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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기, 네 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
 해방 후 다시 모인 조선어학회 구성원들. 1945년 11월 13일에 촬영된 사진에서 앞줄 왼쪽 두 번째가 이병기, 네 번째부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 한 명 건너 정태진, 가장 오른쪽이 김윤경이다.
ⓒ 한글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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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을사늑약과 경술국치가 대한제국의 국권을 탈취한 강도행위였다면, 조선어(한국말)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처사는 조선민족의 얼을 파괴하려는 모살행위였다. 이희승은 이른바 세속적인 출세주의자들이 기피하는 조선어를 연구 테마로 정하고 일관하여 이 길을 걸었다. 나라는 비록 빼앗겼지만 말과 글을 지키면 한민족의 강인성으로 보아 언젠가는 국권을 회복할 수 있으리란 믿음 때문이었다. 

일석 선생은 조선어학회에의 활약과 함께 또 하나의 학회를 주도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이듬해 1931년 선생은 주로 조윤제 등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 졸업생과 손을 잡고 조선어문학회를 창립하여 <조선어문학회보>를 간행하였다. 조선어학회에 관여한 것이 국어학연구에 대한 실천적 측면의 기여라고 한다면 조선어문학회의 창립과 이 학회를 중심으로 한 활동은 국어학연구에 대한 이론적 측면의 연마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일석 선생은 국어·국문에 대한 실천적 연구 이외에도 국어학 연구의 방법론을 다듬는 작업을 비롯하여 국어의 본질과 그 역사에 관련되는 업적을 내기도 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이 모두 국어학의 이론적 측면의 기초 작업을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석 1)

총독부의 우리말 말살 책동이 구체화되면서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광문회(光文會)가 조직되고 우리말 사전 편찬이 논의되었다. 경비문제로 빛을 보지 못하다가 1921년 조선어연구회가 조직되고, 1929년에는 보다 구체화되었다. 장지영·이병기·권덕규·이상춘·신명균·김윤경·최두선 등 사립학교 교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1931년 1월에 '조선어학회'라 개칭하였다. 이희승도 참여, 간사로 선출되어 해방 시기까지 계속 중임하였음을 앞에서 소개한 바 있다. 

이에 앞서 1929년 각계 인사 108명으로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서민호·김도연·김양수·최순주 등이 이끌던 흥업구락부의 자금지원으로 활동이 가능했다.

사전 편찬을 위해선 무엇보다 맞춤법의 통일과, 다음으로 표준어 사정 및 외래어 표기법 통일이 급선무였다. 우리는 1930년 12월 총회에서 맞춤법 통일안 제정위원 12명(권덕규·김윤경·박현식·신명균·이극로·이병기·이윤재·이희승·장지영·정열모·정인선·최현배)를 선출해 원안을 만들었고, 1932년 총회에서 6명(김선기·이갑·이만규·이상춘·이세정·이탁)을 추가로 선출해 심의작업에 들어갔다. (주석 2)

1936년 10월 28일 한글반포 490돌 기념일에 인사동 천향각에서 각계 인사 1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정한 표준말 발표식을 가졌고, <사정한 조선어표준말 모음>이란 표준 어휘집을 간행하였다.

지역적·사회적 제약을 받지 않고 공통적으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는 말을 공통어라 한다. 공통어는 자연발생적이며 실용적, 편의적인 것인데, 이 공통어를 이상적으로 정리하고 체계화하여 공통성을 높이고 규범성을 가지도록 한 인공적인 말을 표준말이라 한다.

우리말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정리한 사정한 조선어표준말모음은 우리나라에서 표준말의 헌법적 존재로서, 우리말은 이 표준말모음의 발간에서 비로소 정연하게 정리되었다.

이 책은 본문이 4단으로 내리 짠 체제로 면수가 122면, 낱말과 낱말을 풀어 쓴 색인은 가로판으로 2단에 나누어 117면, 모두 239면으로 색인 면수나 본문 면수가 거의 비슷한 점이 이색적이다. 본문은 '첫째, 같은 말', '둘째, 비슷한 말', '셋째, 준말'로 구성되었다.

같은 말은 다시 소리가 가깝고 뜻이 꼭 같은 말과 소리가 아주 다르고 뜻이 꼭 같은 말로 나누어 사정하였다. 사정 어휘 수는 표준어 6,231, 약어 134, 비표준어 3,082, 한자어 100으로 총 9,547이었다. (주석 3) 

학자는 원래 고집이 세게 마련이지만, 그중에서도 유명한 고집쟁이로 최현배·신명균·이만규·김선기·정인섭 등을 꼽을 수 있다.(…) 나 역시 학문적인 면에서는 보통이 넘는 고집이어서 외솔(최현배–필자)와 나는 자주대립을 하곤 했다. 정인섭과도 자주 싸웠다. 우리뿐만 아니라 18명의 위원 간에는 사사건건 난마처럼 얽히곤 했다. 토의를 하는 중에 큰 소리와 삿대질이 오가는 것은 예사요, 심할 때는 목침이 날기도 했다. 

회의의 결론은 언제나 다수결에 의한 표결로 매듭지어졌는데, 일단 표결로 결정된 사항에 대해서는 누구나 뒷말 없이 따랐다. 토의가 끝나면 언제 삿대질을 했느냐는 듯이 화해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회합을 방청하던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감동하여 "모든 회의는 조선어학회처럼 해야 한다"고 말하곤 하였다. (주석 4)

주석
1> 고영근, <일석 선생과 국어학연구>, 앞의 책, 135쪽.
2> <회고록>, 121쪽.
3> 앞과 같음.
4> <회고록>, 12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딸깍발이 선비 이희승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이희승#이희승평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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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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