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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탑골공원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불과 수개월 만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1919년 3월 1일 당일에 만세운동이 벌어진 도시는 경성을 비롯해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에 달하며, 3월 한 달 간 전국에서 1066회, 4월에도 698회의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3·1운동은 당시 전국 218개 군 중 211개 군에서 연인원 200만 명 이상이 참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제는 7500여명을 살해했고, 부상자는 1만 6000여명에 달했으며, 4만 7000여명이 체포되었습니다.

대전지역에서는 1919년 3월 16일부터 4월 1일까지 보름간 본정(인동)·유성·유천·치마(갈마)·가수원 등지에서 8차례의 시위가 있었습니다. 오늘은 대전지역 3.1운동에 나섰다가 고향에 조성된 국립묘지에 안장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3월 27일, 인동시장

한동안 대전지역 최초 3.1운동은 3·16인동만세운동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당시 그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시장은 '본정 시장' 또는 '대전장'으로 불렸는데, 이후 인동시장으로 불렸기 때문에 지금은 인동만세운동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3월 16일에 인동 쌀시장 앞 도로(전기안전공사 옆)에서는 '3·16 인동장터 독립만세운동 재연행사'를 진행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3월 16일에 인동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만한 증거는 발견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동 쌀시장 앞에 세워진 3·16인동장터만세운동기념비 앞면(왼쪽) 과 뒷면(오른쪽). 인동장터 만세운동 유공 수훈자로 기재되어 있는 이들 중 김직원과 박종병은 4월 1일 만세운동 관련자이고, 나머지는 3월 27일 만세운동 관련자들이다. 3월 27일 만세운동 관련자들 중 대통령 표창은 받은 김완수는 제외됐다. 대전 최초의 만세운동은 3월 16일 유성시장 만세운동인데, 그 동안 3·16인동장터만세운동으로 기념해 오면서 기념비에도 ‘대전 최초 만세운동’이라고 새겨져 있다.
인동 쌀시장 앞에 세워진 3·16인동장터만세운동기념비 앞면(왼쪽) 과 뒷면(오른쪽). 인동장터 만세운동 유공 수훈자로 기재되어 있는 이들 중 김직원과 박종병은 4월 1일 만세운동 관련자이고, 나머지는 3월 27일 만세운동 관련자들이다. 3월 27일 만세운동 관련자들 중 대통령 표창은 받은 김완수는 제외됐다. 대전 최초의 만세운동은 3월 16일 유성시장 만세운동인데, 그 동안 3·16인동장터만세운동으로 기념해 오면서 기념비에도 ‘대전 최초 만세운동’이라고 새겨져 있다. ⓒ 임재근
  
현재까지 확인된 바로는 인동시장에서 처음으로 만세운동이 벌어진 날은 3월 16일이 아닌 3월 27일입니다. 3월 27일 대전장에서는 김창규, 조상련, 윤명화, 김완봉 등의 주도로 200명의 군중들이 합세해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김창규 등은 만세운동과 함께 김정철 지사가 사전에 경성에서 가져온 조선독립신문, 독립선언서 등을 등사기로 인쇄해 건네준 300여 매의 유인물을 군중에게 배포하기도 했습니다. 일경이 곧바로 출동해 주동 인사들을 체포했고, 조상련 등 6명이 재판에 회부되었고, 김완봉, 김정철, 김완수도 각각 별건의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고초를 겪은 김완봉(애족장, 1995), 김완수(대통령표창, 2020), 김정철(애족장, 1990), 김창규(애족장, 1990), 조상연(애족장, 1990), 박종호(애족장, 1993), 소홍규(애족장, 1990), 윤명화(애족장, 2009) 8명은 국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 및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고, 김성현만 서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들 중 김창규 지사와 조상연 지사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1묘역 61호와 독립유공자 제2묘역 437호에 각각 안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국립묘지 밖에 개별적으로 안장되어 있거나 묘소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김정철 애국지사의 묘. 아래 보이는 마을, 대전 동구 삼괴동에 김정철 지사의 생가가 있었다. 김정철은 경성에서 가져온 조선독립신문, 독립선언서 등을 등사기로 인쇄해 300여 매를 김창규에게 전달해 3월 27일 만세시위에 배포하게 했다.
김정철 애국지사의 묘. 아래 보이는 마을, 대전 동구 삼괴동에 김정철 지사의 생가가 있었다. 김정철은 경성에서 가져온 조선독립신문, 독립선언서 등을 등사기로 인쇄해 300여 매를 김창규에게 전달해 3월 27일 만세시위에 배포하게 했다. ⓒ 임재근
 
실제 대전지역 최초의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6일, 당시 충청남도 대전군 유성면 유성시장에서 벌어졌습니다. 이날 이권수와 이상수는 유성시장에 나가 깃발을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고, 300명의 시장 군중들도 이에 호응해 만세운동에 합류했습니다.

