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하지만 고집은 있었던 아이
나는 1999년 안양에서 태어나 6살 때까지 부산 김해공항 근처 할머니댁에서 컸다. 이후로 다시 경기도 의왕으로 돌아와 유치원과 초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선생님 말을 잘 듣고 규칙을 준수하는 평범한 여자아이였다. 바닥에 쓰레기를 버리거나 손을 들지 않고 횡단보도를 건너면 큰일나는 줄 알았다. 놀이터에서 뛰어 놀기보다 집 안에 있기를 선호했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친구랑 키스를 하거나 서로의 가슴을 만져보기도 했다.
중학교에서도 비슷하게 바른 아이였다. 색조 화장품 쓰기는 나에게 매우 심각한 수준의 금기였다. 눈썹 숱이 없는 것을 콤플렉스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처음 눈썹을 그려본 것이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나는 학교 수업 시간을 새로운 지식을 배울 수 있는 시간으로 여겼다.
하지만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된 사립 여자고등학교에서는 조금 달랐다. 어떤 수업에서는 이미 봤던 수능특강 지문을 계속 다시 봐야했고 어떤 수업에서는 선생님의 화풀이 대상이 되는 느낌을 받아야 했다. 나는 혼자 자퇴를 결심했다. 배울 것이 없는 학교를 다닐 필요 없다는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 부모님이 반대하실 줄 몰랐다. 부모님과 이러저러한 갈등을 겪었고 결국 학교는 계속 다니게 되었다.
졸업 이후에 부모님이 그래도 학교 다니길 잘 했지 않냐고 얘기할 때마다 그때 내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며 동의하지 않았는데, 사실 자퇴했으면 고3때 사귀었던 여자친구를 만나지 못했을 거고 자퇴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엄마와 나
엄마가 초등학교 때 방과 후 플루트 발표회에 오지 않았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눈물이 난다. 부모님이 맞벌이였기 때문에 나는 학교가 끝나면 저녁 시간을 보내려 이곳저곳을 다녀야 했고 플루트 학교 방과후 교실도 그 중 하나였다.
하루는 몇 달간 연습했던 곡을 보여주는 발표회 날이었다. 내 차례가 오기 전까지 나는 엄마를 찾아 계속 두리번거렸다.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발표회를 마치고 나온 복도에서였다. 그 때 뒤늦게 달려와 복도에 서있는 엄마의 모습이 기억에 오래 남아있다. 이 일이 왜 그렇게 계속 기억에 남았을까?
중학교에 가서도 고등학교에 가서도 이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자동으로 눈물이 나왔다. 그럴 때 종종 나는 엄마한테 그때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며 얘기를 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지나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고 난 후 엄마랑 어렸을 때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엄마는 그때 내 플루트 발표회 때 못간 것이 "두고 두고 후회가 된다"고, 오랫동안 '그냥 조퇴내고 갈걸' 하는 생각을 했다고 얘기 해주었다. 이야기를 듣는데 내가 너무 바보 같았다.
나를 부산에 맡겨놓고 일하는 엄마를 보고 '일이 뭐라고 낳은지 얼마되지도 않은 애기를 떼어 놓고 사냐'며 독하다고 하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들의 상상과 달리 나는 부산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즐겁게 지냈다. 부모님이 맞벌이라는 사실은 나에게 그다지 결핍의 요인으로 인식되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있기를 좋아했고 학교 끝나자마자 엄마아빠가 보고싶어지지도 않는 보통의 아이였다. 누가 그렇게 맞벌이 엄마 죄책감 느끼게 하는 아이 상을 만들어내는지 모르겠다.
내 생각에 플루트 발표회의 기억이 나에게 그렇게 생생하게 남은 이유는 그것이 나에게 채워지지 않는 결핍으로 남아 있어서가 아니라 그것이 내가 엄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엄마랑 떨어져서도 잘 지내고 살갑게 애정표현을 하는 편도 아니었지만 열심히 연습한 플루트 소리를 좋아하는 엄마에게 꼭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뿐이다. 이때의 기억에 지금 눈물이 나는 건 아이의 사랑표현마저 자연스럽게 자신의 부족함과 죄책감으로 받아들이게 했던 맞벌이가정 여성들을 짓누른 부담이 야속해서, 그리고 그것도 모른 채 엄마의 죄책감을 키웠던 것이 미안해서다.
욕심나는 미래를 상상할 수 있게 해준 대학 여성주의 활동
대학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에 열심히 대외활동을 하고 자격증을 준비하면서 취업준비를 하는 친구들과 달리 나는 대체로 무기력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과 다른 어떤 미래를 위해 노력할 동기가 별로 없었다. 월세의 두 배 정도 되는 돈을 주는 빵집 알바를 하며 반지하 원룸에서 사는 생활에 만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미래에 대한 욕구도 딱히 없었다. 그런 나로 하여금 가끔이라도 의욕을 느끼고 다른 미래에 대한 욕심을 내도록 했던 것은 학내 여성주의 단체였다.
