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는 4·3사건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경찰, 서청(서북청년단)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 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
제주4·3사건은 결과적으로 대규모 민간인 학살의 성격을 갖게 됐지만, 역사적 맥락에서는 분단을 막고자 저항했던 항쟁의 성격도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7년 7개월 사이 당시 제주도민의 10%가량인 2만 5000명~3만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1만 4442명을 희생된 시기를 기준으로 보면, 초토화 작전이 시작되면서부터 희생자가 급증해 1948년 10월 11일부터 1949년 3월까지 희생자가 67.2%인 9709명에 달합니다. 또 1949년 3월부터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2668명이 희생됐고,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도 희생이 이어졌습니다.
"제주도민 30만 희생시키더라도 무방"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제주4·3을 진압하기 위해 제주 주둔 9연대를 시작으로 11연대, 2연대, 해병대 등으로 교체하며 군을 투입했습니다. 대전현충원에는 제주4.3사건 진압을 위해 당시 제주도에 주둔했던 부대 지휘관들이 여럿 묻혀 있습니다.
강경진압에 나서다 부하들에게 암살당한 박진경 연대장의 후임으로 11연대장을 맡았던 최경록(장군 제1묘역 14), 11연대가 9연대로 교체되면서 9연대 부연대장을 맡았던 서종철(장군 제2묘역-145), 여순사건 진압을 마치고 원래 주둔지였던 대전으로 돌아오지 않고 제주로 가서 9연대와 교대했던 2연대장 함병선(장군 제1묘역 8)이 대표적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1949년 12월 28일 제주도로 이동해 1950년 8월까지 제주 4.3진압에 나섰던 초대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장군 제1묘역-273)과 민간인 학살을 명령했던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장군 제2묘역-193)도 대전현충원에 잠들어 있습니다.
당초 제주 주둔 9연대 김익렬 연대장이 무장대와 평화협상에 합의하자, 미군정은 '오라리 방화사건'을 빌미로 평화협상을 파기하고 무장대에 대한 공격명령을 내렸습니다. 미군정은 김익렬을 연대장에서 해임하고, 그 자리에 강경파 박진경을 임명해 9연대를 11연대로 재편시켰죠. 그 사이 5.10선거가 실시됐고, 선거 결과 200개 선거구 중 북제주군 갑과 을 2개의 선거구에서 무효 처리가 됐습니다. 5월 20일에는 11연대에서 제주출신 병사 41명이 집단으로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건까지 벌어졌습니다.
미군정은 이를 자신의 통치에 반하는 결과라 인식하고 더욱 강경한 태도로 진압에 나섰습니다. 박진경 연대장은 연대장 취임식에서 "폭동사건을 진압하기 위해서는 제주도민 30만을 희생시키더라도 무방하다"고 말하며 미군정의 입맛에 맞게 강경진압을 펼쳤습니다. 이후 박진경 연대장은 부임 한 달여 만에 중령에서 대령으로 승진까지 했습니다.
박진경 연대장의 초강경 진압에 더 많은 인명피해가 벌어질 것이라 우려했던 부하 문상길 중위, 손선호 하사 등은 6월 17일 진급 축하연에서 술을 마시고 숙소로 돌아와 잠을 자던 박진경 연대장을 이튿날 새벽에 암살했습니다.
초토화 작전
박진경 연대장이 사망하자 새로운 11연대장에 최경록 중령이, 부연대장에 송요찬 소령이 임명됐습니다. 최경록과 송요찬은 모두 일제 때 일본군 지원병 준위 출신으로서 전투경험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해방 후 미군정 시기에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한 공통점도 있었습니다. 최경록 연대장과 송요찬 부연대장은 부임한 즉시 박진경 연대장 암살범 색출에 주력하는 한편, 전임 연대장의 강경한 진압작전을 이어 추진했습니다.
그러다가 경비대총사령부는 1948년 7월 15일 자로 제9연대를 부활시키면서 11연대를 연대 창설지였던 경기도 수원으로 철수시켰습니다. 이때 최경록 연대장은 수원으로 갔고, 11연대 부연대장 송요찬 소령이 9연대 연대장에, 11연대 대대장이었던 서종철 대위가 9연대 부연대장이 됐습니다.
