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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해튼 동쪽 섬 롱아일랜드의 제리코는 가족 단위의 농장이 개간되면서 시작된 마을이다. 1800년대, 동서를 가로지르는 세 개의 큰 도로와 남북을 잇는 두 개의 대로가 교차하며 유동 인구도 늘어났다. 이 정도 도로망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던 주민들에게 기차 노선도 마을로 끌어와야 한다고 설득하는 이가 있었다. 마을의 우체국장, 발렌타인 힉스였다.

지역민에게 신망이 두터웠던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던 제리코 남쪽 평원을 사들여 토지 조합과 새로운 공동체를 일구었다. 3년 만에 롱아일랜드 철도(LIRR)를 개척지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고, 기차역과 물류 부지로 개척지를 탈바꿈 시켰다(1837년).

힉스의 선견지명으로 제리코와 주변 지역의 경제가 크게 발전하자, 주민들은 기차역 주변 새로운 마을을 '힉스빌(Hicksville)'로 불렀다. 지금까지도 힉스빌과 힉스빌 기차역은 중요한 교통 요충지이자 지역 상권의 중심이며 제리코는 미국내 최상위 교육구 중 한 곳이다. 
 
힉스빌과 힉스빌역(LIRR) 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발렌타인 힉스의 이름을 따 '힉스빌(Hicksville)'이라는 마을이 되었다. 또한 그가 마을 발전을 위해 롱아일랜드 철로를 잇고 세운 기차역도 힉스빌역이라 명명되었다. 발렌타인 힉스는 롱아일랜드 철도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역과 가까운 작은 공원에 당시의 기차가 보존 전시중이다.
힉스빌과 힉스빌역(LIRR)지역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발렌타인 힉스의 이름을 따 '힉스빌(Hicksville)'이라는 마을이 되었다. 또한 그가 마을 발전을 위해 롱아일랜드 철로를 잇고 세운 기차역도 힉스빌역이라 명명되었다. 발렌타인 힉스는 롱아일랜드 철도 회장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역과 가까운 작은 공원에 당시의 기차가 보존 전시중이다. ⓒ 장소영

그런데 발렌타인 힉스에게는 사적으로 운영 중인 기차역이 하나 따로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기차역. 특별한 사람들만 이용 가능한 철로 없는 기차 노선.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라 불리던 탈출한 흑인 노예들의 비밀 도주로. 그들을 숨겨주던 장소인 '정거장' 중 하나가 바로 발렌타인 힉스의 집이었다. 

흑인 노예들의 탈주로, 지하철도와 정거장 

흑인 한 사람이 숲을 헤치고 죽을 힘을 다해 달아나고 있었다. 저 멀리 노예 사냥꾼으로 보이는 사내가 추격 중이었다. 갑자기 큰 너와나무 집 문이 열리더니 집주인이 흑인 노예에게 얼른 안으로 들어오라 했다.

앞서 달리던 노예가 눈앞에서 사라지자 노예 사냥꾼은 틀림없이 집안으로 숨어 들어갔을 거라고 짐작하고 문을 두드렸다. 주인을 밀치고 들어가 온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흑인 노예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가구 뒤에 숨겨진 비밀 계단을 통해 이미 그 집의 다락방으로 숨겨졌기 때문이었다. 

남부 노예주(Slaves States)에서 캐나다까지 비밀 지하철도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노선과 역들을 가지고 있었다. 너와집 주인이자 제리코의 지하철도 역장인 발렌타인 힉스도 그 중 하나였다. 힉스는 숨겨주었던 노예가 '롱아일랜드 사운드'라 불리는 섬의 북쪽 바다를 무사히 건널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전해진다.
 
엘리아스 힉스의 지하철도 정거장 2층 다락으로 향하는 숨겨진 비밀 계단으로 탈출 노예를 숨겨주었다. 지금은 스테이크하우스가 되어 일부 증축되었다. 올드제리코턴파이크 상에 있다.
엘리아스 힉스의 지하철도 정거장2층 다락으로 향하는 숨겨진 비밀 계단으로 탈출 노예를 숨겨주었다. 지금은 스테이크하우스가 되어 일부 증축되었다. 올드제리코턴파이크 상에 있다. ⓒ 장소영

지금은 스테이크 하우스로 바뀐 발렌타인 힉스의 집 앞에 섰다. 

