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31일, 서쪽으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2024년 2월 3일,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400일 간의 세계일주였습니다.
서쪽으로 향한 여행은 지구 한 바퀴를 돌아 다시 한국에 왔습니다. 오키나와 여행 이후, 저는 가족들과 함께 북규슈를 며칠 간 둘러본 뒤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400일 만에 도착한 땅이라고 말하기에는 모든 것이 너무나 익숙했습니다. 달라진 것도, 어색한 것도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늘 나라와 도시를 오갈 때마다 무엇이 다른지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달라진 점을 찾으려 애썼죠. 하지만 그렇게 애쓸 필요가 없어서일까요. 한국에서는 달랐습니다. 해가 진 저녁 인천공항의 모습에는 떠날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400일 동안 여행한 국가만 57개 국가입니다. 겨우 며칠을 머물고 떠난 나라도 있었고, 두 달 정도 시간을 들여 꼼꼼히 둘러본 나라도 있었습니다.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간 방문한 나라들을 하나둘 회상해 보았습니다. 400일이라는 시간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여행은 중화민국에서 출발했습니다. '민국'과 실패한 중국 혁명의 꿈을 돌아보며 며칠을 보냈습니다. 중화민국은 최근 총통선거를 치렀고, 이 나라를 '대만'이라 부를 수 있는 날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베트남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를 여행했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몇 번이나 밤 버스를 타고 여행한 기억이 납니다. 태국은 지난해 총선을 통해 개혁적 정당인 전진당이 부상하기도 했습니다.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를 거친 뒤에는 인도와 네팔로 향했습니다. 두 나라를 합해 두 달 가량을 보냈습니다. 남아시아의 음식 문화에 빠져들어, 인도를 떠난 뒤에도 인도 식당을 한식당보다 오히려 더 많이 찾았습니다.
설산이 펼쳐진 중앙아시아의 도시들도 생각이 납니다. 깨끗한 거리와 도심의 공원, 한적한 중앙아시아의 도시를 기억합니다.
아부다비를 거쳐 코카서스 3국도 여행했습니다. 평화롭게 보이지만, 분쟁과 갈등이 끝나지 않은 땅이었죠. 그 사이 배낭을 잃어버렸던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튀르키예에서도 20여 일을 보냈습니다. 이 나라에 깃들어 있는 공화국의 꿈과, 어느 곳보다 오래된 역사의 흔적이 이질적이지만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이스라엘과 요르단에 들렀습니다. 당시만 해도 전쟁이 발발하기 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 구시가에 풍기던 긴장감과, 안식일 텔아비브의 황량함은 그때에도 같았습니다.
이집트를 거쳐 잔지바르와 케냐, 남아프리카공화국에도 들렀습니다. 짧은 아프리카 기행이었지만, 그 사이에도 볼 수 있는 것은 많았습니다.
그리고 영국을 시작으로 세 달간 유럽을 지났습니다. 가는 도시마다 놓치지 않았던 미술관 방문은 특별했습니다. 코펜하겐 왕궁 앞의 평화로운 공원을 아직 종종 떠올립니다.
서유럽과 북유럽, 동유럽과 남유럽까지 지나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향했습니다. 남미는 언제나 치안이 우려되던 도시였지만, 그 사이에도 숨겨진 보석처럼 빛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남쪽 끝의 작은 도시 우수아이아는 아무 이유 없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페루를 지나 멕시코도 여행했습니다. 도심도 휴양지도, 색다른 매력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미국 입국을 거부당한 저는 캐나다에서 지인과 며칠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태평양을 건너 뉴질랜드와 호주를 지난 다음에는 드디어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다시 두 달을 여행했습니다.
여름을 따라서만 한 해를 보냈습니다. 여행을 떠난 뒤부터 늘 더운 나라를 다녔고, 가을이 올 때 즈음에 남반구로 향했습니다. 며칠 정도를 빼면, 제가 제대로 맞은 겨울은 도쿄에서가 처음이었습니다.
도쿄 공항에 도착해, 삿포로행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 시간이 좀 있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 시내에 가기로 했습니다. 오랜만에 맞는 추위 속에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곧 들어온 버스에는 한국어로 '도쿄역'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그 한국어를 만난 순간이 왠지 인상깊었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한국어를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특히 공항 같은 곳에서라면 더욱 그랬죠. 하지만 일본에서는 한국어를 만나는 것이 전혀 어색하거나 신기하지 않았습니다. 전혀 신기하지 않았다는 사실, 저는 그 감각이 인상깊었습니다.
인천공항을 나와 도로에 접어들며, 모든 표지판이 한글로 쓰인 것이 보였습니다. 한국에서 한국어를 쓰는 것이니, 전혀 신기할 것이 없었죠.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혀 신기할 것이 없다는 사실. 한국어를 아무런 머뭇거림 없이 쓸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한국에 돌아온 제 첫 감각이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며칠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한국어를 쓴다는 것을 의식할 이유도 없습니다. 금세 익숙해지고, 또 금세 제자리를 찾는다는 것. 그게 제가 태어나 자란 나라가 갖는 의미겠죠.
긴 여행에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많았습니다. 당장 오늘밤 잠잘 곳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죠. 여행 전체로 봐도 예상 외로 많은 것을 얻었고, 또 예상했던 것을 얻지 못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서 가장 예측할 수 없었던 것은 역시 사람들이었습니다. 난처했던 순간, 불쑥 나타나 도움을 주고 사라졌던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제가 탈 버스를 애써 알려주던 인도네시아의 신호수, 함께 릭샤를 탄 인도의 스님, 선뜻 차 뒷자리를 내어준 튀르키예의 노부부.
그리고 시간을 내어 저의 이야기를 함께해 주신 독자분들에게도 감사를 전합니다. 글이 없었더라면 외로웠을 순간들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다시 한국에 돌아와, 한국에서의 일상을 이어갑니다. 조금 더 가난해졌지만, 그보다 몇 배는 더 풍요로워진 일상을 이어 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도 배낭 하나를 메고 골목을 헤매다, 잠시 벤치에 앉아 언덕의 바람을 쐬던 순간을 기억하겠습니다. 그런 여행자의 마음을, 아직은 놓지 않고 살아보겠습니다.
* 400일간 150여 편을 연재한 <가자, 서쪽으로>는 이번 화로 마무리합니다. 그간 부족한 글을 함께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과 <오마이뉴스> 편집팀에 특별한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덧붙이는 글 | 본 기사는 개인 블로그, <기록되지 못한 이들을 위한 기억, 채널 비더슈탄트(CHwiderstand.com)>에 동시 게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