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민 문제로 시끄러운 미국에서, 3월 여성의 달에 의미 있는 영화 하나가 개봉했다. 바로 여성 이민자이자, 가톨릭 교회에서 '이민자의 수호성인(Patroness of Immigrants)'으로 추대된 최초의 미국인 카브리니에 대한 영화 <카브리니>이다.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삶을 살아내는 이가 있다. 수녀 중에 그런 사람을 꼽으라면 아마 '마더 테레사'가 쉽게 떠오를 것이다. 마더 카브리니 역시 수녀로서 빈민을 위해 평생을 살았다. 그런데 둘의 활동에는 차이가 있다.
주어진 운명을 뛰어넘으라 알려준 수녀
마더 테레사가 가난한 이들, 죽음으로 향하는 이들의 곁에서 먹이고 돌보며 '주어진 가난과 운명을 받아들이도록' 도왔다면, 마더 카브리니는 '주어진 운명을 극복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람과 환경을 바꾸는 데 매진했다.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마주한 자세의 차이일는지도, 아니면 인도의 극빈 지역이라는 환경과 뉴욕의 처참했던 이민자의 환경이 다른 방향의 사역을 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부활절 40일 전, 예수 고난을 기억하는 주간을 '사순절(Lent)'이라 한다. 엄마가 그래서 영화를 보자는 줄 알았던 내 10대 딸은 영화에 꽤 감명을 받은 듯했다. 딸은 "이거 종교 영화가 아닌데?", 나는 "그렇다고 안 했는데?" 마주보며 웃다가 "유리관 속 안치된 카브리니를 만나러 가볼 테냐" 물으니 그러겠단다. 기차로 맨해튼에 도착해 40분은 더 지하철 타고 북쪽으로 가야 하는, 제법 먼 길을 딸과 함께 나섰다.
한국에서도 <사운드 오브 프리덤>(Sound of freedom)라는 영화가 지난 2월 개봉했다. 아동 납치와 성매매를 다룬 실화 기반 영화로 미국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영화 <카브리니>도 이 영화를 제작한 엔젤스튜디오 작품으로, 영화 엔딩곡 "Dare to be"를 안드레아 보첼리와 딸 버지니아가 함께 불러 화제를 모았고, 영화 음악을 한인 2세 진 백(Gene Back, 백진우) 감독이 맡아 주목을 받았다.
프란체스카 카브리니는 1850년 이탈리아의 작은 마을에서 팔삭둥이로 태어났다. 태어난 다음 날, 부모는 곧 죽을 것 같은 아기를 데리고 성당을 찾아가 세례부터 청할 정도로 몸이 약했다. 어릴 적에 의사는 그녀가 일찍 죽든지 평생 침대 생활을 할 거라 했고, 20대 초반 지원했던 수도회에서는 몸이 약한 그녀의 입회를 거절했다.
마흔 즈음 뉴욕에 갔을 때 주교는 연약한 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라 했다. 'Stay There. (거기 그냥 있어)', 그녀는 뭘 더 하려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평생 듣고 살았다. 그리고 평생 그 말들을 하나씩 뛰어 넘으며 살았다.
그녀는 침상에서 일어나 미국 전역에서 사역했고, 수녀회를 창립했고, 도시 빈민들의 하수구 집단촌에서 광산촌 탄광까지 몸을 사리지 않고 내려가 사람들을 구했다. 40대 초반, '길어야 3년'이라던 뉴욕 어느 의사의 진단에도 67세까지 살아내며 67개 고아원, 병원, 학교와 같은 시설을 설립했다.
어린 시절 익사할 뻔했던 경험 탓에 물 공포증이 심했지만, 대서양을 무려 26회 이상 건너 다녔단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이가 나타나 물에 빠진 자신을 건져주었듯, '지옥 같은 구덩이'에 빠져 사는 이들을 건져주고자 했다. 영화를 보고 있자니 성경(사무엘하 22장) 한 구절이 떠올랐다. '내가 주를 의뢰하고 적진으로 달리며 내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벽을 뛰어 넘나이다.'
영화는 빼어난 영상미와 꼼꼼한 영화적 장치로 그녀가 맞닥뜨린 난관과 심리를 훌륭히 묘사했다. 영화 속에서 카브리니는 자기를 따르는 수녀들을 격려하고 주변 사람들을 설득한다. 그때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영상 밖 관객에게 옮겨오며 마치 지금도 그때와 다르지 않고, 지금도 그때처럼 가난한 자, 고아와 과부, 열악한 삶의 터에 놓인 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말을 걸어 오는 듯했다.
원래 카브리니는 중국으로 가길 희망했었단다. 어린 시절, 카브리니 아버지는 인도와 일본, 중국을 다니며 선교했던 사비에르 성인 이야기를 딸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녀는 신부인 삼촌에게 얻어온 왁스 종이로 배를 접고, 주변에 널린 제비꽃을 꺾어 '선교사'인 양 종이배에 태웠다. 수많은 종이배를 띄워 보내며 언젠가 자신도 중국 선교사가 되어 성인을 잇길 꿈꾸었다고 한다. 그 꿈은 그대로 그녀의 이름이 되었다. 프란체스카 '사비에르' 카브리니라고.
그러나 교황 면담 뒤 보내진 곳은 이탈리아의 동쪽 중국이 아닌 서쪽 미국이었다. 카브리니가 이끄는 여섯 명 수녀는 1889년 봄, 뉴욕에 도착했다. 수녀들이 다른 이탈리아 이민자들보다 나은 점이라곤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정도였다.