"이런 역사적인 집은 저 멀리 떨어진 곳 어디에서 역사 부지로 잘 보존되어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러게나 말이다. 교회를 가고, 대형 한국 마켓에 장보러 가고, 맨해튼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타러 다니던 길, 동서남북을 잇는 두 개의 고속도로와 세 개의 대로가 교차하는 작은 틈새에 낀 역사 부지라니. 딸아이의 말에 나도 마음이 복잡해 졌다. 역사를 좋아하는 딸은 나의 좋은 길동무이다. 길도 잘 찾고, 표지판도 잘 찾고, 운전하는 내 대신 사진도 곧잘 찍는다.

미국의 2월은 '흑인 역사의 달'이다. 우리가 늘 다니던 길목에도 '지하철도'로 사용되었던 집이 있으니 한번 찾아가보자는 내 제안에 조금 들떴던 모양인데, 손바닥만 한 작은 땅조차 온전히 보존되지 못하고 모텔(Inn)과 주유소, 현대식 빌딩이 땅을 잘라먹고 들어앉아 있으니 딸아이가 조금 실망한 듯했다. 

발렌타인 힉스 일가가 살던 때의 제리코도 전통과 변화가 공존했다. 큰 길들의 교차점에 자리했던 장인의 집도 오래 전부터 여행객을 맞아 들이곤 했다. 장인은 나그네에게 돈을 받지 않고 그저 재워주고 먹여주었다고 한다. 따뜻하게 대접받은 이들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얼마간의 돈이라도 집안 구석에 슬며시 놓고 갔고, 장인은 이런 돈을 따로 모아 여러 곳에 신앙 공동체의 집(Meeting House)을 지어나갔다. 

발렌타인 힉스의  친척 어르신이자 그의 장인, 퀘이커 공동체의 유명한 지도자 '엘리아스 힉스' 이야기다. 장인과 사위는 여러모로 한마음 한뜻이었다. 엘리아스 힉스의 집과 일가가 운영하던 밀러리지인(The Millerridge Inn), 사위인 발렌타인 힉스의 집이자 가족이 운영했던 메인 메이드 인(Maine Made Inn), 그들과 함께 노예제 폐지의 신념을 가졌던 제리코 퀘이커 공동체는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 노예를 돕고, 노예 해방과 자립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롱아일랜드의 중요한 지하철도 마을이었다. 
 
밀러리지 인과 제리코 역사지구  발렌타인의 장인인 엘리아스 힉스가 운영하던 밀러리지인은 밀러리지 빌리지라는 이름으로 운영중이다. 탈출 노예를 숨겨주던 지하철도와 퀘이커 묘지는 106번 도로에서 올드 제리코 턴파이크로 들어가야 입구를 찾을 수 있다. 구글맵에 정정을 요청하였다. 올드 제리코 턴파이크 입구에 어떤 유적이 있는지 설명해 놓은 표지판이 있으나 대로에 있어 쉽게 읽기는 어려운 편이다. 올드 제리코 턴파이크로 들어서는 길안내 정도의 역할이다.
밀러리지 인과 제리코 역사지구 발렌타인의 장인인 엘리아스 힉스가 운영하던 밀러리지인은 밀러리지 빌리지라는 이름으로 운영중이다. 탈출 노예를 숨겨주던 지하철도와 퀘이커 묘지는 106번 도로에서 올드 제리코 턴파이크로 들어가야 입구를 찾을 수 있다. 구글맵에 정정을 요청하였다. 올드 제리코 턴파이크 입구에 어떤 유적이 있는지 설명해 놓은 표지판이 있으나 대로에 있어 쉽게 읽기는 어려운 편이다. 올드 제리코 턴파이크로 들어서는 길안내 정도의 역할이다. ⓒ 장소영

영국 정부의 탄압을 심하게 받던 퀘이커 교도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와 일부가 롱아일랜드에 정착했다. 신앙과 신념, 양심의 자유를 따라 살기 원했던 그들에게 롱아일랜드는 언약의 땅(Promise land)처럼 여겨졌다.

마을이 설 때마다 성서의 지명을 따라 제리코(Jericho, 여리고), 베스페이지(Bethpage, 벳바게), 예루살렘 같은 이름을 붙였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 여겼기에 그들은 남녀의 동등은 물론, 인디언이나 타인종과도 우애 있게 지냈다. 또한 사람을 노예로 소유하려 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노예된 자들의 자유를 도왔다. 

