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편집자말] |
특정한 예술가의 삶을 새롭게 꾸민 텍스트에 대해 쓰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니까 어느 한 예술가의 삶에 대해 무엇인가를 쓴다고 했을 때, 책 짓는 사람은 우선 그 예술가가 남긴 작품을 꼼꼼히 검토했을 것이고, 이후에 예술가에 대해 쓴 2차 서적을 모두 읽었을 것이다. 그 이후에 축적된 정보를 바탕으로 객관적인 잣대를 세워 그 예술가를 새롭게 재현했을 것이다.
그러니 리뷰 쓰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과정을 고려해 글을 써야 하니 쉽지 않다. 리뷰 쓰는 사람 또한 원작과 2차 서적을 모두 정확히 숙지하고 있을 때, 리뷰하고자 하는 텍스트가 어느 지점에 집중했는지 '차이'를 정확히 읽어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오늘 다룰 〈마크 로스코〉(이유출판사, 2023)도 만만치 않다. 이 텍스트는 예술가 마크 로스코(1903~1970)의 전기를 다룬다. 그는 이 계절에 없지만, 독자들에게 '멀티 폼(Multiforms)'으로 친숙하고 유명한 작가다.
마크 로스코는 마티스의 <붉은 방>을 보고 '멀티 폼'을 극복하고 보완해 자신만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은 특정한 작가의 전성기를 의미하는 것이니 독자들은 마크 로스코가 국내 작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성기 시절의 그를 오래도록 기억하는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그는 '표현'에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무의식에서 피어오르는 날것 그대로의 색채를 재현하기보다는 날것(무의식)이지만 정제(의식)된 것을 선호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예술을 보고 아폴론(낮)적인 것과 디오니소스(밤)적인 것을 추구했다고 본다. 이런 사실로도 그가 독자를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런 마크 로스코의 작가적 성향이 많은 독자에게 울림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약탈 피해 조국 등져야 했던 청년
물론,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디아스포라였다. 제정 러시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소수민족, 노동자에 대한 약탈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했다. 유대인이라는 점에서 청년 시절도 고단했다. 유대인에 대한 편견과 혐오는 미국이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모인 예일대학교에서도 유대인 혐오는 지속되었다. 로스코는 이런 편견 속에서 자신의 예술 작업을 묵묵히 이행해나간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아름다움의 창조가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30) 것이라고 말한 막스 웨버(Max Weber 1881~1961), "1930년대 뉴욕에서 모더니즘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34) 받는 밀턴 에이버리(Milton Avery 1893~1965), "유럽 초현실주의를 경험한 후, 무의식을 표현하는 작업에 관심"(35)을 가진 아돌프 고틀립(Adolph Gottlieb 1903~1974) 등의 예술가들과 조우하며 마크 로스코는 자신의 예술을 긴장 속에서 운영한다.
앞서 서술된 여정은 프란체스코 마테우치가 글을 쓰고, 조반니 스카르두엘리가 그림을 그린 공동 작품 〈마크 로스코〉의 그래픽 노블에 담겨 있다. 나아가 로스코의 첫 번째 부인인 조각가이자 보석 디자이너였던 이디스 사샤(Edith Sachar 1912~1981)와 부딪치는 장면과 두 번째 부인 메리 앨리스 베이슬과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그밖에 로스코가 예술적 사건을 직면했던 뉴욕 시그램 빌딩(Seagram Building)에서 있었던 일, 1959년 시그램 빌딩 내에 설치 작업을 하던 중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을 때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통로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벽'과 만났던 일, 1700여 년 동안 화산재에 파묻혀 있던 빌라의 벽화를 보고 자극을 받았던 일, 존 드 메닐과 아내 도미니크로 부터 텍사스에 가톨릭 채플을 지을 때 로스코의 작업으로 채우고 싶다는 제안을 받은 일 등이 그려져 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은 마크 로스코를 다룬 기존의 텍스트와 별반 차이가 없다. 차이가 있다면, 산문의 형식이 아닌 칸과 말풍선과 그림이 존재하는 만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 차이에 대해 논해야 할 것 같다. 마크 로스코는 워낙 유명한 예술가여서 그에 대한 정보는 어쩌면 동시대에 넘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삶과 예술을 논하는 것은 어쩌면 지루한 내용을 반복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그래픽 노블 〈마크 로스코〉를 제작했던 두 명의 작가는 어떤 의도에 무게를 싣고 '차이'를 생성한 것일까. 크게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끝내, 화해
우선, 〈마크 로스코〉에는 이미 어른이 된 마크 로스코와 아이 마크 로스코가 만나는 장면이 네 번 연출된다. 이런 연출은 마크 로스코가 안타깝게 자살로 삶을 마감한 여정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어른 마크 로스코는 아이 마크 로스코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고, 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아이는 "당신…당신이 싫어요! 정말 싫어요. 난 당신처럼 되고 싶지 않아요…"(107p)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은 끝내 서로 껴안으면서 마크 로스코의 삶이 비극적이고 고단했지만, 예술가로서의 삶은 아름다웠다는 것을 연출한다. 즉, 프란체스코 마테우치와 조반니 스카르두엘리는 이 장면과 순간을 의도적으로 연출해 마크 로스코에 대한 위로와 애도를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은 이 지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다음으로는 마크 로스코와 첫 번째 부인인 이디스 사샤와의 불화를 연출한 장면과 로스코의 작품 변모 과정을 의도적으로 담은 지점이다. 〈마크 로스코〉의 두 명의 저자는 직접 "이전 페이지에 나오는 일련의 이미지는 로스코가 이디스와의 결혼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던 시절 그의 답답한 심정을 암시"한다고 적었다. 이 장면에서 알 수 있듯이, 독자들은 로스코가 첫 번째 아내와 충돌이 잦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두 명의 작가들은 이 부분에 정성을 들였다.
또한, 마크 로스코는 하나의 스타일만을 고수해 죽을 때까지 밀고 나간 작가가 아니다. 그는 독자들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런 내용을 잘 담아내기 위해 적합한 '형식'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니 로스코의 작품 변모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다.
이런 과정 또한 〈마크 로스코〉의 두 작가가 그래픽 노블이라는 형식에 입각해 재현하려고 했다. 이 지점도 독자들이 눈여겨볼 부분이다. 그럴 때 만화를 보다 즐겁고 흥미롭게 이해하고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세밀하게 작가의 의도를 생각하며 읽는 방식은 만화를 흥미로운 지점으로 데려다준다.
만화는 칸과 칸 사이의 빈틈을 상상력으로 채우는 장르다. 그러니 마크 로스코에 대한 사전적인 정보가 없는 독자들은 〈마크 로스코〉를 읽을 때, 쉽지 않을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동력 자체가 없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마크 로스코의 예술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미리 마크 로스코와 관련된 책 한 권 정도를 읽고 그래픽 노블 〈마크 로스코〉를 읽기를 권한다. 그렇게 한다면 더욱 흥미롭게 텍스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조금은 수고롭겠지만, 비운의 예술가 로스코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이 작업을 이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문종필은 평론가이며 지은 책으로 문학평론집 〈싸움〉(2022)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