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백발투사로 불렸던 백기완 전 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은 혁명가를 이렇게 불렀다.
'불쌈꾼.'
사실 그 자신이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헤쳐 온 불쌈꾼이었다. 2021년 2월, 백 전 소장이 세상을 뜬 지 3년여만에 서울 혜화동 통일문제연구소 건물이 새단장을 해 공개됐다. 57년 전인 1967년에는 백범사상연구소, 1984년부터 통일문제연구소였던 이곳의 명맥을 잇는 '백기완 마당집'이 지난 1일 정식 개관한 것이다. 단지 한 시대를 호령했던 인물을 추억하려고 만든 공간은 아니었다.
[창 밖의 외침] 백 선생 살아계셨다면... 윤석열에 불호령
"이거 봐~ 윤석열이! 나 알잖아, 내 말 들어."
건물에 들어서기 전 마당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2층 벽면에 낸 창에 큰 글씨로 내건 위 글귀다. 1년 주기로 교체할 예정인 '창 밖의 외침' 전시 공간인데, 부정한 권력을 향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사자후를 날렸던 백 선생의 모습이 선연하게 떠오르는 말이다. 불쌈꾼이 살아있는 듯했다.
1일 마당집에서 만난 양기환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전 기획위원장은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한반도 평화가 위협받고, 양극화가 심화될 뿐만 아니라 공정과 상식이 무너지고 민주주의의 퇴행하는 작금의 상황에서 윤석열 대통령에게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라면서 "이 공간은 과거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을 넘어선 현재 진행형이기에 우리가 곱씹어야 할 사회적 의제나 이야기를 창 밖의 외침과 같은 이미지나 문자로 전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담쟁이 넝쿨로 온통 뒤덮었던 붉은 벽돌담은 대문만 남긴 채 헐었다. 백 선생은 늘 군부독재 정권과 극우파의 표적이었다. 온갖 해코지를 덜려고 주소만 적혀있었던 문패는 문정현 신부가 새긴 서각 글 '해방세상'으로 바꿔달았다. 백 선생이 꿈꿨던 '노나메기 세상', 너도 일하고 나도 일하고, 그리하여 너도 잘살고 나도 잘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과 동의어이다.
1층 전시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방문객을 맞는 20년생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새파랗게 잎이 오른 살구나무. 백 선생은 꽃이 발그스레한 살구꽃을 좋아했다. "양반들은 붉은 빛이 도는 화려한 복사꽃을 좋아했지만, 자연의 빛깔을 닮은 민중의 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이 말을 들은 신학철 화백이 자기 뜰에 있던 나무의 씨앗을 키워 2005년 이곳에 옮겨놓았단다.
살구나무 밑 새김돌에는 백 선생이 매년 봄이 되면 벗들을 불러모아 신경림 시인의 <월악산의 살구꽃>을 붉은 담장 벽시에 적어놓고 이야기 꽃을 피웠다고 적혀있다.
"월악산에서 죽었다는 아들의/옷가지라도 신발짝이라도 찾겠다고/삼십 년을 하루같이 산을 헤매던 아낙네는/말강구네 사랑방 실퇴에 앉아 죽었다 한다//한나절 거적대기에 덮여/살구꽃 꽃벼락을 맞기도 하고/촉촉히 이슬비에 젖기도 하던 것을"(신경림의 시 '월악산의 살구꽃' 중에서)
[옛살라비] 통일꾼, 예술꾼, 이야기꾼, 노동해방꾼의 한살매
마당집 1층 상설전시관에 들어가면 바로 왼쪽 방 위에는 '옛살라비'라는 이름을 붙였다. 백 선생은 임종을 앞두고 중환자실에 들어가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신문을 보고, 독서와 집필을 했다. 또 방문객을 맞아 댓거리를 하는 공간이자, 길거리 싸움에서 돌아와 고단한 몸을 다독이는 휴식공간이기도 했다. 백 선생의 숨결이 깊게 배인 방이다.
백 선생과 오랫동안 지근거리에서 함께했던 채원희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사무처장은 "백 선생님은 내가 살던 곳, 즉 고향을 '옛살라비'라는 순우리말로 표현을 하셨다"면서 "선생님께서 제일 많은 시간을 머물었던 이 공간은 최대한 원형을 보존했다"고 말했다.
