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부터 주 1회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싣습니다.[기자말] |
나는 어르신들과 <내 인생 풀면 책 한 권> 수업을 하고 있다. 내 인생 '쓰면'이 아니라 '풀면'이다. 처음부터 '풀면'이라고 잡은 이유는 '쓰기'가 어르신들의 장벽이 될 거 같아서였다. 한글이 아무리 과학적인 글자라 한들 처음부터 책 한 권 분량 글을 쓰기는 어렵다. 하지만 말로 '풀어내면' 30분 만에 2장 쓰는 건 금방이다. 첫 시간부터 '풀면'에 힘을 주는 이유다.
꼭 쓰지 않으셔도 된다고 말한 뒤, 노트북 화면을 스크린에 크게 띄워놓고 워드 폰트를 20까지 글씨를 크게 키워서 어르신들의 말이 문서화되는 모습을 첫 시간에 직접 보여드린다. 그러면 재미있어하시면서 당신 이야기를 더 풀어놓는 분이 계시는 반면, 이조차도 미안해하고 심지어 부끄러워하시는 분도 있다.
여성 어르신인 A님은 몇 주간 어떤 질문에도 말씀을 안 하셨는데 이번 주엔 드디어 어린 시절에 볏짚 만들던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한번 말이 트이고 나니, 생각보다 말재주가 있는 분이셨다. 다른 분들도 재밌다고 응원을 보냈다. 이제 수업이 좀 익숙해지셨나 싶어서 다행이다 했는데, 수업이 끝나고 그 분이 슬그머니 내 손을 잡으신다.
"선상님, 인자 다음주부터 못 오것어. 선상님 친절하고 재밌는데 나가 배움이 짧어 민폐여."
"어르신, 혹시 중간에 끼어든 그 남자 어르신 때문에 그러세요?"
대답 대신 A님 눈가가 금방 촉촉해진다. 혹시나 했던 말이 이렇게 들어맞아버리니 속 시원하면서도 마음이 복잡해진다.
앞서 다른 어르신들이 신나게 당신 인생을 풀 동안 A님은 몇 주 동안 듣기만 하셨다. 수업 앞뒤로 긴장을 풀어드리려 나는 이런저런 스몰 토크를 걸었다. 드디어 그 결실을 맺은 날이었는데... A님이 얘기 하던 중에 얼핏 마동석을 연상시키는 풍채 좋은 어르신이 '그게 아니지'라며 천둥 같은 목소리로 갑자기 끼어들었다.
그분이 끼어들자마자 A님의 하얀 얼굴이 핏기 없이 더 하얘졌다. 나는 마동석 어르신이 원래 하시기로 했던 소재로 급히 말을 돌렸다.
다시 A님 차례가 됐는데 갑자기 다른 소재가 나왔다. 특별한 일 없이 여자가 다른 마을에 그냥 가는 건 예의 없는 짓이고 여자가 남자 앞을 지나가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셨다. 그게 왜 예의 없고 부끄러운지는 모르겠어도 일단 듣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어르신이 덧붙이신다.
"느무 옛날 야기 같지요? 근디 나가 어릴 때 늘상 배운 게 그거라 몸에 아주 배어브렀어요. 이제 누가 나 혼내지도 않는디 여적 남자 앞을 지나갈라고 하면 나 혼자 가심이 벌렁하고 막 그르요."
어르신의 마지막 말에 퍼즐이 맞춰졌다. 남자 앞을 '지나가는 것'도 부끄러운데 그 남자가 내 말에 대놓고 '그게 아니지!'라고 했으니 또 가슴이 벌렁벌렁 했던 거다. 내 손만 꼭 잡고 계신 어르신을 보며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이분의 세상이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졌다.
꼭 그래야만 했을까
볏짚 쌓기는 공식을 맞춰서 로켓 쏘는 류의 정밀해야만 하는 일은 아니다. 그걸 내가 아는 방식대로 하지 않았다고 해서, 거기서 꼭 그렇게 끼어들었어야만 했을까. 설사 끼어들었다 한들 '나는 이랬어요'라고 하면 그만이다. 그 사소한 말 대신 '가심이 벌렁' 해야 하는 삶, 그런 삶을 살아오는 일은 얼마나 살얼음판 같았을까.
다행히 A님은 친구와 같이 오셨다. 친구 찾으러 들어온 어르신에게 나는 도움을 청했다. 친구 어르신은 오늘처럼 잘 말하면 그만인데 뭘 그러냐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A님은 작은 한숨을 폭 내쉬면서 친구에게 안기셨다.
다들 어르신 발표를 칭찬했던 것만 기억하시라고 얘기하며 나는 엘리베이터까지 쫓아갔다. 어르신은 쫓아 나온 내 팔을 잡으며 이번에는 '어이구, 미안혀'라고 하신다. 나는 '아니, 어르신이 왜 미안해하세요! 끼어드는 사람이 미안해해야지!'라고 소리 지를 뻔했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인생 초기 경험이 이렇게 오랫동안 사람을 지배할 수도 있음을 확인한 날이었다. 그 초기 경험에 따라 누구에겐 실오라기 같이 사소한 일이, 누구에겐 바윗덩이가 되기도 한다. 실오라기와 바윗덩이의 간극이 종종 성별 차이에서 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어르신이 힘들어하는 그 부분이 과거의 어떤 부분과 연결되어 있는지 찾아서 그걸 끊었으면 좋겠지만. 이미 80 평생을 그리 사셨으니 찾는 것도, 끊는 것도 쉽지는 않겠다. 대신 이 수업에서만큼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안전하다는 감각을 가지셨으면 좋겠다. 그 감각 속에서 아주 잠깐은 자유롭기를, 그러니 다음 주에도 꼭 오시기를 한번 더 바라면서 나도 빈 교실의 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