연대와 연대장 교체에는 비슷한 경력이지만 최경록은 상대적으로 온건한 데 비해 송요찬이 더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지만, 제주도 내 소요사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10월 17일에 9연대장 송요찬은 해안에서 5㎞ 이상 통금을 명령하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이 포고령을 위반하는 경우에는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폭도배로 인정해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위협적이면서, 위법적인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11월 17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9연대는 소위 초토화 작전이라 불리는 초강경 진압작전을 본격화했습니다. 중산간 지역에 거주하며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농사를 포기하지 못해 해안가로 내려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초토화 작전 소식을 전달받지 못한 경우도 부지기수였죠. 이 과정에서 중산간 지역은 방화와 주민살상의 현장으로 참혹했습니다. 이때 목숨을 건지고, 불타버린 삶터에서 간신히 몸을 피한 주민들은 한라산 깊은 곳으로 들어갔고, 동굴에서 은신생활을 이어가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영화 <지슬>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동광리 큰넓궤는 1948년 11월 중순 마을이 초토화되고 학살이 벌어진 이후, 동광 주민 100여명이 토벌대를 피해 2개월가량 은신생활을 했던 곳입니다.
일본군 준위 출신, 3대 연속 4.3진압 부대 사령관으로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면서 제주 주둔 부대는 2연대로 교체되었습니다. 대전에 주둔지를 뒀던 2연대가 여순사건 진압에 나섰다가 진압을 마친 후 원래 주둔지로 회귀하지 않고 1948년 12월에 제주로 주둔지를 옮긴 것이었습니다. 이전까지 제주 주둔부대가 교체될 때는 주둔군 전체가 이동한 게 아니라 연대장이 교체되거나 병력 일부가 이동했을 뿐 제주출신 병사들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2연대와 9연대가 맞교대하면서 제주 주둔 부대에 제주 출신 병사들이 없다 보니 진압작전을 더 강경하게 전개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제주로 온 제2연대는 토벌 과정에서 무장대와의 교전을 핑계로 많은 주민들을 총살했습니다. 2연대가 제주도에 주둔했던 시기가 인명 피해가 가장 극심했습니다. 1949년 1월 12일에 남원면 의귀국민학교에 수용했던 중산간 마을 주민 80여 명을 집단 총살하는가 하면, 1월 17일부터 다음날까지 북촌마을 주민 400여 명을 집단학살했습니다.
북촌학살 사건의 구체적인 가해부대는 2연대 3대대였는데, 3대대는 서북청년회 단원이 대부분을 차지해 일명 '서청대대'로 불렸습니다. 2월 4일에는 제주읍 봉개지구에서 육해공군 합동작전을 전개하며 도망가는 주민을 추격까지 해가며 수백 명을 총살했습니다.
제2연대는 토벌과정에서 초토화한 제주읍 봉개리를 재건하면서 2연대 연대장 함병선의 성과 작전참모 김명 대위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함명'리로 개칭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습니다. 2연대장 함병선도 일본군 준위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11연대장 최경록부터 9연대장 송요찬에 이어 일본군 준위 출신이 3대 연속으로 4.3진압 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었죠.
마지막 소탕전
1949년 3월 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되면서 사령관에 육사 부교장 유재흥 대령이 임명되었고, 2연대장 함병선은 참모장을 맡았습니다.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는 2달여 만에 해산했지만, 군 병력뿐 아니라 제주경찰까지 통솔하며 토벌 작전과 함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선전활동인 선무(宣撫) 작전을 병행하면서 초토화 작전을 피해 한라산으로 입산했던 많은 주민들을 하산시켰습니다.
3월 초부터 한라산 일대에 "하산을 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생명을 보장해 주겠다"며 귀순을 권유하는 삐라가 대대적으로 살포되었습니다. 선무작전을 믿고 하산한 주민들은 일부는 풀려났지만, 형식적인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7년 형을 선고받은 300여 명이 당시 대전형무소로 이감되는 등 1650여 명이 육지 형무소로 이감되었습니다. 육지 형무소로 이감된 이들 대부분은 형기를 넘기고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부분의 형무소에서 제주4.3사건과 여순사건 관련자 등 정치범으로 분류된 이들이 학살당했기 때문이었습니다.
2연대는 1949년 7월과 8월 사이에 인천으로 철수했고, 제주도 내 경비는 독립 제1대대(부대장 김용주)가 인계받았습니다. 독립 제1대대가 제주에 주둔한 때는 한라산 무장대도 세력도 약화되었고, 사태가 대부분 진정돼 인명 희생이 발생할 이유가 없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독립 제1대대 김용주 부대장은 '마지막 소탕전'을 전개하면서 군인들에게 사복을 입힌 채 각 기관에 잠입시켜 함정을 파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이때 잡아들인 이들을 재판 절차도 없이 총살까지 했습니다. 독립 제1대대는 그해 12월 말까지 제주도에 주둔하다가 신현준 대령이 이끄는 해병대에게 임무를 맡기고 제주도에서 철수했습니다.
