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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사극을 보며 품었던 활쏘기에 대한 로망을 30대가 되어 이뤘습니다. 대학원생으로 살면서 활쏘기를 통해 많은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활쏘기의 매력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으로, 활을 배우며 얻은 소중한 경험들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기자말]
내가 대학생 시절이던 2012년 초, 아버지와 단둘이서 정읍-순천-여수-남해-사천-통영-거제-부산으로 이어지는 '남해안 대장정'을 떠난 적이 있었다. 이순신을 찾아 떠난 여행이었다. 그분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남해안 일대를 답사하는 것은 중학생 때부터 꿈꿔왔던 나의 오랜 버킷리스트였다.

여행 3일 차에 '통영 한산도'에 도착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을 설치한 곳. 세계해전사에 빛나는 한산해전의 현장. 장군의 지휘소가 있던 제승당 일대를 구석구석 둘러보며 감회에 젖어있던 중, 문득 발걸음을 멈춘 곳이 있었다.

바로 '활터'(한산정)였다.

"이곳은 이순신 장군이 진중에 계실 때 틈틈이 활을 쏘셨던 곳으로, 배를 타는 수군이 방향감각을 익힐 수 있도록 바다를 사이에 두고 과녁을 설치한 매우 과학적인 활터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활을 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보았으나, 실제로 국궁을 배워본 적이 없어 아쉽기만 하다. 내 소원은 언젠가 활을 제대로 배워 이곳에서 이순신 장군을 생각하며 활을 쏴보는 것이다." - 당시 블로그에 남긴 내 일기 중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 활을 쐈던 곳에서 활을 쏘면 얼마나 뿌듯할까.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됐다. 중학생 시절 <불멸의 이순신>을 보며 전통활쏘기(국궁)에 대한 로망을 처음 품었더랬다.

이때 한산도 활터를 찾은 나는 '언젠가 이곳에서 활을 쏘리라'는 보다 구체적인 버킷리스트를 추가하고 돌아왔다.

내가 바로 그 성공한 '덕후'
 
한산도 제승당 활터 '한산정' (2012.2.26 촬영)
 한산도 제승당 활터 '한산정' (2012.2.26 촬영)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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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본격적으로 국궁을 시작하면서, '활을 배우겠다'는 첫 번째 목표는 이뤘다. 그리고 두 번째 목표를 이루기 위해, 2022년 가을 활가방 하나 둘러메고서 무작정 한산도로 떠났다.

결과는 '입구컷'. 한산도 활터는 사적지라 일반 국궁장처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사전에 미리 경상남도청 허가를 받아야 하는데, 그 절차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인 2023년 여름, 꼭 11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서울의 국궁동아리 대학생들과 함께 했던 1박 2일 한산도 습사투어에서 마침내 꿈을 이룬 것이다.

한산도 활터에서 바다 너머 과녁으로 힘차게 화살을 날려보내고 난 뒤, 차오르는 감격에 눈물을 쏟을 뻔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실감났다. 나는 그야말로 성공한 '덕후'였다(관련 기사: 일행 모집에 심판 찾기, 힘들어서 더 즐거웠던 활쏘기 여행 https://omn.kr/257nl ).

다시 떠난 한산도 습사투어 
 
한산도 제승당 활터에서 활을 쏘는 기자의 모습 (2023.8.15 촬영)
 한산도 제승당 활터에서 활을 쏘는 기자의 모습 (2023.8.15 촬영)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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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산도 습사투어는 열렬한 이순신 덕후였던 나뿐만 아니라 함께 했던 학생들에게도 아주 특별한 추억으로 자리매김했다. 올해도 투어를 추진하면 함께 하겠다는 친구들이 많았다. 작년에 다녀온 학생들로부터 '너무 좋은 경험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함께 하고 싶다는 뉴페이스들도 줄을 이었다. 