맞다. 한국에서는 건강식 브랜드로 알려져 있고, 우리 아이들이 즐겨 먹는 아침 오트밀 상자에 그려진 검은 옷을 입은 사람, 그들이 퀘이커 교도이다. 미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퀘이커 미팅하우스도 롱아일랜드에 있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퀘이커 친우회 미팅하우스 공식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되는 퀘이커 교인들의 미팅하우스이다. 그들은 '교회'라고 부르지 않고 만남의 집이라고 한다. 롱아일랜드 북쪽 해변 글렌 코브에 위한다.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퀘이커 친우회 미팅하우스공식적으로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되는 퀘이커 교인들의 미팅하우스이다. 그들은 '교회'라고 부르지 않고 만남의 집이라고 한다. 롱아일랜드 북쪽 해변 글렌 코브에 위한다. ⓒ 장소영

링컨이 노예 해방을 선언(1863년)하기 200여년 전, 퀘이커교도들은 시작부터 그리 살았다. 노예 무역이 중요한 산업이었던 영국에서 눈엣가시로 여길 만한 사상이었다. 미국에서 퀘이커 교도들의 땅 펜실베니아 주도 일찌감치 노예해방법이 통과된(1780년) 자유주(Free State)였다. 

그들 중에서도 엘리아스 힉스는 흑인 노예 해방에 유독 열성이었다. 탈주로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자유의 몸이 된 흑인들을 교육하고(프랜즈 학교-1793년), 원조했으며(제리코-웨스트버리 자선협회 설립, 1794년), 뉴욕주에서 노예 해방법이 통과(1827년) 되도록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열정적인 연설에 감명을 받은 이들 가운데는 훗날 미국의 국민 시인이 되는 어린 시절의 월트 휘트먼도 있었다. 휘트먼은 그의 명시 '풀잎'에서 힉스의 강한 전달력을 따르려 했다고 한다. 

엘리아스 힉스는 제리코에만 머물지 않았다. 미국 내륙을 도는 순회 사역 여행을 다니며 노예 해방을 연설했고, 초기 퀘이커 신앙을 독려했고, 미팅 하우스들을 건축했다. 81세의 노구로 겨울 사역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 병마가 덮쳤다. 두 차례에 걸쳐 뇌졸중이 찾아온 것이다.

와병 중에도 그는 가족들이 노예제의 산물인 솜이불을 자신에게 덮어 줄까 봐 걱정했다 한다. 1830년 2월 27일, 엘리아스 힉스는  미국에서 온전히 노예들이 해방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마지막 숨을 거뒀다.
 
제리코 퀘이커 공동묘지 제리코 미팅하우스 곁의 공동묘지에는 제리코를 개척한 퀘이커 시먼스 일가를 비롯 힉스 가족들의 묘소도 함께 있다. 엘리아스 힉스 부부와 가족이 묘지 앞쪽에 나란히 영면에 들어있다. 오래된 표지판이 희미하게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라고 알려주고 있다. 아마도 근간에 다시 새겨진 듯한 엘리아스 힉스 가족의 묘비와 달리 세월에 닳아 잘 알아볼 수 없는 발렌타인 힉스 가족을 찾느라 꽤 애를 먹었다.
제리코 퀘이커 공동묘지제리코 미팅하우스 곁의 공동묘지에는 제리코를 개척한 퀘이커 시먼스 일가를 비롯 힉스 가족들의 묘소도 함께 있다. 엘리아스 힉스 부부와 가족이 묘지 앞쪽에 나란히 영면에 들어있다. 오래된 표지판이 희미하게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라고 알려주고 있다. 아마도 근간에 다시 새겨진 듯한 엘리아스 힉스 가족의 묘비와 달리 세월에 닳아 잘 알아볼 수 없는 발렌타인 힉스 가족을 찾느라 꽤 애를 먹었다. ⓒ 장소영

힉스 가족은 그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제리코 퀘이커 미팅하우스 곁의 퀘이커 묘지(Quaker Cemetery-Jericho Friend's Burial Ground)에 묻혔다. 엘리아스 힉스와 가족의 묘비는 묘지 앞쪽에 자리한 데다 이름도 뚜렷이 새겨져 있어 확인이 쉬웠다.

