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면 우리 집 거실에 있는 TV는 여지없이 세상소식을 알려준다. 알람이다. 내가 결혼하고 시작한 버릇이니까 벌써 33년을 넘어선다. 요새 며칠은 날씨가 꽤나 사납다. 그동안 이상기후라는 이름 속에 감춰두었던 겨울의 본성을 곱배기로 보여주는 듯싶다. 이불 속 온기를 그대로 간직한 채 거실에 누워있는 채로 밖을 내다봤다. 날이 아직 완전히 밝지는 않은 시간인데 밖이 하얗다.
"눈이 내린다고 예보를 하던데 진짜로 눈이 내렸네..."
혼자 중얼거리면서 부시시한 눈으로 발코니 문을 열고 밖을 보니 들판이 하얗다. 밤새 눈이 내린 모양이다.
도로위 신호를 기다리는 차위에는 하얀 눈들이 소복이 쌓였다. 어느님에게 배달을 가는지 자동차들은 조심조심 움직이고 있다. 눈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한다. 휴대폰에는 안전재난문자가 쉬지를 않는다. 행안부와 제주도에서 수시로 상황을 알려주고 있다. 그냥 부득이한 경우 아니면 '방콕'을 하라는 의미가 행간에 보인다.
어린시절 어머니께서 해주던 간식, 감저 빼떼기
이런 날은 어릴 적 어머니가 삶아주던 감저(고구마) 빼떼기가 생각이 난다. 별다른 먹을거리,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 감저 빼떼기는 최고의 간식거리였다.
제주에서는 고구마를 '감저'라고 한다. 잘라서 말린 감저 빼떼기는 그냥 삶아서 먹는다. 매년 감저를 수확하는 계절이 되면 우리는 감저 이삭 줍기를 했다. 서귀포는 대부분이 감귤농사를 하기에 감저 농사는 주로 동쪽 외곽지대에서 했다. 어머니와 함께 서너 번의 이삭 줍기를 하면 우리 많은 가족의 겨울 내내 간식거리로는 충분했다.
주워온 감저는 마당에 펼쳐놓고 선별 작업을 한다. 상태와 크기에 따라서 금방 쪄서 먹을 것, 땅을 파고 감저 눌을 만들어서 저장을 할 것, 잘라서 감저 빼떼기를 만들 것으로 분류를 한다. 일단 상하거나 작은 것들은 썩기 전에 삶아서 먹어야하니 처리 1순위다.
중간정도의 크기에 상태가 좋은 것들은 저장을 한다. 먼저 우영팟(텃밭)에 땅을 깊숙이 판다. 그 위에 짚을 깔고 감저를 넣은 다음 짚으로 덮게를 만들어서 덮는다. 일종의 천연 저장고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겨울 내내 썩지 않고 싱싱한 감저를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먹을 수 있다.
이후 남은 것들은 감저 빼떼기를 만들어야 한다. 일단은 좀 크기가 큰 것들이다. 손으로 잘 마를 수 있는 두께로 일일이 얇게 썰어야 한다. 양이 많은 날은 보통 일이 아니다. 나중에는 감저를 놓고 돌리면 얇게 썰어지는 반수동 기계가 나오긴 했지만 그걸 만져보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다. 썰어 논 감저는 햇빛에 말려야 한다. 마당에 말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태양과 가까운 지붕 위가 안성맞춤이다. 사다리를 놓고 슬레이트 지붕 위에 얇게 썬 감저를 올려놓고 겹치지 않도록 펼쳐야 한다. 키가 작아서 안 되는 경우는 기다란 막대기를 사용해서 펼쳐야 한다.
대부분은 우리 집에서 제일 키가 큰 아버지의 일이지만 가끔씩은 어머니나 내가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위험성을 항상 상존하는 편, 어머니는 사다리에서 미끄러져서 떨어진 적도 있다. 건조하는 일은 꽤나 번거롭고 신경이 쓰이는 일이다. 날씨 상태에 따라서 거둬들이고, 널고, 뒤집고 해야 하니 말이다. 잘못 건조하면 마르지도 않고 까맣게 썩어버리기에 건조하는 과정을 꽤 신경이 쓰인다. 늦가을 학교 갔다 오면 해야 하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겨우내 비상식량이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직접 먹을 간식거리이기에 일손을 안 보탤 수가 없었다.
우영팟 감저 눌 속에 저장된 고구마는 날것으로 먹어도 왜 그리 부드럽고 맛이 있었는지, 지금도 한 입만 하고 싶은 맛이다. 감저 빼떼기도 그렇다. 잘 말려서 큰 자루에 넣어서 잘 안보이는 곳에 보관해 둔 빼떼기를 살짝 꺼내서 입에 놓고 씹으면 오도독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씹으면 씹을수록 녹말 맛이 나는데,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 몰래 훔쳐 먹었던 맛들이다. 누가 보지 않는 나만의 맛이어서 더 그렇게 맛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난방'이란 개념이 없던 시절의 기억
겨울철 눈이 많이 내린 날은 온 가족이 안방 아랫목에 같이 모여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는 집에 난방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유일하게 안방에 온돌이 있어서 부엌 아궁이나 굴묵에서 불을 때면 엉덩이가 뜨거울 정도로 뜨거워진다. 그러기에 어느 집이건 아랫목은 타서 항상 거므스레하다. 불을 때서 온기가 사라지지 않게 아랫목에는 이불 한 장 정도는 항상 덮고 있었다. 밖에서 놀다가 돌아왔을 때 그 이불속에 언 손을 쏙 집어 놓았을 때의 안락함은 경험해 본 사람이 아니면 모를 거다.
