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만 켜면 외환위기와 금모으기 소식이 나오고 국가부도 경고음이 빨갛게 울리던 1997년, 우리 가족에게도 경고음이 울렸다.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소규모 공장은 일을 주던 대기업들이 줄줄이 망하면서 한순간에 망해버렸다. 집안 가장의 사업에 보증을 섰던 가족들도 줄줄이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지금도 생생한 기억은 내가 7살 때 서울 성산동 우리집에 공무원들이 찾아와 빨간딱지를 붙이고, 몇 분 전에도 자연스럽게 열었던 냉장고를 열지 못하게 하고, 할머니가 울며불며 집밖으로 끌려 나가던 장면이다. 집이 경매에 넘어가면서 나는 아지트였던 집 앞 만화책방과 학교 바로 옆 성미산자락에서 멀어져 서울 신길동으로, 인천 연희동으로 이사를 갔다.
"그때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어 함께 망해버린 엄마는 자기도 모르는 빚이 2억 생겼다. 보증인 이름에 엄마가 올라가는 순간, 사업이 망한 순간, 수번의 기회가 있었을 텐데도 아빠의 가족들은 아무도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실질적인 생계부양자였던 엄마는 빚을 갚으러 나를 옆집에 맡겨두고 보험을 팔러 다녔다. 아빠는 여전히 일하지 않았다. 어느날 엄마는 결심했다. '더이상 이렇게 살다가 죽겠다고' 나를 데려가고 싶었지만 집도 절도 없이 빚만 2억이었다.
외할머니도 이혼한 딸을 외면했다. 출가외인이라는 이유였다. 엄마는 결국 딸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신용불량자를 받아주는 회사는 없었다. 새벽엔 목욕탕에서 자고 낮엔 음식점에서 일하면서 몇 년을 보냈다.
현실이 너무 괴로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만화책과 S.E.S.가 다 인줄 알았던 나는 컴퓨터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면 컴퓨터 학원을 갔고 학원을 마치면 문구점 앞에서 동전뽑기를 돌리고 만화책방에 들러 만화책을 빌려 집에 갔다. 학교-컴퓨터학원-만화책방-집. 나의 초등학교와 중학교시절은 이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 가끔 친구네 집에서 친구들과 놀기도 했지만, 컴퓨터학원과 만화책방에 가는 것은 거의 빼놓지 않는 일과였다.
컴퓨터학원에서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자격증시험에 도전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학원 컴퓨터에 새로운 게임이 깔리면 수업 후 게임을 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집에 와서는 만화책이나 컴퓨터 게임으로 밤을 지새는 날이 많았다. 그때 몸을 너무 축내서 지금 체력이 좋지 않은 건가 싶기도 하지만,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던 때였고 나에게는 제일 즐거웠던 기억들로 남아있다. 가족 모두가 풍파를 겪던 시기에 내가 TV, 컴퓨터게임, 만화, 대중문화에 빠져 있었던 건 현실이 너무 괴로워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청소년 시절 내내 나는 할아버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아무 말을 할 때 마다 괜한 반항심에 대들고 싶은 마음이 올라왔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부르셨다. 왜 나를 불렀는지 의아했다. 안방에 앉으니 다짜고짜 나에게 "고등학교는 실업계 고등학교로 가고, 빨리 졸업해서 은행 취업해라. 그리고 시집가라"라고 말했다.
왜 내 미래를 할아버지가 정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짜증이 났다. '내 인생은 내가 사는건데'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실업계 고등학교는 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할아버지가 정해준 미래대로 1이라도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아침 8시에 등교해서 밤 10시에 하교했다. 토요일에도 학교를 갔다. 자연스럽게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을 꿈꾸기보다는 내 성적에 맞춰서 어떻게 더 좋은 대학을 가고 남들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되었다. 딱히 답이 없는 고민을 계속하다보니 괴로워서 여느 때보다도 잠을 많이 잤다. 수업시간에 나를 깨우다 못해 짝꿍이 울 정도였지만, 나는 몸이 무거워서 일어나지 못했다.