문제는 발렌타인 힉스의 묘비였다. 위치도 몰랐지만 묘비석에 새겨진 이름이 세월에 몹시 닳아버려 확인이 어려웠다. 얼마전 내린 폭설이 아직 채 녹지 않는 묘지를 딸아이와 함께 차례로 살펴나갔다. 봄방학이라 시간이 넉넉해 다행이었다. 역시 나의 재능 있는 파트너, 딸아이가 먼저 찾아내고 뛸 듯이 기뻐했다.

딸과 함께 지하철도의 두 역장님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였다. 종교의 역할은 뭘까. 대가 없는 일에 일생을 거는 신념은 어떤 걸까. 기독교 내의 교리나 현대 국가 제도에서 퀘이커의 신념은 여전히 논의되어야 할 부분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공익을 위한 '종교의 공적 역할'을 말할 때 퀘이커 교인들이 걸어온 길은 깊이 새겨 본받을 만하다.

탐욕으로 바삐 굴러가는 세상 문명 속에 그들은 이타적인 삶과 평화로운 질서를 추구하며 산다. 제도화된 종교를 유지하려 애쓰거나 권력과 결탁하지도 않는다. 법과 사회 제도 개선에 성서적 신념을 따라 선한 영향력을 끼쳤지만 정치집단이 되어 그들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각 사람이 '내면의 빛'을 따라 신념을 가지고 용감하게 행했지만, 영적인 교주로 군림하며 사회를 혼탁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엘리아스 힉스의 집 찾기 쉬운 곳에 있었음에도 눈에 띄지 않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사진 왼쪽으로 세 개의 대로를 잇는 새 길(나들목)이 생기면서 헐릴뻔 했으나 다행히 역사학자들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집과 터가 그대로 살아남았다. 지도앱도 잘못된 정보를 주고, 간판마저 떨어져 속상했다. 흑인 커뮤니티에도 중요한 터인데 여러 단체가 힘을 합해 잘 보존하고 알려졌으면 좋겠다. 힉스의 해방 노예 운동은 당시에 꽤 진보적이어서 복음주의 신앙 운동의 영향을 받던 퀘이커 형제들에게서 결국 '힉스파'로 분리되었다.
엘리아스 힉스의 집찾기 쉬운 곳에 있었음에도 눈에 띄지 않아 찾는데 애를 먹었다. 사진 왼쪽으로 세 개의 대로를 잇는 새 길(나들목)이 생기면서 헐릴뻔 했으나 다행히 역사학자들과 주민들의 노력으로 집과 터가 그대로 살아남았다. 지도앱도 잘못된 정보를 주고, 간판마저 떨어져 속상했다. 흑인 커뮤니티에도 중요한 터인데 여러 단체가 힘을 합해 잘 보존하고 알려졌으면 좋겠다. 힉스의 해방 노예 운동은 당시에 꽤 진보적이어서 복음주의 신앙 운동의 영향을 받던 퀘이커 형제들에게서 결국 '힉스파'로 분리되었다. ⓒ 장소영

찾기 힘들었던 것은 발렌타인 힉스의 묘비 뿐이 아니었다. 아직 건재하다는 엘리아스 힉스의 집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몇 안 되는 역사적인 건물과 현대 상업 건물이 있는 짧은 거리를 몇 번이나 오가도 찾을 수 없었다. 눈밭을 헤매느라 꽁꽁 언 아이의 손과 발을 녹일 겸 일단 인근 카페로 후퇴했다.

핫초코를 마시며 서운함을 달래는 아이에게 엄마가 꼭 찾아서 방학이 끝나도 다시 데려오겠다고 약속을 했다. 다음 날, 그토록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초록색 창틀의 2층집을 결국 발견했다. 어이없게도, 자동차로 지나면서는 집의 측면만이 보여 계속 지나치기만 한 것이다. 길 하나를 두고 장인과 사위의 지하철도 기차역이 마주하고 있었다. 

"가족과 교회가(신앙 공동체가) 한 마음이었다는 게 참 좋아. 부러워." 
 

아이의 말에 공감했다. 신념을 나누고 함께 움직이는 가족과 이웃이라니. 폰 하나씩 들고 흩어지는 요즘 세태엔 꿈같은 일이다. 다시 찾아간 묘소에는 하루 사이 언 땅을 뚫고 설강화(Snow Drop)가 많이 피어 있었다.

