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이면 해방 80주년이다. 그동안 우리 현대사에는 무수한 미제 사건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사건을 꼽을 때 빠질 수 없는 사건이 친일반민족행위자 즉 친일파의 미청산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저지른 죄상 중 대표적 사건으로 꼽히기도 한다.
1948년 9월 23일, 제헌국회는 국권 침탈기에 일제에 협력해 민족반역행위를 했던 친일 분자 등을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을 제정했다. 헌법 제101조에 따라 특별법이 제정되어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이어 특별재판부, 특별검찰부, 사무국 등을 구성하고 각 시도에 지부를 설치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8일부터 업무를 개시하여 박흥식·최린·이종형·이승우·노덕술·박종양·김연수·문명기·최남선·이광수·배정자 등을 체포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친일세력을 기반으로 집권한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세력 특히 친일 경찰 출신의 경찰 간부들이 구속되면서 정치적 위기에 내몰렸다. (주석 1)
반민특위는 친일 반민족 행위를 했던 사람들을 조사하고 재판부에 넘겼다. 친일파들의 반발과 방해 공작도 고집스럽고 끈질겼다. 반민특위는 친일파들의 방해로 구성된 지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반민특위가 국민의 성원을 받으며 활동하던 같은 해 6월 6일 새벽 국립경찰이 헌법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직원들을 구타하면서 서류를 탈취했다. 반민특위가 사실상 와해된 것이다.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지와 '윗어른'의 양해로 이루어진 폭거였다. (주석 2)
이로써 대한민국은 과거청산을 하지 못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친일파들은 다시 고개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고 득세하여 기득권을 향유했다. 1961년에는 일본군과 만군 출신들이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 일이 벌어졌다. 청산의 대상이 권력의 주역이 되고,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는 반역사·몰상식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물론 그 후예들의 군사·문민 독재정권 시기에 역사 정의와 사회 정의 그리고 민족정기가 심히 훼손되었다. 이는 모두 매국노와 친일파를 처벌하지 못하고, 과거청산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집권하자 선거공약대로 과거사 청산 작업에 나섰다.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제2반민특위라 할 수 있는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설립했다. 이는 국가기관이었고, 초대 위원장으로 강만길이 임명되었다.
위원회는 대통령 추천 4명, 여야 추천 4명, 대법원장 추천 3명 등 11명으로 구성되었다. 강만길은 상지대학 총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나고자 강원도 양양 하조대 근처에 작은 아파트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지대학교 총장으로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지금은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고, 어느 호텔 식당에서 단둘이 점심을 함께 하면서 약 2시간 담화한 일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몇 가지 이야기가 나왔는데, 특히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새로 성립될 내각에 입각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대통령 당선자가 나를 만난 주된 목적이 거기에 있었던 것 같았다.
그때 국무총리는 이미 60대의 고건 씨가 내정된 상태였다. 그래서 각료는 전원 50대와 그 이하 연령층에서 구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함으로써 입각 요청을 간접적으로 사양했다. 모처럼 50대의 젊은 대통령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70 고령에 무슨 입각이냐는 생각이었고, 그렇게 되자 이야기는 자연히 현직 대학 총장과 관련 있는 교육부 장관, 그리고 평소 높은 관심을 가진 통일 문제를 담당한 통일부 장관 인선 문제로 옮겨지게 되었다. (주석 3)
노무현 대통령의 입각 요청을 사양한 그는 얼마 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약칭 반민규명위) 위원장을 맡았다. 1949년 6월 6일에 반민특위가 사실상 해체된 지 실로 56년 만에 구성된 제2 반민특위였다. 위원장은 장관급이고 임기가 4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위원회의 기초를 닦고, 위원회가 궤도에 진입하는 2년 동안만 맡기로 작심했다.
위원회의 사업계획은 1차로는 강제병합 전후과정의 반민족 행위를, 2차로는 3·1 혁명 후 시기의 반민족 행위를, 3차로는 중일전쟁 이후 해방까지의 반민족 행위를 다루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하고 사무국에 준비를 시켰다.
그는 교수 때나 해직 시기에 쓰지 않았던 일지를 새로 쓰기 시작했다. 반민규명위의 역사적 중요성과 책임을 절감하면서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였다.
4년 후에는 물론 위원회의 공식 보고서가 나오겠지만, 보고서에 들어갈 수 없으면서도 남겨 두어야 할 이야기도 있을 것 같기에 평생 쓰지 못했던 일지를 위원회를 맡는 날부터 쓰기로 마음먹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원회의 책임을 맡은 사람으로서, 또 평생 우리 근현대사를 공부한 사람으로서,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스러운 부분의 하나인 친일반민족행위를 조사하면서 겪은 뒷이야기와 그때그때마다 느낀 심경이나 고충 같은 것을 기록해 두는 것이 훗날의 연구자들을 위해서도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주석 4)
강만길은 취임할 때 스스로 다짐한 대로 취임 2년 만인 2007년 5월 30일에 사임했다. 위원회의 초기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평가를 받았다. 위원회 설립 이후 총 104회의 위원회회의를 열었고, 2006년 12월 6일에 1차로 친일반민족행위자 106명을 발표했다. 그가 퇴임한 뒤인 2007년 12월 7일에 2차로 195명, 2009년 11월 27일에 3차로 705명을 발표했다. 그렇게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발표된 사람은 모두 총 1,006명이었다.
1948년에 구성된 반민특위가 친일파들의 거센 방해에 시달렸다면, 반민규명위는 그 친일파의 후예들로부터 그에 못지않은 거센 도전을 받았다. 족벌신문과 친일 기업 그리고 일부 대학재단, 여기에 그들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이 반민규명위 활동은 물론 강만길 위원장을 끈질기게 음해했다.
박정희에 대한 심의가 위원회에 상정되지도 않았는데 이 문제를 두고 선수를 치는 정치인도 있었다. 강만길이 반민규명위 위원장 자격으로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에 출석했을 때의 일화를 직접 들어 본다.
그중 한 의원이 나를 보더니 느닷없이 "연세가 너무 많아서 일하시기 어려울 테니 그만두시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제발 나 좀 그만두게 해 주시오" 하고 대꾸했더니 그는 또 "사표를 내시면 되지요"하는 것이었다. (…)
회의에서는 주로 야당 의원들이(새누리당) 친일반민족행위자의 문제가 그 자손들에게까지 연루되지 않아야 할 것을 강조했고, 야당 간사라는 그자는 노골적으로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친일행위자는 발표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아마 박정희 전 대통령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발표될 경우 대통령에 출마하리라는 그 딸에게 미칠 영향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그래서 특별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사람은 매년 발표하게 되어 있으며 발표를 하지 않으면 위법하는 것이라 말해 주었다. (주석 5)
주석
1> 김삼웅, <통사와 혈사로 읽는 한국현대사>, 인문서원, 2019, 196쪽.
2> 위와 같음.
3> <역사가의 시간>, 493쪽.
4>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일지>, <역사가의 시간>, 495~496쪽.
5> 위의 책, 60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실천적 역사학자 강만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