책상 위에는 원고지와 돋보기가 놓여있었다. 원고지가 모두 빈칸인 것을 빼고는 살아계실 때의 모습 그대로다. 뒷면의 액자와 책장에 꽂힌 책들도 대부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시집 등 백 선생이 즐겨 읽었던 책을 골라 책상 위에 올려두었고, 직접 집필한 30여권의 책도 놓여있다. 1974년 긴급조치 1호로 군사재판을 받을 때 입었던 솜바지, 80년 6월 항쟁 때 입고 신었던 한복과 고무신, 고문 후휴증으로 항상 짚고 다녔던 지팡이도 한쪽에 자리하고 있다.
거실로 나오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백기완노나메기재단 이사장인 신학철 화백이 그린 '백기완 부활도'이다. 오른 주먹을 불끈 쥐고 입을 크게 벌려 포효하는 백발투사의 살아생전 기백이 생생하게 담겼다. 그 양옆 벽면은 통일꾼, 예술꾼, 우리말 사랑꾼, 이야기꾼, 노동해방꾼이었던 백기완의 한살매 이야기가 빼곡하게 담겨있다.
[묏비나리] 1평 감옥에서 불쌈꾼이 입으로 쓴 가사 '임을 위한 행진곡'
백발 투사가 병석에 누운 채 삶의 끝자락에서 15일에 걸쳐 힘겹게 써내려간 네 글자는 '노동해방'이었다. 그 옆에 "백기완이 늙은 몸을 아끼지 않으며 끝까지 손을 놓지 않으려했던 이들은 해고노동자와 비정규직 노동자였다"면서 "'딱 한발띠기에 목숨을 걸어라!' '마냥 쓰러질 것 같아도 눈깔 똑바로 뜨고 곧장 앞으로'라는 외침은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보내는 따끔한 호통이자 뜨거운 응원이었다"고 해설을 적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백 선생이 1979년 권총 개머리판에 까인 뒤 끌려간 1평 남짓한 감옥에서 천장을 보며 입으로 읊은 시 '묏비나리'에서 나온 곡이다. 당시 보안사령부(사령관 전두환)에서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문을 받았는데, 구속당할 때 몸무게 82kg이 38kg으로 줄었다. 백 선생은 <오마이뉴스>와의 댓거리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었다.
"썩어 문드러진 세상, 하늘과 땅을 맷돌처럼 벅벅 갈아서 돌려라. 나는 죽지만 산자여 따르라. 나는 죽지만 살아있는 목숨이여, 나가서 싸우라는 거지. 고문관들이 '저 새끼는 정신적으로 말려 죽여야 한다'고 했어. 한번은 보안과장이 '제발 그 입 좀 다물 수 없냐'고 그러더라고. '내가 죽기 직전인데 왜 입을 다무나'라고 소리쳤어. 그럴 때 혼자서 웅얼대면서, 죽어도 죽을 순 없다, 들이받고 죽어야겠다면서 허공에 쓴 시가 묏비나리야. 입으로 써서 천장에 새겼어. '나는 비록 싸우다 죽지만 사랑하는 너희들은 앞장서 나가라' 이거야."
1층 전시관에는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이야기와 백기완 민중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노나메기'에 대한 설명, 이종구의 '별이 된 백기완', 이기연의 '백기완 선생' 등 회화작품과 기록사진, 오래된 문서, 육필원고, 벌금고지서, 아끼던 물건을 담은 유물함 등이 전시돼 있다. 백 선생의 손 때가 묻었거나, 백 선생이 치열하게 걸어온 발자취와 격랑의 한국 근현대사를 엿볼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말 사랑꾼] 새내기, 모꼬지, 동아리, 한살매, 새뜸...
채원희 사무처장은 "1층 전시관은 백기완 선생님을 기억할 수 있는 공간인데 청소년 등 미래 세대들이 이 기념관을 방문했을 때 백기완이 누구인가를 아주 작은 벽에 집약적으로 정리를 했다"면서 우리말 사랑꾼이었던 백 선생이 지은 24개 순우리말 낱말을 종이에 적은 벽면을 가리켰다. 백 선생은 신입생은 '새내기', MT-수련회는 '모꼬지', 별명은 '덧이름', 한평생은 '한살매', 뉴스는 '새뜸' 등으로 바꿔 불렀다.
마침 개관 첫날의 첫 방문객인 리대로 우리말살리는 겨레모임 공동대표가 또 다른 방문객을 상대로 해설사 역할을 하고 있었다.
리 대표는 "제가 1967년부터 우리말 한글사랑 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 적혀있는 새내기, 모꼬지, 동아리와 같은 우리말을 백 선생님이 사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었다"면서 "1993년경에 조선일보는 일본처럼 한자를 혼용하자는 연재기사를 쏟아내고, 김영삼 대통령도 한자와 영어조기교육을 주장해서 우리 말글이 위기를 맞았었는데, 백 선생님과 김동길 교수님 등을 연사로 초청해서 운동을 해왔다"고 말했다.