헌병들이 달려들어 이권수, 이상수를 비롯해 8명을 체포했고, 그 중 이권수, 이상수가 재판에 회부되어 1년 2개월 간 옥고를 겪었습니다. 이상수와 이권수는 당시 유성면 지족리, 같은 마을에 거주했던 16촌 관계였습니다. 3·16유성시장 만세운동의 주역, 이권수 지사와 이상수 지사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2묘역 589호와 독립유공자 제5묘역 190호에 각각 잠들어 있습니다.

3.16인동만세운동은 없다
 
 3·16유성시장 만세운동의 주역, 이권수 지사와 이상수 지사의 묘. 1996년 10월 9일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이권수 지사는 독립유공자 제2묘역 589호에, 2017년 7월 16일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이상수 지사는 독립유공자 제5묘역 190호에 안장되었다.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해 들어오는 독립운동가의 묘가 증가하자 기존 8평 안장을 유지하지 못하고 독립유공자 제5묘역부터는 1평 규모로 안장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이권수 지사와 이상수 지사의 묘와 묘비의 크기가 다르다.
3·16유성시장 만세운동의 주역, 이권수 지사와 이상수 지사의 묘. 1996년 10월 9일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이권수 지사는 독립유공자 제2묘역 589호에, 2017년 7월 16일에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한 이상수 지사는 독립유공자 제5묘역 190호에 안장되었다. 대전현충원으로 이장해 들어오는 독립운동가의 묘가 증가하자 기존 8평 안장을 유지하지 못하고 독립유공자 제5묘역부터는 1평 규모로 안장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이권수 지사와 이상수 지사의 묘와 묘비의 크기가 다르다. ⓒ 임재근
 
특히 4월 1일은 인동(본정)과 유성뿐 아니라 갈마(치마)까지 대전의 독립만세운동 중에 가장 격렬하고 활발하게 전개되어 대전지역 3․1운동에서 최대 절정의 날이었습니다.

김직원, 박종병의 주도로 인동(본정) 시장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고 이에 장날 모인 군중들이 호응해 시위 대열은 수백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일제는 경찰뿐 아니라 대전헌병분대의 헌병과 보병 80연대 병사들까지 출동해 발포했고, 4명이 사망하고 11명이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날 만세운동으로 김직원과 박종병이 체포되어 징역 10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습니다. 김직원 애국지사는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4묘역 143호에, 박종병 애국지사는 고향마을에 잠들어 있습니다. 같은 날 유성에서 약 70~80명의 군중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유성헌병주재소을 공격했습니다. 진압하던 헌병들이 시위 군중들을 향해 실탄을 발포하면서 최승복을 비롯한 시위 참여자 8명이 사망하고, 홍병두를 비롯해 32명이 헌병들에게 체포되었습니다.

홍병두는 다행히 재판에 넘겨지지는 않았지만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홍병두는 1920년 3월 8일,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다 일경에 붙잡혔고,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홍병두 지사는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3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2묘역 887호에 안장되었습니다. 4월 1일 시위현장에서 순국한 최승복도 독립유공자 제2묘역 625호에 잠들어 있습니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2묘역 625호에 안장된 최승복의 묘. 최승복은 1919년 4월 1일 시위현장에서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망했기 때문에 순국선열로 불린다.
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2묘역 625호에 안장된 최승복의 묘. 최승복은 1919년 4월 1일 시위현장에서 일본 헌병의 발포로 사망했기 때문에 순국선열로 불린다. ⓒ 임재근
 
3·1운동 과정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순국한 이들 중에는 신원이 확인되지 않아 서훈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이들도 많습니다.

8공훈을 인정받아 서훈을 받은 애국지사와 순국선열들을 기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름조차 남기지 못한 이들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3.16인동만세운동'처럼 확인되지 않은 불명확한 근거로 잘못된 사실을 기념하는 일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3.16인동만세운동'과 관련해 대전현충원에 안장된 이가 단 한명도 없을 뿐만 아니라, 서훈은 고사하고 재판을 받은 경우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불명확한 근거로 기념해 온 '3.16인동만세운동'을 근거로 서훈을 신청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서훈을 받지 못했습니다. 독립운동가들을 찾고 그들의 정신을 기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짜 독립 운동가가 만들어지는 것을 방지하는 것도 후대들의 역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
공훈전자사료관(https://e-gonghun.mpva.go.kr/)
대전직할시사편찬위원회, 『대전시사 제1권』, 1992.
대전광역시, 『대전100년사 제1권』, 2002.
김갑동, 김진호, 『3·16 대전인동장터 독립만세시위운동』, 대전동구문화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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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교육문화센터 교육연구소장(북한학 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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