꽃말이 '희망'이라 했던가. 사람이 사람을 노예로 부리던 어렵고 힘겨웠던 시기, 목숨을 걸고 탈출한 흑인 노예들에게 희망이 되어주던 퀘이커 교인들. 그들이 영면한 자리에 참 잘 어울리는 꽃이었다. 
 
언 땅을 뚫고 희망을 피운 설강화(Snow Drop) 약자의 편에서서 나그네를 맞이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었던 퀘이커 선조들의 삶과 잘 어울리는 꽃인 것 같다. 지구촌 곳곳에 어려움이 가득하다. 이 어려움 속에서 희망의 꽃이 올라와 꺾이지 않고 피어나길 소망한다.
언 땅을 뚫고 희망을 피운 설강화(Snow Drop)약자의 편에서서 나그네를 맞이하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주었던 퀘이커 선조들의 삶과 잘 어울리는 꽃인 것 같다. 지구촌 곳곳에 어려움이 가득하다. 이 어려움 속에서 희망의 꽃이 올라와 꺾이지 않고 피어나길 소망한다. ⓒ 장소영

이제 우리 가족은 두 기차역을 지나 교회를 오고 간다. 길 위로 우뚝선 힉스빌역과 길 저편에 숨겨져 아는 사람의 눈에만 보이는 지하철도 힉스역 자리를 지난다. 

"우리는 이제, 움직이는 기차역이야."

'우리는 너무 편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 것 같다'는 딸에게 그렇게 말해 주었다. 전쟁으로 고통받고 여전히 억압속에 있는 지구촌 이웃들의 소식이 끊이지 않는 요즘, 고통과 신음으로 가득한 곳마다 희망의 싹이 올라와 꽃을 피우길.

오늘도 그들 곁에서 희망과 쉼을 주며 '움직이는 기차역'이 되어주는 봉사자들을 멀리서나마 응원해 본다. 더 많은 '움직이는 기차역'들이 세워져 함께 사람을 살리는 네트워크를 이루어가길 딸아이의 손을 꼬옥 잡고 기도했다. 
 
엘리아스 힉스와 사위인 발렌타인 힉스 엘리아스 힉스는 퀘이커 내에서도 흑인 노예 해방의 신념과 활동이 특출했던 인물이다. 결국 그의 지도력을 따르던 이들은 퀘이커 내에서 '힉스파'로 분류되었고 지하철도 활동과 노예 해방 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사위인 발렌타인 힉스 역시 마음을 모아 함께 활약했다. 동시에 그는 마을 우체국장과 롱아일랜드 철도 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 개발에 힘썼던 인물이다. 이 두 지도자를 중심으로 제리코-우드베리-웨스트버리 퀘이커 공동체는 노예였던 흑인들의 자립을 위해 교육 기관과 자선 후원 단체를 세워 물심양면 그들을 도왔다.
엘리아스 힉스와 사위인 발렌타인 힉스엘리아스 힉스는 퀘이커 내에서도 흑인 노예 해방의 신념과 활동이 특출했던 인물이다. 결국 그의 지도력을 따르던 이들은 퀘이커 내에서 '힉스파'로 분류되었고 지하철도 활동과 노예 해방 운동에 큰 역할을 했다. 사위인 발렌타인 힉스 역시 마음을 모아 함께 활약했다. 동시에 그는 마을 우체국장과 롱아일랜드 철도 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 개발에 힘썼던 인물이다. 이 두 지도자를 중심으로 제리코-우드베리-웨스트버리 퀘이커 공동체는 노예였던 흑인들의 자립을 위해 교육 기관과 자선 후원 단체를 세워 물심양면 그들을 도왔다. ⓒ 인터넷(위키) 갈무리
 

덧붙이는 글 | '올드 제리코 턴파이크'라는 짧은 길 위에 역사적인 건물과 묘지 입구가 연결되어 있으니 방문하실 분은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지도앱에 수정을 요청했으나 아직 '제리코 턴파이크'라는 대로상에 위치 표시가 뜨고, 엘리아스 힉스 하우스도 잘못된 정보가 기재되어 있습니다.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게재됩니다.


#흑인역사의달#퀘이커#엘리아스힉스#발렌타인힉스#지하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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