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6·15 남북공동선언 행사에 배석한 이래 20여 차례나 북녘을 다녀왔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 일과, 6·15 선언 5주년 기념행사 관련 업무 등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북쪽의 관계 당사자들과도 조금씩 신뢰가 쌓였다. 남북 관계가 단절된 지는 벌써 반세기가 넘었고, 그사이에 적대적 관계는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상호신뢰를 회복하는 문제가 시급했다.
남북역사학자협의회 등을 통해 남북교류에 관여하게 되면서 절실히 느낀 점이 있다. 그것은 남북 사이의 평화관계 수립과 협력관계 진전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상호신뢰 문제라는 것이다.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정략적 차원을 넘어 민족적 평화적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식견을 가진, 남측에서 신임할 수 있는 북측 인사와 북측에서 신임할 수 있는 남측 인사가 더 많아져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주석 1)
긴 세월 동안 적대 관계가 개선되지 않으면서 특히 남북 양측의 각종 법규는 신뢰 관계를 쌓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여차하면 '이적' 행위자로 몰릴 위험도 있었다. 다행히 당시는 민주 정부 2기라 할 수 있는 노무현 정부의 시기였다. 또한 북녘의 학자들도 역사학자이자 '통일시대(론)'의 주창자로서 강만길을 신뢰했다.
그는 2000년 12월 평양에서 북녘 역사학계의 대표적 학자라 할 수 있는 허종호와 만나서 일제의 대한제국 침략 과정에 관한 자료 전시와 남북 역사학자들의 공동학술발표회를 갖기로 합의했다.
2001년 2월 26일부터 평양의 인민대학습당에서 <한일합방의 불법성에 대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 및 자료전시회>가 열렸다. 분단 이래 최초의 일이다. 2차 대회는 2003년 2월 20일부터 평양의 인민문화궁전에서 <일제의 조선인 강제연행 불법성에 대한 남북공동학술토론회및 자료전시회>가 열렸다. 남쪽 인사 50여 명과 북쪽 인사 200여 명이 참석했다. 3차 대회는 같은 해 8월 18일부터 평양에서 열려 통일이 되면 영문 국호 KOREA 대신 COREA로 바꾸는 문제 등을 논의했다.
4차 대회는 2004년 2월 24일부터 평양 조선미술박물관과 인민문화궁전 등지에서 <일제 약탈문화재 반환을 위한 남북공동학술대회 및 자료전시회>가 열렸다. 강만길은 기조강연에서 분단 59년 만에 남북의 학자들이 일제의 침략문제와 관련 학술회의를 갖게 된 의미를 상기하고 "여러 나라로 둘러싸인 내해(內海)에 어느 한 나라의 이름을 붙인 예는 세계적으로도 없다. 내해에다 나라 이름을 붙인다면 지중해는 이탈리아해가 되고 에게해는 그리스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있는 바다는 지구의 가장 동쪽에 있는 내해로서 동해란 이름이 가장 타당하다. 동해를 일본해로 고집한 데는 제국주의적 침략욕이 깃들여 있다 해도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라고 주장, 북녘 학자들의 공감을 샀다. (주석 2)
2004년 2월 28일, 남북이 학술행사와 전시회를 계속 이어가기 위해 '남북역사학자협의회'가 결성되었다. 남과 북의 역사학자들이 평양에 모여 논의한 끝에 만든 결과였다. 남측 공동위원장에는 강만길, 북측 공동위원장에는 역사학자 허종호가 선임되었다. 남북의 역사학자들은 6·15 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민족의 역사를 지키고 민족의 안전과 번영·통일을 이루어 나가는 데 책임을 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데 의견을 모았다.
평양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 '다섯 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의 폐막식이 거행되는 날, 대동강 영빈관에서 이번 행사에 정부 측 대표로 온 임동원·박재규 두 전직 통일부장관, 최학래 전 한겨레신문 사장, 김보현 전 국정원 차장과 북쪽의 김정일 국방위원장 등과 오찬을 하였다.
식사 중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화기애애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스스럼없는 화술과 솔직한 태도는 5년 전 6·15 공동선언 때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술은 "밤이면 좀 하겠는데 낮이라" 하면서 포도주를 조금 마셨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앞으로 남북회담은 체면 유지보다 실질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 예로 담배를 거꾸로 물고 남이 그것을 지적해도 체면 때문에 얼른 바로 물지 못하는 그런 태도는 곤란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남북이 합치면 그 힘이 강해지고 외세의 간섭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미국이 세계의 MP(헌병) 노릇을 하려 한다고도 했고, 주관주의가 무섭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리고 앞으로 서울에는 화해 '협력파'를 보내지 '완고파'는 보내지 않겠다는 말도 인상적이었다. (…)
광복 60주년 기념행사의 준비위원장을 맡은 처지라 이번 북에서의 성대한 6·15 선언 5주년 기념대회를 보고 걱정이 앞선다고 했더니, 행사야 마음과 정성이 중요하지 규모가 문제 겠느냐고 답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있을 6·15 행사 때 북측 인사가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고, 남북회담 문제가 화제가 되기에 특히 군인들의 장성급 회담을 자주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석 3)
노무현 정부 때 활발히 논의되었던 남북역사학자협의회를 비롯한 각급 화해협력사업은 정권이 바뀌면서 물거품이 되어 갔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군사적·정치적 갈등이 조성되고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되돌려졌기 때문이다. 그는 초야에서 남북관계의 악순환을 지켜보면서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라고 되뇌었다.
주석
1> <역사가의 시간>, 384쪽.
2> 위와 같음.
3> 위의 책, 403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