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육군상병 심규환의 묘 (장병 3묘역 305-31753호)
육군상병 심규환의 묘 (장병 3묘역 305-31753호) ⓒ 임재근
 
진실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진실은 드러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합니다. 대전현충원 한 묘역에는 진실이 드러나는 데 무려 30년이 걸린 사연이 묻혀있습니다. 장병 3묘역 305-31753호에 안장된 심규환 상병이 사연의 주인공입니다.

1957년 1월 30일 창원에서 태어난 심규환 상병은 부산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입대 전 결혼을 했고 세 살배기 아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한 심 상병은 1978년 5월 아내와 자식을 두고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는데요. 전역 후에는 아내와 정식으로 결혼식도 올리고,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겠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습니다. 1979년 8월 21일 심 상병이 근무한 5사단 35연대 4대대에서 전보가 한 통 날아왔습니다. 심규환 상병이 신변 비관으로 자살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나이는 22살에 불과했습니다.

입가에 남은 멍자국

얼마 전 가족에게 '성실하게 군 생활 잘하고 있다'며 편지를 보낸 아들이 죽었다니, 부모님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전보를 받자마자 온 가족이 철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어렵사리 부대에 도착했지만, 군인들이 아들에게 가는 길을 막아섰습니다. 이미 해가 졌기 때문에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였습니다. 가족은 심 상병이 왜 자살했는지 따져 물었습니다.

"아버지가 면회를 와서 '며느리랑 헤어지라'해서 고민하다 그런 것 같습니다."

중대장의 대답에 기가 막힐 노릇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면회를 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중대장은 뻔뻔하게도 당사자인 아버지 앞에서 "아버지가 면회를 와서 아내와 헤어지라 말했다"며 거짓말을 늘어놓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가족은 부대로 들어갔습니다. 나무 아래에 심 상병이 누워있었습니다. 옷은 싹 갈아입혀져 있었고, 사망 현장과는 한참 떨어져 있었습니다. 가족이 옷을 벗겨보니 별다른 상처는 없었고 입가에 파란 멍 같은 자국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가족은 실제 사망 현장은 어디인지, 왜 사망 현장에서 시신을 옮겼는지 거칠게 따지며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중대장은 철책 앞으로 안내했습니다.

어머니 박성임씨는 그날을 "중대장이 막대기를 갖고 와서 이렇게 시늉을 하면서, 지가 성이 나서 입을 때려서 죽었다고 했다"고 기억했습니다. 상식으로 납득을 할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가족은 끝까지 진상을 밝히고자 했지만 부검을 해달라는 요구는 묵살당했습니다. 심지어 군은 시신 인도 요청도 거부하고 심 상병 유해를 멋대로 화장하여 한탄강에 뿌렸습니다.

"우리는 그때만 해도 고향에 땅도 있고 산도 있으니, 돈이 얼마가 들더라도 우리 아를 데리고 나가서 밝혀 보려고 했는데 절대로 안 된다고 하데. 군인들이 군대서는 아무것도 못 가져 나간다 카고, 뼈도 자기들이 한탄강에다 뿌렸어요."

그날 이후 가족의 일상이 파탄났습니다. 진실을 찾고자 밤낮으로 애를 썼습니다. 장례를 치르고 다시 부대에 찾아가 며칠 밤을 자고, 인근에서 몇 달을 지내며 돌아다녔지만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증언자를 찾으려고 애를 썼지만 군인들이 항상 따라다니고 감시를 해서 동료 군인에게 말 한마디 걸어볼 수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아버지는 "규환아, 규환아 말을 해라. 우찌 된 일인지 말을 해라" 혼자 중얼거리는 일이 늘었습니다. 사방 팔방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러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알아볼 수 있다며 1000만 원을 요구했고, 돈만 받아 챙긴 사람이 잠적해 사기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보안대에 근무하던 먼 친척을 찾아가서 통사정을 해봐도 소용없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해라 시국이 뒤숭숭했고 돌아오는 말은 실망스러울 뿐이었습니다.

"세태가 불안해서 그런 일은 안 된다. 자살한 게 맞겠지 뭐."

불행이 계속되다
 

아버지는 아무나 붙잡고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죽하면 버스에 탄 옆자리 사람한테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농사일은커녕 있는 재산도 다 탕진했습니다. 반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살던 아버지는 급기야 버스에 치이는 큰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웠다 후유증으로 수술을 받던 중 한 많은 세상을 떴습니다.

다른 가족도 불행 속에 살았습니다. 부인은 장례식장에서 실신했고, 병원에 실려 가 사흘 동안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습니다. 홀로 남은 며느리가 보기 안타까웠던 시부모는 거의 반강제로 재혼시켜 보냈습니다. 남은 아들은 할머니 손에 홀로 자랐습니다. 가세는 기울대로 기울었고 어머니 혼자 남은 식구를 먹여 살려야 했습니다.