그곳은 대학이라는 사회의 성평등을 위한 활동을 하는 단체였고 나는 3년 반 동안 활동했다. 마지막 해의 경우에는 코로나 이후 <멀어져야 하는 시기의 연결>이라는 슬로건으로 한 해 활동을 기획했다. 돌봄이 중심이 되는 체제가 무엇이고, 왜 필요한지, 우리 안의 합의를 만드는 세미나도 진행했다. 요양서비스노조, 보건의료노조에 요청하여 간병노동, 간호노동 관련 간담회를 주최하기도 했다. 여러 집회와 시위에 연대하고 교내 성폭력 사건 처리와 젠더교육 기획, 재생산권 관련 사업을 진행했다. 단체의 인원이 늘면서 조직체계와 운영방식을 정비하기도 했다. 이 활동은 내게 무언가를 지속적으로 고민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을 줬다.
당시 나의 화두는 성과 돌봄이었다. 성폭력이 여성주의 운동의 주요 의제가 되어온 상황과 성폭력 상담을 하면서 마주칠 수밖에 없는 난제들은 성과 권력의 문제를 계속 생각할 수 있게 했다. '모욕을 줄 수 있는 권력은 어떻게 누군가의 손에 더 쉽게 들어갈 수 있는지, 다른 사람을 눈치 보게 하고 수치스럽게 하는 권위의 자리는 어째서 더 쉽게 누군가의 자리가 되는지' 그것이 특히 성과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한 생각은 한번 시작되면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이상한 결론이나 성공적인 회피에 다다르지 않는 이상 저절로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권위의 안팎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가 서로를 지긋지긋하게 만드는 돌봄 관계로 엮여있다는 점은 일상의 돌봄 그리고 제도화된 돌봄이 어떤 양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이에 대한 현재의 인식은 어떠한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끝없이 이어지게 만들었다.
나는 대학 여성주의 활동을 통해 했던 것을 계속해보고 싶어 대학원을 지원했다. 나는 성폭력을 고발하는 말이 사회가 요구하는 정당성을 깎아 먹는 식으로 밖에는 말해질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 자본의 권리와 나의 것을 동일시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상황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병을 돌보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나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라 다르게 세상이 생겨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만들고 싶었다.
달라져야 하는 상황이 무엇인지 더 잘 읽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의 다르게 하고 싶은 마음을 더 잘 읽고 싶어서 문학전공에 지원했다. 대학원을 준비할 때에는 내가 뭔가 세상을 다르게 하는 데 기여할 만한 것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대학원에서 하는 일은 그와 간단하게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나는 성실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모두에게 쓸모없다고 여겨져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게 노동
지금은 대학원을 다니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9시까지 도서관으로 가서 운 좋게 얻은 근로장학생 근무를 시작한다. 도서 대출이나 서고 정리를 할 때 말고는 대체로 책상에 앉아 자기 할 일을 할 수 있다. 한 달에 80시간 정도 근무한다. 내가 대학원생으로서 하는 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학교에서 마련해놓은 일을 하기, 내가 전공하는 학문의 규칙을 습득하려 노력하기, 자료를 읽고 이해하고 기억하기, 그것에 기반하여 자료가 무엇을 어떻게 보고 쓰고 있는지 판단을 내리기, 판단 내려진 내용을 머리속에서 계속 굴려서 무언가 다른 것으로 만들기, 그것을 글로 바꾸기. 그 과정에서 내가 규칙을 지키고 있는지 눈치보기.
나는 누군가 나에게 "대학원생으로서 하는 일이 노동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연구노동이 생산적이고 유용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회에 필수적인 노동이기 때문에 노동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비생산적이이거나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혹은 알려지지 않아 어떤 식으로도 여겨지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떠오른다.
코로나 시기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 공짜로 혹은 매우 적은 임금을 받고 하던 돌봄노동이라는 것이 '사회가 돌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는 걸 새롭게 깨달은 듯 필수노동이라는 이름표를 돌봄노동에 붙여주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어떤 일이 노동인지 아닌지가 사람들이 그것을 필수적이고 쓸모 있다고 인정해주는지 여부에 달려있어서는 안 된다. 나는 지금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일들도 노동으로 인정받아야 된다는 얘기보다 지금 무엇이 노동이고 무엇이 아닌지 분류하는 기준, 분류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싫다는 얘기를 하고 싶다.
어떤 사람들은 다들 힘들지만 꾹 참고 하는 일도 하지 않고 있으면서 힘들어 한다. 예를 들어 돈을 버는 일, 자신의 생계수단을 더 안정적인 것으로, 혹은 경쟁력 있는 것으로 만드는데 기여할 일, 상사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 업무의 마감 기한을 지키는 일, 세상이 자신이 원하는 미래에 가깝게 되도록 힘쓰는 일 같은 것, 노동으로 인정되는 일 말이다. 그런 것도 하지 않으면서 힘들다고 누워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힘을 어디에 들이고 있는 걸까? 질문을 다르게 할 수도 있겠다.
왜 우리는 그들이 힘을 들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걸까? 그것이 무엇인지가 우리가 알 수 있는 '지식'에 속하지 않아서 그럴 수 있다. 그것은 노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사적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그것은 노동이라고 하기에는 '가치'라고 불릴 수 있는 그 무엇도 생산해내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다. 나는 그것, 보이지 않고 말해지지 않는 그것을 읽고 싶다. 그리고 나의 깨어있는 대부분의 시간을 들이는 슬퍼하고 부끄러워 하는 일은 이를 위한 나의 노동의 일부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케로로는 공공운수노조 전국대학원생노동조합지부 조합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