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야마에서 바다를 따라 산요 본선의 열차에 탑승했습니다. 빠른 신칸센 대신 천천히 가는 보통열차를 선택한 덕에, 히로시마까지는 세 시간 넘게 소요됐습니다.
히로시마는 예상보다 큰 도시였습니다. 히로시마시의 인구가 100만을 넘어, 일본의 10대 대도시로 꼽히죠. 오타가와(太田川)라는 강 하구의 넓은 평야를 낀 도시입니다.
히로시마가 큰 도시가 된 것도 이 평야 덕분입니다. 강 하구에 아직 토사가 충분히 퇴적되지 않았던 중세까지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넓은 삼각주가 만들어진 에도 시대부터는 큰 도시가 되어 있었죠.
하지만 물론 우리가 이 도시의 이름을 아는 것은, 2차대전 말기에 벌어진 비극 때문입니다. 히로시마는 인류사 최초로 원자폭탄이 투하된 도시입니다.
2차대전 말기, 일본에게는 이미 전쟁을 계속할 만한 전력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미국은 일본 본토에도 막대한 공습을 가하고 있었고, 도쿄는 고층 건물이 거의 남아있지 않을 정도였죠. 군사력도 궤멸 수준이었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일본에 조건 없는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응하지 않았죠. 어떻게든 미국을 괴롭혀 천황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비이성적인 목표가 군부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에 국민 몇의 목숨이 사라지든, 전쟁의 광기에 휩싸인 일본 군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국은 예상 외의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죽을 때까지 저항하다 방법이 없으면 '옥쇄(玉碎)'한다는 일본군의 전투 방식은 미국에게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일본 본토 상륙에 이전과는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특히 유럽에서 전쟁을 마치고 아시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던 소련의 참전 이전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야 했습니다. 그렇게 미국은 새로 개발된 신무기, 원자폭탄을 일본 본토에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미국은 초기 원자폭탄의 표적으로 교토와 히로시마를 꼽았습니다. 이제까지 폭격을 크게 받지 않았으면서, 넓은 도심지가 있어 피해를 뚜렷이 확인할 수 있는 도시였죠.
이 가운데 일본의 정신적 수도에 가까운 교토가 파괴될 경우, 전후 민심 수습에 큰 문제가 있을 것을 우려해 교토는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대신 기타큐슈가 표적이 되었고, 이는 당일 기상 문제로 나가사키로 변경되었죠.
히로시마에는 8월 6일 원자폭탄 '리틀 보이'가 투하됐습니다. 사흘 뒤 '팻 맨'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었죠. 지금까지도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핵무기를 실전에 투입한 사례입니다.
원자폭탄 한 발로 히로시마 도심은 완전히 파괴됐습니다. 폭심지 바로 아래 있어 오히려 충격이 적었던 히로시마 물산장려관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파괴되어 불탔죠. 폭발과 그에 따른 화재, 방사능 피해로 히로시마 시민 14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병원을 포함한 도심 기능 전부가 마비되었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한 주 뒤인 8월 14일, 일본군은 연합국에 조건 없는 항복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다음날 히로히토 덴노가 직접 항복 조서를 발표했죠.
전쟁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히로시마에는 폐허만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히로시마는 바닥에서부터 재건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1949년 '히로시마 평화기념도시 건설법'이 통과됩니다. 중앙정부의 재원을 투입해 히로시마를 재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1950년대부터 히로시마의 부흥이 시작되죠.
폐허가 되었던 히로시마는 '평화 도시'라는 이름으로 일어섰습니다. 지금도 히로시마 곳곳에는 '평화'라는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평화 공원과 평화 기념관이 폐허가 되었던 옛 도심에 들어서 있죠.
히로시마의 추모비에는 많은 국가의 정상이 다녀갔습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히로시마를 찾았고, 그 적성국인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의장도 히로시마에 방문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도 히로시마에 방문했죠.
일본 제국은 식민 제국이었습니다. 타국의 주권을 침탈해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후기에는 전쟁범죄를 벌이며 전 세계를 적으로 돌렸습니다. 그런 역사를 가진 일본이, 이제는 '평화'를 앞세우고 있다는 사실은 식민지 경험을 가진 우리에게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결국 원자폭탄의 투하라는 비극조차도 일본의 군부가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그 현장인 히로시마에서 말하는 평화와 추모가, 일본의 범죄를 가리고 미국의 폭력성만을 강조하려는 시도는 아닐까 의심이 들 수도 있겠죠.
그러나 우리가 굳이, 평화라는 가치의 폭을 좁힐 필요가 있을까요? 히로시마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는 2차대전이라는 전쟁이 낳은 비극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이미 패배한 전쟁을 국민들의 목숨을 대가로 끝끝내 끌고 가던 일본 군부가 만든 비극이었습니다.
우리가 히로시마에서 벌어진 비극을 생각하고 그 피해자에 추모의 뜻을 건네는 것은, 과거 전쟁범죄를 반성하고 규탄하는 것과 병립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니, 오히려 병립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히로시마의 평화는, 그 비극의 길에 다시 들어서지 않겠다는 의지이고 다짐입니다. 우리가 굳이 그 의지를 폄하하며, 평화의 범위를 축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후 일본을 지배한 '평화'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였습니다. 군국주의로의 회귀를 막고, 국가 권력의 횡포를 규탄하고, 군대를 포기한 일본의 헌법을 수호해야 한다는 상징적인 단어였습니다.
식민지배라는 아픈 역사를 공유하는 우리의 역할은, 그 평화의 실천에 함께 발을 맞추는 것입니다. 전쟁이 만든 비극을 추모하고, 비극의 원인을 규명하고, 어디서든 그 비극이 재현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우리의 역할은, 그 평화를 수호하고자 하는 일본의 시민들과 손을 잡고 연대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히로시마는 전쟁의 상흔을 안은 도시였지만, 그렇기에 역사를 돌아보는 평화와 연대의 도시가 될 수도 있습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에는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사망한 조선인을 기리는 비석이 서 있습니다. 당시 사망자 가운데 최대 2만 명이 조선인이었다고 보기도 하죠. 그만큼 조선인의 피해도 심각했습니다.
이곳에서 희생당한 조선인의 영령이야말로, 우리가 히로시마라는 '평화의 도시'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전쟁도 착취도 없는 세상을 위해 노력하는 이웃 국가의 시민들과 함께해야 할 이유가 될 것입니다.
히로시마의 도심은 재건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중심에는 여전히 과거의 상처와 아픔이 무너진 돔으로 남아 서 있습니다. 그 과거를 외면하지 않겠다는 히로시마 시민들의 의지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전쟁의 망령이 부활할 때,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정부가 세워질 때, 히로시마의 비극은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를 경고하기 위해, 히로시마의 무너진 돔은 오늘도 시민들의 곁을 지키고 서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