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2월부터 주 1회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싣습니다.[기자말] |
복지관 어르신들과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하나에 하나'를 매번 강조한다. 하나의 문장에 하나의 정보만 들어간다는 것, 그 후 앞뒤로 살을 붙인다고 말한다. 이어서 내가 꼭 하는 말이 있다.
"제가 지금 어르신들이 이해할 수 있게 설명했나요?"
강의를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하는 말은 미묘한 뉘앙스로 달라진다. 그냥 '이해하셨어요?'라고 했을 때 만일 이해하지 못했다면 그건 듣는 사람 책임이 된다. '뭘 그렇게까지 확대 해석하냐'라고 할 수 있지만 어르신들 수업, 특히 할아버지보다 할머니가 많은 수업에서는 확대 해석이 아니다.
젠더 의식이 부족했던 시대를 지나온 할머니들은 유독 자기검열이 심하기 때문에 자칫 이해 못한 자신을 못났다고 생각해 버린다. 못난 존재가 되면 기껏 용기내어 신청한 글쓰기를 포기할 수도 있다.
반면 "제가 지금 이해할 수 있게 설명했나요?"라고 하면 이해 유무는 전적으로 강사 책임이다. 실제로 이렇게 약간만 바꿔서 물어보면 어르신들 표정이 더 편안해진다. 이해 안 됐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하신다. 본인이 못나서 이해 못한 게 아니라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하지 못한 강사 책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문장에 하나의 정보가 들어간다라는 설명이 이해씩이나 해야 하는 말인가? 물을 수 있다. 이 설명을 위해 매번 '오늘 아침에 일어나 복지관에 올 때까지 3~4시간 동안 있던 일을 써보세요'라는 간단한 숙제를 드린다. 접근하기 가벼운 소재라 그런지 다들 쓱쓱 써내려 가시지만 열에 아홉은 이렇게 나온다.
"아침에 일어나서 여기 오려고 준비를 해서 택시를 타고 복지관으로 왔다."
그러면 나는 '한 문장에 하나'에 의거해 문장을 아래와 같이 나눈다.
'아침에 일어났다 / 여기 오려고 준비했다 / 택시를 타고 복지관에 왔다.'
이렇게 나누면 어르신들 표정에 다들 느낌표가 딱 뜬다. '이해할 수 있게' 설명했나보다. 그러고 나면 살을 붙이기 위한 내 질문이 시작된다.
"다들 걸어오시던데 왜 택시를 타셨어요? 택시도 직접 잡으세요? 몇 시에 나오셨어요? 어머, 왜 그렇게 일찍 나오셨어요?"
내 질문에 맞춰 어르신의 글에는 이렇게 살이 붙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여기 오려고 준비했다. 우리집은 00동이라 00동 복지관까지 좀 멀다. 손녀딸이 8시에 택시를 잡아준다. 택시비는 내가 준다. 수업은 10시에 있지만 나는 꼭 8시에 택시를 잡는다. 그렇게 오면 30분이 걸린다. 그러면 복지관에서 한참을 기다린다. 기다린다고 해도 일찍 오는 게 좋다. 늦게 오려고 해도 자꾸 일찍 오게 된다.'
간단하고 평범했던 한 문장이 무려 아홉 문장으로 늘어났다. 만든 어르신도, 보는 어르신도 다들 신기해했다. 이 틈에 나는 한 번 더 확인해본다.
"제가 어르신들 이해할 수 있게 설명했나요?"
"그랴요. 이해 쏙 되게 설명했으요. 하나에 하나 하니 좋구먼."
함박웃음이 교실을 한번 채우고 지나간다. 이 웃음의 이유는 단연코 '이해했나요'와 '이해하게 했나요?'의 차이에서 나오는 거라고 믿는다.
'이해하게 했나요?'라고 질문하면 내가 쉽다고 어르신들도 쉬울 거라 지레 넘겨버린 건 아닌지, 이해하게 만들어야 하는 내 책임을 은근슬쩍 넘겨버린 건 아닌지 나부터 자기검열을 한다. 그러니 나를 위한 질문법이기도 하다.
내 수업에서는 앞으로도 "이해하셨어요?"가 절대로 세상 빛을 보지 못하게 봉인하려 한다. 강사로 서는 모든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문장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