"송아지 팔고 땅 팔고 농사 자금 얻어서, 알아봐 준다는 사람한테 갖다주고 그렇게 하다 보니 재산은 다 까먹고 없지. 나라도 정신을 차려야 먹고 살지. 자식도 넷이나 딸려 있는데 싶어서 장에 나가 장사를 했어요. 원래 우리 집이 동네 한복판에 있는 기와집이었는데, 갈 데가 없어서 동네 어귀 이 집에서 삽니더."

그렇게 어머니는 "먹고 사는 게 급해서 아들은 그냥 맘속에 담았다"고 했고, 3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다 길에서 우연히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 현수막을 발견했습니다. 불현듯 생전 "한 20년 후에는 어떻게든 밝혀지지 않겠나"하던 남편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진정을 접수한 후 드디어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심 상병이 근무한 4대대는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부대였습니다. 그래서 단기 하사관과 고참 사병 사이에 갈등이 많았는데요. 심규환 상병이 고 아무개 하사와 함께 위병소 경계근무를 서던 중에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둘 사이에 말다툼이 있었고 잠시 조용하더니 '땅'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고의인지 과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 아무개 하사가 총을 쏘았고 총알은 심 상병 입에 맞고 안면을 관통했습니다. 1미터 정도 앞에서 총을 맞은 심 상병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사망했습니다.

현장에 모인 간부들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자살로 처리하자"라고 입을 맞췄습니다. 당시 대대장과 중대장은 진급에 불이익을 받을까봐 사건을 왜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사건이 일어난 날짜부터 조작했습니다. 실제 사망일은 16일부터 19일 사이로 추정이 됩니다. 하지만 사건 당일 현장에서 시신을 바로 후송하지 않았고 부대 안에서 적어도 하루 이상 방치하기도 했습니다. 시간을 벌기 위해 군은 20일에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조작했고, 가족에게도 그렇게 통보했습니다. 가족은 그 후에도 쭉 20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후에 총기와 군복을 바꿔치기 했습니다. 총을 발사하면 화약 흔적이 총과 옷에 묻습니다. 그 흔적을 숨기기 위해 고 아무개 하사와 심 상병 옷을 바꿔치기 합니다. 총에 붙은 명찰도 바꿔 달았고 총기대장도 조작해서 새로 작성했습니다. 또한 자살 원인을 가족 간에 고부갈등으로 만들어 내기 위해 면담기록보고서도 조작했습니다.

헌병 수사대 수사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1979년 8월 20일 12시 20분 경 심 상병이 고모 하사와 함께 근무하던 중 처와 부모 간 고부갈등 상황을 비관해 자신의 M16 소총을 입술 좌측에 발사하여 자살하였다'는 보고서를 제출합니다. 이 보고서 역시 중대장과 헌병 수사대가 입을 맞춰 짜깁기 된 조작 서류에 불과했습니다.

2008년 10월 29일 군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는 심 상병이 고 아무개 하사가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으며, 군이 이를 은폐 조작하였다고 결론내립니다. 이후 2009년 1월 23일 심 상병 사망 원인이 자살에서 순직으로 변경되었고 국가 유공자로 등록됩니다.

진실 털어놓은 사람들
 
 고 심규환 상병
고 심규환 상병 ⓒ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30년간 은폐되었던 진실이 드러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당시 동료 군인들의 증언 덕분이었습니다. 한 부대원은 헌병 수사관으로부터 자살에 맞춰 진술하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증언했습니다. 당시 중대장 지휘 아래 부대원 전체가 진실을 은폐하는데 동참했지만, 진상규명위원회가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하나 둘 진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이후 국가는 심 상병 유족에게 4억 6000만원을 배상했고, 가해자 고 아무개 하사와 은폐에 가담한 부대원 5명에게 구상금을 청구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지 36년이 지난 2014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사건 당시 부대 지휘관들은 자기 안위만을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조작했습니다. '산 사람은 살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정작 심 상병 어머니는 "당시 진실을 숨긴 사람들은 편안히 살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고 토로했습니다. 

군은 심규환 상병의 유해를 한탄강에 뿌렸으나, 가족들은 고인을 한탄강에 그냥 두고 올 수 없었습니다. 뿌려진 유해를 모아 고향 선산에 모시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진실이 규명되어 유해를 수습해 대전현충원에 이장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심규환 상병은 30년 만에 밝혀진 진실을 품고 말없이 대전현충원 한편에 안장되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
군의문사 유족들은 말한다 <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8, 삼인)


#대전현충원#군의문사#심규환#장병묘역
댓글9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전의 시민활동가입니다. 우리 지역 현장 곳곳을 다니며,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마이크가 필요한 분에게 마이크 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