20살의 시작은 학자금대출과 아르바이트
25세 이전의 내 삶은 정말 돈, 돈, 돈이었다. 그 시작은 대학교 입학부터였다. 바라지는 않았지만 사회의 흐름에 맞춰 서울수도권 4년제 대학교를 목표로 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합격문자를 받자마자 좋은 소식을 공유하기 위해서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다. 할머니가 하는 말 "돈 없으니까 대학을 가지 않으면 어떠니." 생각지 못한 답변에 당황했다. 우리집이 가난한 것은 알고 있었다.
집나간 아빠와 하릴없이 누워있는 할아버지와 나를 할머니가 부양하고 있었다. 큰고모의 집을 청소하고 친척동생을 돌보며 월 30~40만원 생활비로 우릴 부양했다. 고등학교 때, 남들은 다 학원, 과외 하는데 나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짜증나서 학원을 보내달라고 한 적이 있다. 할머니는 없는 살림에도 빚을 져가면서 몇 달간 학원을 보내줬지만 그것도 오래가지 못했다. 나중에는 학원비가 밀려서 원장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그래도 꿋꿋하게 학원을 보내주는 걸 보며 '내가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나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대학을 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하다니.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았다. 대학을 안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인터넷에 검색해보기도 했다. 투명가방끈모임같은 곳들이 나왔다. 대학에 가지 않아서 차별받고, 살기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대안을 찾지 못한 나는 학자금대출을 받았다. 첫 학기는 350만원이고 입학금이 100만원이었다. 450만원을 빚지고 계산해봤다. 1년 다니면 800만원, 2년 다니면 1500만원, 4년 다니면 2900만원.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채무자가 되었다.
할머니가 뇌출혈로 쓰러지시면서 나는 19살에 엄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친가와 연락이 줄어들었으며 엄마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동안은 가사노동과 생계부양을 모두 할머니가 하던 집에서 너무나 편안한 삶을 살아온 것이다. 설거지, 청소, 밥 해먹기까지 모든 것들을 처음 해야 했지만, 엄마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이정돈 당연히 해야지', '이것도 못하니까 한심하다'라는 이야기만 들었다. 당시 엄마는 성당에서 일하면서 방 한켠을 얻어서 있다가, 나를 돌보기 위해 무리해서 집을 전세로 얻었다. 생활비는 당연히 말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아르바이트를 쉴 수 없었다. TV에 나오는 그런 활기차고 자유로운 대학생활을 하려면 다 돈이 있어야 된다는 걸 미처 몰랐다. 엄마와의 갈등으로 집을 나오고 싶었고 학자금대출과 생활비에 대한 압박으로 대학생활은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갔다.
어느날 학교에서 흥미로운 대자보를 발견했다. 공부를 잘하지 못해도 장학금도 주고, 원고료도 주는 동아리가 있다는데, 신입부원을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학교 신문사였다. 글은 잘 쓰지 못했지만 들어가면 글쓰는 방법을 가르쳐줄거라고 생각하며 신청서를 넣었다. 첫 취재에서 반값등록금 대학생 때려잡기를 보았다. 4대강 기사를 쓰자 신문사에 압력이 들어왔다. 부천연대를 만나면서 다양한 활동을 알게 되었고 좀 더 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항상 경제난에 시달렸고 남들보다 빨리 취업을 해야 했다.
내 첫 직장은 합리적 소비와 채무자에게 가혹한 사회에 문제제기 하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사회적기업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20대 초반의 나는 '왜 우리는 항상 가난하고, 왜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망해야만했고, 저렇게 무기력한지'가 궁금했다. 그곳에서 일하면서 만들어진 적당한 소비습관 덕분에 엄마는 "첫 직장을 잘 갔다"라고 이야기하곤 하신다. 2014년 세월호 사건이 터지면서 회사사정이 갑자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국가적사건이 터지면서 각 지자체 등에서 사회서비스에 더 이상 예산을 투여하지 않았고, 교육은 줄줄이 취소되었다. 용역사업이 주 수입원이었던 우리 회사는 직격탄을 맞았다. 결국 월급을 사다리타기 해서 받을 지경이 되었고, 나는 그곳을 나왔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교집합을 찾아서
나는 지자체에 청년 대상 뉴딜일자리를 관리하는 팀에 23개월 계약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청년들이 일자리에 진입하면서 필요한 것을 면밀하게 살피고, 생활가능한 임금을 주면서,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려고 진정성 있게 노력하는 곳이었다. 참여자의 생활임금이 오르면 다함께 축하파티를 하고, 사업 설계부터 청년 참여자가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는 일수를 다 계산해서 시작하고, 일터를 처음 만나는 구직자들은 채용과정동안 계속 불안해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일정을 진행하였다. 담당 공무원이 급여를 늦게 지급하려고 하자 민원을 넣어 급여를 제때 지급하게 하고, 노동자로서의 권리가 무엇인지 교육하는 등의 일에 동참했으며, 사업주들에게 고용승계를 요구하였다.