온 가족이 모였을 때는 그 이불속에 발을 집어놓고 옹기종기 모여서 얘기를 하거나 간식거리를 먹기도 했다. 별다른 간식거리가 없을 때 겨울철에 먹을 수 있는 감저 빼때기는 최고의 맛이다. 감저 빼떼기를 삶느라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 안방도 따뜻하게 된다. 일거양득이다.
우리는 5남 4녀의 대가족이라 뭐든 한솥 가득 만들어야 조금씩이라도 나눠 먹을 수 있다. 어머니가 감저나 빼떼기를 삶다고 하면 온 형제들이 모두 집으로 귀환해서 아랫목에 진을 치고 학수고대한다. 긴 기다림 끝에 어머니가 큰 차롱이나 양푼이에 한가득 간식거리를 가져오는데, 이후 어머니 방식대로의 배분이 시작된다.
아홉 형제들은 먹는 취향이 다르고, 속도나 버릇이 다르기에 어머니는 항상 일정량을 골고루 배분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먹는 속도에 따라서 많이 먹고, 못 먹고가 결정되기에 어머니는 그걸 불합리하게 여기신 것이다. 이후에 자기 몫은 먹든, 다른 형제에게 나눠주든, 다음 날 먹든 자유다. 지금 생각하면 지혜로우신 판단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뻬떼기를 삶을 때는 단 맛을 내려고 당원을 사용했다. 지금 같이 단맛을 낼 수 있는 조미료가 많지 않던 시절 단맛을 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당원의 단맛이 깃든 솥밑창의 빼때기는 맛이 최고다. 여기에 살짝 바닥에 붙어서 탄맛이 나는 빼떼기를 먹을 수 있다면 최대의 행운이 된다. 모두의 잔치가 끝나고 부엌에 갔을 때 빼떼기를 삶았던 솥에 붙어 있는 끈끈함을 숟가락으로 긁어먹다가 어머니에게 발각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1970년대 겨울 우리집 안방의 이야기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겨울철 눈이 내리는 날은 그때 그 모습이 그리워진다. 지금은 퇴직하고 조그만 농지를 구입해서 귀촌생활을 하고 있다. 어쩌다 농부, 게으른 농부가 됐다. 내 마음대로 작물 선택이 가능하기에 매년 그때 그 시절 감저 빼떼기가 생각이 나 고구마를 조금 심는다. 늘 하는 말, 내가 먹을 정도의 분량이다.
감저 빼떼기를 보신 어머니의 반응
한 3년 전쯤이다. 밭에서 수확한 감저가 크고 양이 여유가 있길래 감저 빼떼기를 만들어볼 생각으로 아내에게 얘기를 했다. "감저 빼떼기를 만들어 볼까?" 아내는 이미 오래전부터 내가 빼떼기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단 걸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말리지는 않았다. "어떻게 말리려고?" 아파트에 살기 때문에 건조하는 게 걱정이 된 모양이다.
"장모님댁에 가서 마당에서 말리지 뭐..." 장모님 댁 마당이 있었다. 모처럼의 향수를 기억하면서 감저 빼떼기 만들기는 성황리에 종료되었다. 햇빛에 말릴 수 있어서 상태도 좋아 보였다.
"이거 뭐고?" 내가 직접 만든 감저 빼떼기를 서귀포 어머니한테 가져다 드렸다. 비닐봉지에 담아서 내미는 걸 무심코 보더니 던지는 첫 말이다.
"감저 빼떼기 마씸?"
"뭐? 어디 시난?"
"나가 어머니 생각나고, 옛날 생각난 만들어 쑤다..."
"집에서 먹쭈... 무사 가져완..."
"어머니 삶아 드십써... 경해도 되어?"
사실은 온 가족이 모였을 때 삶아서 먹으면서 옛 추억을 회상하고 싶었는데 그리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제일 생각나는 어머니한테 가져다 드렸다. 그 후 얼마만인가 다시 서귀포에 갔다.
"어머니, 저번에 가져다 드린 빼떼기 어떻했쑤꽈?" 살짝 당황하는 눈치다.
"저번에 나 먹으란 허난 엊그제 삶아 먹으신... 무사?"
어머니도 빼떼기가 무척이나 그리웠고 먹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릴 때는 어머니의 빼떼기를 내가 먹었는데, 이젠 나의 빼떼기를 어머니가 먹는다. 기분이 묘하다. 마음 한켠 서글픔이 밀려온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가의 브런치에도 게제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