상상 이상으로 '영어를 못하는 최하층 노동자' 이탈리아 이민 가족들의 삶은 처참했다. 고되고 위험한 노동 현장에서 죽어 나가는 노동자들이 흔했고, 병자와 고아들은 넘쳐났고, 집이 없는 이들은 도시의 거대한 지하 하수구에서 쥐보다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카브리니의 위대한 점은 여기서 시작된다. 그녀는 단지 고아들을 모아 씻기고 먹이는 활동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녀가 얼마나 타고난 조직가·전략가인지 당시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지 않았을까.
본국 사역 경험을 바탕으로 내적으로는 고아원, 병원, 학교, 공동체의 조직과 체계를 빠르게 갖추어 나갔고, 외적으로는 언론사, 가톨릭 조직, 사업가, 정치가, 심지어 이탈리아 오페라 가수도 찾아갔다고. 관료 조직과 매너리즘, 무관심과 무자비를 비난하고 싸우려 들기보다 그들 마음을 사로잡고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 아는 사람 같았다.
뉴욕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녀는 무려 350명에 달하는 어린이 합창단을 선보였고, 3년 만에 병원을 열었다. 카브리니 수녀회(성심회)가 운영하는 학교에서는 이민자들을 '미국화' 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았다.
이탈리아 음식, 문화, 언어, 노래로 민족 자긍심을 높이는 한편 영어와 미국 사회에 대해 가르치며 적응력을 키워주었다. 양국 문화에 익숙하고 양국을 사랑하는 이민자들이 되게 말이다. 카브리니도 그런 미국인이 되었다(1909년).
제단 아래 안치된 카브리니를 만나다
볕 좋은 3월 어느날, 딸과 함께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와 오래된 돌계단을 오르자 저만치에 카브리니 기념 성당(Saint Frances Xavier Cabrini Shrine)이 보였다.
마더 카브리니 고등학교의 부속 건물인 작은 성당에는 카브리니를 주제로 한 모자이크 창, 벽화, 선물 가게와 활동 당시의 물품이 전시된 작은 공간도 있다. 우리 모녀가 방문했을 때는 제법 많은 사람이 예배실에 모여 앉아 해설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었다.
1889년 뉴욕에 도착해 1917년 시카고에서 소천할 때까지 30년이 채 안 되는 기간동안 뉴올리언즈, LA, 필라델피아, 덴버 등 미국 각 지역은 물론 브라질, 아르헨티나, 프랑스, 스페인에까지 기관들을 세워갔다니 놀랍기만 하다.
1931년, 이장을 위해 무덤이 발굴되었을 때 시신의 일부를 제외하고 부패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절차에 따라 보존 처리 후 유리관에 안장하는 일이 가능했다고 한다. 현장에는 150cm 정도의 작은 체구가 유리관에 누워 영면에 들어있었다. 사망 직후 밀랍으로 본을 떠 두었다는 그녀의 얼굴은 평안해 보였다.
카브리니를 알고 나서 돌아보니 미국 곳곳에 그녀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병원, 학교, 거리, 보육원, 성당, 유명 공원에서 쉽게 그녀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제 연방 공휴일에도 카브리니의 이름이 붙기 시작했다.
2020년, 콜로라도주에서는 10월 연방 공휴일인 '콜럼버스 데이'가 '카브리니 데이'로 대체되었다. 같은 이탈리아인이지만 노예 무역상이자 정복자인 콜럼버스보다 콜로라도주 덴버의 탄광촌을 중심으로 헌신과 섬김을 보여준 카브리니를 기리기 위해서라 한다. 마침 그녀가 미국 시민이 된 달도 10월이다.
여자들이 뉴욕 빈민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사역을 포기하라는 주교에게 카브리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수 부활을 처음 알린 이는 여성인 막달레나였지요. 그녀가 무언가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어요."
카브리니와 성심회 수녀들이 처음 뉴욕에 도착한 날은 3월 31일이었다. 영화가 개봉한 올해 부활 주일도 3월 31일이다. 제작사가 일정을 맞춘 것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살아가는 '체구 작은 이민자 여성'인 딸과 내게는 이번 부활절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기념 성당 방문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타임스퀘어 근처에서 뉴욕의 랜드마크인 '희망(HOPE)' 조형물을 봤다. 문득 영화 속 카브리니가 한 말이 떠올랐다.
"자매님들, 우리가 희망의 제국을 지으려면 뉴욕부터 정복해야겠어요!(If we are to build an Empire of Hope, my sisters, it seems we must first conquer New York. )"
별명이 엠파이어 스테이트(Empire State)인 뉴욕에서 카브리니는 희망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다만, 초고층 건물이 아니라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으로 말이다.
'피난처 도시' 뉴욕으로 이주민이 몰아쳐 들어오고 있는 요즘, 전략와 헌신이 모두 필요한 이때에 카브리니 같은 지도자를 찾기 힘들다는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아니다, 생각하면 당시에도 상황은 높은 벽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남은 분량은 작은 우리들의 몫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분관인 클로이스터(The Met Cloisters)에 들렀다가 카브리니 기념 성당(Saint Frances Xavier Cabrini Shrine)을 잠시 방문해 보길 권합니다. 허드슨 강을 낀 언덕위 고성(古城) 박물관은 봄 정원이 유달히 아름답습니다. 15분 정도 허드슨 강의 멋진 뷰를 따라 언덕을 내려가면 성 카브리니 기념 성당에 닿을 수 있습니다.
- 성 카브리니 기념 성당에서 온오프로 공개된 정보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https://cabrinishrinenyc.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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