 전달하였던 반란의 주역이었습니다. 장태완 장군의 운명은 비극적이게도, 죽어서도 자신을 도·감청했던 반란군의 옆자리에 잠들어 있습니다. 그가 장 장군의 옆에 있는 이유는 장태완 장군이 사망하기 이틀 전인 2010년 7월 24일에 사망했기 때문입니다.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서울의 봄> 영화 속에서 배우 김성균이 연기했던 김준엽 준장은 육군본부 헌병감이었던 김진기 준장을 모티브로 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6호에 안장된 김진기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육군 갑종간부후보생(갑종6기)으로 임관하여 1979년에는 육군본부 헌병감으로 헌병 병과의 최고 책임자로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의 체포를 지휘했습니다. 그리고 장태완 장군과 1953년 미 육군보병학교에서 유학을 함께 하여 신뢰가 두터운 사이였습니다.

영화에서 나온 대로 김진기 준장은 12월 12일에는 장태완, 정병주 장군과 함께 전두환의 생일잔치에 유인됐다가 정승화 총장의 납치 사실을 가장 먼저 알고 두 장군과 함께 반란 진압에 나섰습니다. 직속 부하인 총리공관 헌병 특별경호대장 구정길 중령에게 보안사령관 전두환 체포 명령을 내리지만, 하나회에 의해 좌절됐고 결국 후배인 수도경비사령부 헌병단 부단장 신윤희 중령에게 체포됐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6호에 안장된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6호에 안장된 육군본부 헌병감 김진기 준장 ⓒ 정성일
 
반란군이 육군본부를 장악한 후 김진기 장군 또한 장태완 장군과 마찬가지로 보안사령부의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군사 반란세력의 전리품이 되기 싫다며 1980년 1월 31일 예비역 준장으로 자진 예편해 군을 떠났습니다.

그 뒤로 수원에서 농사하며 지냈는데, 이마저도 반란군이 득세하는 소식을 듣기 싫어 속세를 등지고 보문도로 들어가 광어 양식업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갔습니다. 노태우 정권 때 여러 요직을 제안받았지만 모두 거부하고, 1987년 11월 정병주 장군과 함께 12.12는 신군부의 하극상이었다는 기자회견을 진행했습니다. 1993년에는 전두환을 비롯한 반란세력을 고발하는 등의 활동을 이어가다, 2006년 12월 28일 지병으로 사망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제9공수특전여단장 윤흥기 준장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255호에 안장된 제9공수특전여단장 윤흥기 준장은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제8공수특전여단장 박기홍 준장(배우 정형석)의 모티브가 된 인물입니다. 윤흥기 여단장은 당시 수도권 특전여단장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회 소속이 아닌 갑종간부후보생 출신(갑종35기)이었습니다. 서울로 향하고 있는 반란군의 1공수를 저지하기 위해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서울로 향하던 윤흥기 여단장은 신사협정에 속은 윤성민 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부대 복귀 명령을 받고 회군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255호에 안장된 제9공수특전여단장 윤흥기 준장
국립대전현충원 장군2묘역 255호에 안장된 제9공수특전여단장 윤흥기 준장 ⓒ 임재근
 
반란이 끝난 뒤 윤흥기 여단장은 강제 예편되지는 않았지만, 여단장의 자리를 하나회 이진삼(육사15기)에게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이후 윤 장군은 실권이 약하고 비교적 한직인 육군본부 교육처장(1980년),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차장(1981년)을 끝으로 1983년 소장 예편했습니다. 반란군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빠져 살던 윤 장군은 1993년 정승화, 장태완, 김진기 장군을 비롯한 22명의 장군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34인의 반란군을 대검찰청에 고발하는 등 반란군을 처벌하기 위한 활동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2013년 8월 17일 사망해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됐습니다.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안종훈 소장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16호에 안장된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안종훈(공병3기, 육사9기 대우) 소장은 육본 지휘부 내에서 장태완 장군의 반란군 무력 진압을 지지했던 몇 안 되는 장성 가운데 한 명입니다. 그는 육군본부 지휘부 장태완 장군의 병력 동원 요청에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당시 "진압이 비록 어렵다 손치더라도 국민의 군대요, 군의 사명을 따라야 할 우리 고급장성들이 우리만 살겠다고 쿠데타군에 손을 들 수는 없지 않습니까"라며 장태완 장군의 병력 동원 요구에 찬성하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16호에 안장된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안종훈 소장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16호에 안장된 육군본부 군수참모부장 안종훈 소장 ⓒ 임재근
 
안종훈 장군은 12.12 이후 강제 예편되지는 않았지만, 1980년 5월 17일 국방부에서 열린 전군지휘관 회의에서 군이 직접 정치 개입해서는 안 된다며, 회의 참석자 44인 가운데 유일하게 전국 계엄확대를 반대했습니다. 이후 8월 15일 해임되어 중장 예편됐습니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진압군

서울현충원에 안장된 진압군도 있습니다. 12.12 군사반란 당시 장태완, 김진기 장군과 함께 끝까지 저항했던 육군특수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육사9기)은 1988년 10월 16일 실종돼 이듬해 3월 4일 경기도 한 야산에서 목매달아 죽은 변사체로 발견됐습니다.

정병주 장군은 1987년 11월 김진기 장군과 함께 신군부의 하극상을 폭로하는 기자회견을 연 바 있습니다.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은 제1장군묘역 168호에 안장돼 있습니다. 장태완 장군과 연락을 취하며 반란을 막으려 한 제3야전군사령관 이건영 중장은 반란군 진압을 위해 애썼으나 보안사가 그의 통화를 모두 감청하고, 그의 출동 명령을 막았습니다.

이건영 장군 또한 보안사의 강압 수사를 받고 강제 예편되었으며, 2023년 3월 11일 사망해 충혼당 519실 412호에 봉안돼 있습니다. 장태완 수경사령관의 휘하에서 끝까지 반란에 맞섰던 수도경비사령부 작전참모부장 박동원 대령은 육사 14기 대표화랑이었으나 하나회에 맞서 한직을 돌다 소장으로 예편했습니다. 그는 서울현충원 212실 155호에 봉안돼 있습니다.

상관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끝까지 지키다 전사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김오랑 소령은 장병29묘역 2923호에 안장됐습니다. 그의 죽음에 양친은 화병으로 사망했습니다. 부인 백영옥씨는 남편의 사망 소식에 실명했고, 1991년 6월 28일 변사체로 발견됐는데, 경찰은 실족사로 결론 내렸습니다.

반란군들의 화려한 삶에 비해 진압군들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들까지 비극적인 삶을 보내야 했습니다.

[참고자료]

장태완, <12·12 쿠데타와 나>, 서울: 명성출판사, 1993
국방부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사건 조사결과보고서>, 2007
대법원 1997. 4. 17. 96도2276 판결문
12.12 사건 보안사 녹음기록

#1212#서울의봄#대전현충원#군사반란#현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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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기획홍보팀장, 유튜브 대전통 제작자, 前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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