리 대표는 이어 "제가 그때부터 백 선생님을 모시면서 느낀 것은 항상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물을 흘리셨던 정말 따뜻한 분이셨다"면서 "많은 분들이 백발의 투사라고만 생각하는 데 우리말을 사랑하면서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을 직접 실천을 해 온 참사람이셨다"고 말했다. 리 대표의 말대로 '백기완은 울보'였다.
[특별전] 비정규직 노동자 백기완의 100장면
2층으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의 벽은 백 선생의 한살매를 보여주는 연보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3년에 태어난 백 선생은 50년대에 나무심기 농민운동을 하면서 민족의식에 눈을 떴고, 유신독재 시대에 해방통일운동을 했다. 80년대에는 민중운동, 그 다음에는 해고노동자와 비정규직과 함께 한 투쟁, 박근혜 탄핵에 이르게 했던 광화문 촛불 한바탕까지... 백 선생은 온몸으로 격동의 근현대사를 헤쳐왔다.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될 2층에선 백기완노나메기재단과 비정규직이제그만이 공동 주관한 개관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벽면에 큰 글씨로 이렇게 적었다.
"백기완은 비정규직이었고, 비정규직은 백기완이었다."
백 선생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시작된 비정규직 노동자 저항의 현장에 함께했다. 기륭전자 싸움 때 94일간 곡기를 끊었던 김소연 동지 곁에 있었고,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때 85호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 동지를 살리기 위해 희망버스 1호차를 타고 공장 담장을 넘었다. 백 선생의 마지막 20년의 투쟁을 100장면으로 전시한 특별개관전의 취지 글은 다음과 같이 맺었다.
"뼈가 부러져 목발을 짚고도 싸우는 노동자 곁에 있었던 백기완 선생, 그의 마지막 연설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목숨을 잃은 김용균의 영결식이었고, 그가 남긴 마지막 글자는 '노동해방'이었다. 백기완은 비정규직이었고, 비정규직은 백기완이었다."
[6831명] 지붕 새고 담벼락 허물어진 민주화 산실 일으켜 세우다
양기환 전 기획위원장은 "삶의 전 과정을 자본과 권력에 맞서면서 단 한 번도 굴복하지 않고 야만의 사회에 맞서왔던 우리 근현대사의 독보적인 인물이 백기완 선생님이었다"면서 "97년 신자유주의가 본격화되면서 고통을 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부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넓은 품을 내어주셨던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양 전 기획위원장은 또 "백발의 투사로 불리셨지만, 문화예술적인 식견이 탁월했고 직접 시와 시나리오, 글씨를 쓰는 문화예술인이기도 했다"면서 "우리말의 소중함과 참뜻을 널리 알리려고 실천했고, 장산곳매 이야기와 이심이 이야기, 버선발 이야기 등 핍박을 받아온 민중들의 저항의 정신, 혁명의 정신이 담긴 옛 이야기를 발굴한 이야기꾼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백기완 마당집' 건물 벽면에는 6831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1967년에 지어진 건물의 '부서진 데를 고치고, 비 새는 데를 때우고, 새 벽을 세우는데' 십시일반 후원을 해 준 이들의 이름이다. 1988년 '통일마당집 한 돌 쌓기' 운동을 벌일 때에도 이와 같았다. 당시 백 선생은 강사료를 내놓았고, 1948년 백범 김구 선생께 받은 붓글씨 2점도 팔았다. 또 학생과 노동자 민중들이 500원씩을 모아서 마련했던 공간이었다.
양 전 기획위원장은 "지붕이 새고 담벼락도 무너진 집이지만 노동자의 집, 민주화운동의 산실이고 백 선생님의 발자취가 묻어있는 이 공간의 의미를 후대에 전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으로 한푼 두푼 모아서 사회에 환원한 것"이라며 "민주노총과 한국노총, 그리고 수많은 시민사회 활동가와 시민들이 참여해서 새단장 공사비를 마련한 뜻깊은 곳"이라고 말했다.
백기완 마당집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개관하며, 평일에는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토요일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 문을 연다. 단체관람을 희망하는 시민은 백기완노나메기재단과 사전에 협의하면 문을 여는 날짜와 시간 조정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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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백기완 선생은 2021년 2월, 별세하기 직전까지 오마이뉴스를 후원하는 10만인클럽 최고령 회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