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는 외세에, 해방 후에는 독재에 항거했던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 장준하, 함석헌 등이 있는데요, 오늘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329호에 안장되어 있는 함석헌 선생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합니다.
<씨알의 소리>와 YWCA 위장결혼식
광주 밖 5.18민주화운동을 조사하면서 당시 민주화운동에 나서셨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씨알의 소리>와 서울 명동에서 있었던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의 영향을 받은 사례가 많았습니다.
<씨알의 소리>를 읽고 민주화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던 학생들과 YWCA 위장결혼식 사건 이후 시국선언에 동참했던 학생들은 1980년 5월 거리로 나섰고, 신군부 타도와 계엄 철폐를 외쳤습니다. 이들은 비단 광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대학생과 시민들도 거리에 나섰습니다.
<씨알의 소리>는 함석헌 선생에 의해 발행된 잡지로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4.19혁명 10주년을 맞이한 1970년 4월 19일부터 발행되었습니다. 함석헌 선생은 민중을 주체로 삼는 본인의 '씨ᄋᆞᆯ사상'을 내세워 잡지 이름을 지었고 장준하를 비롯한 11명의 재야인사들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해 정권에 대항하는 언론이 되었습니다.
박정희 군사독재시절 함석헌 선생을 비롯한 편집인들이 수시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고 판매금지 처분이 내려졌지만, <씨알의 소리>는 많은 민중에게 읽혀졌으며, 민중들은 <씨알의 소리>를 통해 민주화, 분단극복, 노동해방의 의지를 다질 수 있었습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군사독재가 막을 내리고 민중들은 '서울의 봄'을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유신헌법은 철폐되지 않았고 대통령 선거는 여전히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진행될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재야 세력들은 집회 및 시위가 금지되었던 계엄 하에서 1979년 11월 24일 명동 YWCA에서 결혼식을 위장하여 500여 명이 모였고 유신철폐, 계엄해제,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성명서를 낭독하는 집회를 열었습니다.
참가자들 가운데 140여 명이 체포되었고, 여기에는 함석헌 선생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리고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대전에서도 5일 후인 11월 29일 충남대와 목원대에서 계엄해제와 민주화 이행을 요구하는 시국선언문이 낭독되었고 9명이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습니다.
<씨알의 소리>와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은 '서울의 봄' 시기에 민중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쳤고, 그곳에는 공통적으로 함석헌 선생이 있었습니다. 12.12 군사반란 이후 민중들이 전두환 신군부에 저항하고, 5·18민주화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던 것 또한 바로 그 영향이 있었던 것입니다.
일제강점기, 외세에 맞섰던 함석헌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난 함석헌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는 1916년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의사로서의 꿈을 키웠으나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가담하면서 사회참여에 눈을 뜨고 학업을 중단하였습니다. 훗날 자서전에서 "3.1운동 없었으면 오늘은 없다. 그것은 내 일생에 큰 돌아서는 점이 됐다"며 3·1운동이 자신에게 끼쳤던 영향이 컸음을 강조했습니다.
이후 함 선생은 민족사학 오산학교에 편입학하여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일본으로 넘어가 유학을 마친 함석헌 선생은 모교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후진양성에 힘을 썼으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고 창씨개명을 강요당하자 교직을 사임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계우회 사건', '성서조선 사건'으로 연이어 투옥되는 등 해방 직전까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언론 집필 활동을 했습니다.
해방 후, 독재에 항거했던 함석헌
해방 이후 함석헌 선생은 1953년 장준하 선생이 창간한 잡지인 <사상계>에 글을 쓰면 장 선생과 동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상계> 논객으로 이승만 정부 정책에 비평을 가했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감되기도 하였습니다. 1961년 박정희의 5·16군사정변에 대해 비판을 가했고, 1970년에는 70세의 나이로 <씨알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권력과 싸우며 70년대 군사정권이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 중에 한 명이 되었습니다.
고령의 나이에도 그는 민주회복국민회의, 3.1 민주구국선언, YWCA 위장결혼식을 주도하며 민주화운동에 앞장섰고, 그의 정신을 따랐던 이들이 민주화운동에 많이 나섰기에 전두환 신군부는 1981년 <씨알의 소리>를 폐간시키기도 하였습니다.
1987년 6월 항쟁시기에는 86세의 고령의 나이에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고문으로 활동하며 4·13호헌조치 철폐를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5공화국의 종료를 알린 6.29선언이 있었던 날 암으로 입원하게 되었고 1989년 2월 4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주화운동가였던 함 선생은 사후 13년 만인 2002년 건국포장 수훈을 받았고, 2006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제3묘역 329호에 안장될 수 있었습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함석헌 자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