제주지역 예비 검속자 총살 집행, 정지됐지만...
당시 해병대는 1200명의 규모로 편성되어 있었습니다. 해병대는 1950년 2월부터 6월까지 5개월 동안 산악지역 진압작전을 전개하면서 무장대와 소규모 교전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도에는 다시 계엄이 선포됐습니다.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은 제주도지구 계엄사령관이 됐고, 제주에서 예비 검속자 처리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권한은 계엄사령관이 갖고 있었습니다.
7월 말부터 8월 하순에 이르기까지 제주읍과 서귀포, 모슬포 경찰서에 예비 검속된 이들은 군 당국의 명령에 의해 총살이 집행되었습니다. 모슬포 경찰서의 경우, 예비검속 된 이들 중 240여 명이 섯알오름 등으로 끌려가 학살당했습니다.
제주경찰서와 서귀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자에 대한 총살 역시 두 차례에 걸쳐 집행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제주읍·조천면·애월면 등 제주경찰서 관내 예비검속 희생자는 199명으로 조사됐고, 서귀면·중문면·남원면 등 서귀포경찰서 관내 예비검속사건 희생자도 114명을 확인했습니다. 성산포경찰서는 해병대 정보참모 김두찬 중령이 1950년 8월 30일에 '예비검속자 총살집행 의뢰의 건'을 보내 총살 지시를 내렸지만, 문형순 경찰서장이 이 같은 명령은 부당하다며 거부해 상당수 주민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9월이 되면서 제주지역 예비 검속자 총살 집행은 정지됐습니다. 해병대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면서 제주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때 해병대는 제주에서 철수하기 전 제주청년 3000여명을 모병해 해병대에 입대시켰습니다. 무장대 소탕작전과 예비검속 학살의 공포 속에 피해자 가족들이 오히려 자신의 결백함을 소호하기 위해 학살 가해세력이었던 해병대에 입대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제주 청년들이 대거 해병대에 입대하고, 해병대가 철수하자 제주 지역의 경비에 심각한 공백이 생겼습니다. 해병대 철수 이후 제주지역 경비는 한동안 경찰이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제주 4.3의 마무리 진압은 '무지개부대'라 불렸던 육군 특수부대가 맡았습니다. 무지개 부대는 1953년 1월부터 5개월여 간 제주에 머물었습니다. 무지개부대는 장교 25명, 사병 61명으로 편성됐고, 부대장은 간도특설대 출신의 박창암 소령이 맡았습니다.
병력이 부족하다보니 대민 심리전을 많이 했고, 실제 한라산 토벌 작전은 경찰과 합동작전을 실시했습니다. 대부분 경찰이 무장대를 외곽에서 포위공격하면 무지개부대가 잠복했다가 기습공격하거나 경찰이 외곽선을 포위한 상태에서 무지개 부대가 포위망 속에서 위력 수색하는 방법으로 작전을 전개했습니다. 무지개 부대가 소규모였는데도 제주에 투입된 이유를 두고 북한 침투훈련을 겸해 제주에서 작전한 거라는 주장까지 나왔습니다. 무지개 부대는 1953년 5월 1일부터 3일간 한라산 정상 주변까지 수색하고 하산하면서 작전을 종료했습니다. 이후 한라산 금족령 해제 때까지 제주 지역 경비는 다시 경찰의 몫이 됐습니다.
2000년에 공포된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법'(제주4·3특별법)은 제주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법에 따라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발간되었습니다. 국가에 의해 사건의 진상이 어느 정도 규명되고, 희생자들도 상당부분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진압작전에 대한 지휘체계를 명확히 규명하지 못했고, 특히 진압 책임자에 대해 책임을 묻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대통령으로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에 대해 유족과 제주도민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라며 대통령으로서 사과를 표명한 바 있지만, 정작 제주 4·3사건 진압부대 책임자들은 강경진압에 대한 반성이나 사과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지휘관들 중 여러 명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는 현실은 아직도 4·3사건 진상 규명이 진행 중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대전현충원에는 4·3진압 책임자 중 함병선(8호), 최경록(14호), 박창암(193호), 신현준(273호)이 장군 제1묘역에 안장되어 있고, 서종철(145호), 유재흥(187호), 김두찬(193호)은 장군 제2묘역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한편, 송요찬은 고향 청양에 안장되어 있고, 박진경(54묘역 4-2140), 김용주(제1장군 186호), 김명(33묘역 1395호)은 서울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자료>
제주4·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위원회,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 2003.
제주4·3평화재단, 『제주4.3사건추가진상조사보고서1』,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