내가 하는 일의 가치가 누군가의 인생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으며, 나 혼자가 아니라 같이 하면 할 수 있구나 라는 효능감을 가지면서 일했다. 이후 조직이 개편되고 소속기관이 바뀌면서 정규직이 되었지만 직장내 괴롭힘을 당하고 동료들과 갈등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여전히 해석되지 않는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으로 나는 나를 조금 더 알게 되었다. 나는 일을 좋아하고 내가 속한 조직이 추구하는 가치와 나의 동료를 아끼는 사람이었다.
일자리 사업에 참여자로 시작하여 경력을 쌓아서 지금까지 사회혁신 분야에서 일을 하는, 지금은 친구로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면접에서 불안에 떨던 친구들은 그 분야에 있기도 하고 다른 분야에 있기도 하지만 그때보다 덜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어떤 친구는 얼마 전엔 결혼을 했는데 나에게 '왠지 너에겐 결혼소식을 알려주고 싶었다'라면서 청첩장을 보내왔다. 나와 같이 성장한 사람들인데 뭔가 선배 대접을 받는 거 같아 굉장히 쑥스럽기도 했지만, 과거 내가 그들에게 쏟았던 에너지를 알아준 것 같아 기분이 좋기도 했다. 쉬는 동안 우연히 노동조합의 채용공고가 눈에 띄었다. 노동조합 업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역청년센터 경험을 살려보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지원하게 되었다.
노동조합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보는 친구들도 있는데, 노동조합에는 생각보다 많은 업무가 있다. 지금은 케이블통신사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회사와 교섭을 준비할 때 함께 관련 법령을 공부하고 요구안을 만들거나 투쟁 상황이 생겼을 때 선전전이나 집회를 준비한다. 평소에는 조합원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하기도 한다.
지금 내가 일하는 노동조합은 방송·통신·콜센터업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로 이루어져있다. 조합원 중 남성이 70% 여성이 30%인데 여성노동자들은 주로 사무실에서 전화 상담을 하거나 일정관리를 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남성노동자들은 케이블통신사에서 고객과 대면하여 인터넷을 설치하고 AS하는 업무와 전봇대 위 인터넷 연결선을 관리하는 업무를 주로 한다.
대부분 비정규직이다보니 성별과 무관하게 저임금이지만, 그 안에서도 내근과 콜센터 직군의 임금이 좀 더 낮다. 일부 지부들은 매년 현장직군과 내근직군의 임금격차를 줄이는 것을 교섭의제로 가져가기도 하지만 회사는 유지하기를 원하여 교섭과정에서 쉽게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다. 우리조직에서는 성별임금격차에 대한 고민보다는 성별분업에 대한 고민이 과제이기도 하다.
나는 노동조합에서 스스로 하고 싶거나 중요하다고 여기는 일을 하기보다 내가 담당한 곳의 간부들이 하고자 하는 일이나 하고 싶은 일을 되게끔 하는 역할로 스스로를 정체화하고 일하고 있다. 지부 간부들이 무언가를 할 때 혼자인 기분이 들지 않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변화를 옆에서 지켜보고, 필요한 때 항상 내가 있으려고 노력 중이다. 그 안에 젠더관점이 있으면 좋겠지만 아니여도 할 수 없다. 당장은 노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나 해야 하는 것을 하면서 과정을 잘 다듬는데 집중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갈대는 공공운수노조 희망연대본부 채용상근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