그렇게 지난 5월 25~26일 1박 2일 일정으로 다시 한번 한산도 습사투어를 진행했다. 공항정·한양대·서울여대·광운대 국궁동아리 학생 13명으로 구성된 '습하' 팀과 함께였다. 

올해 투어는 작년보다 훨씬 알차게 구성됐다. 작년 투어를 통해 인연을 맺은 국궁145협동조합(이사장 임채훈) 측에서, 국가무형유산 전승공동체 활성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대학생들을 위한 1박 2일 패키지 프로그램을 지원해 준 까닭이다(여러모로 편의를 제공해주시고 환대해주신 한산도 주민 여러분과 국궁145협동조합, 통영 열무정 측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산도 제승당 충무사 앞에 선 '습하' 팀
 한산도 제승당 충무사 앞에 선 '습하' 팀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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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한산도에 상륙한 우리는 전통 한복으로 갈아입고서 제승당 충무사(사당)에 참배한 뒤 활터로 향했다.

"장군님, 살 나갑니다!"

전투 시작을 알리는 신호용 화살 '효시' 발사를 시작으로 습사가 시작됐다. 이날 한산도 주민들로 구성된 한산정 사원들과의 친선교류전도 펼쳐졌다. 이순신 장군은 군사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종종 편사(편을 갈라 활쏘기를 겨루는 것)를 진행한 바 있는데, 흡사 그 당시로 돌아간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 활을 쏘셨던 제승당 활터에서 활을 내는 대학생 궁사들의 모습
 이순신 장군이 실제로 활을 쏘셨던 제승당 활터에서 활을 내는 대학생 궁사들의 모습
ⓒ 국궁145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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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에는 한산도에 새로 문을 연 활터 '한산정(閑山亭)'을 방문했다. 제승당 활터와 이름은 같지만, 제승당에서 차량으로 10분 정도 소요되는 입정포에 새로 조성된 국궁장이었다.

한산정은 국궁145협동조합, 통영 열무정, 경남궁도협회 등 여러 단체들이 매번 육지로 나오기 힘든 한산도 주민들을 위해 마련한 곳이었다. 임시로 조성한 활터이기에, 당시 제대로 된 사무실이나 화장실 등의 편의시설은 당연히 찾아볼 수 없었다.

한산도 활터의 특별함... 매월 1회 체험프로그램
 
한산도 입정포에 조성된 활터 '한산정'
 한산도 입정포에 조성된 활터 '한산정'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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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악한 환경에서도 이순신 장군의 얼을 계승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활쏘기를 연마하는 한산도 주민들의 열정은 젊은 궁사들에게도 큰 자극과 감동을 안겨주었다.

개인적으로 기쁜 일도 있었다. 이곳에서 오랜만에 '몰기'를 달성한 것이다. 활량들에게 몰기야 언제나 기쁜 일이고 특별한 의미이지만, 이순신 덕후로서 장군의 넋이 깃든 한산도에서 5시 5중에 성공하자 그 사실이 더 감격스러웠다.

당신에 대한 지극한 연모의 정을 안고 한산도까지 내려온 내게 장군님께서 베풀어주신 특별한 선물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산도에서 각궁으로 5시 5중 몰기에 성공한 기자
 한산도에서 각궁으로 5시 5중 몰기에 성공한 기자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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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한산도는 작년과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물론이거니와 활량들에게조차 쉽사리 공간을 허락하지 않던 제승당 활터에 생긴 변화 때문이다. 

국궁 145 협동조합에서는 문화재청 국가무형유산 전승공동체 활성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4월부터 경상남도 제승당관리사무소·경남궁도협회·통영무형문화재보존협회 등과 함께 '한산도 활쏘기 체험 역사투어'를 개발하여 실시하고 있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마다 제승당 활터에서 일반 관람객들이 직접 활을 배우고 쏴볼 수 있는 체험프로그램이다. 뿐만 아니라 '한산도 무과시험', '전국 대학생 활쏘기대회' 등을 추진 중이라 한다. 

그동안 사적지라는 이름으로 방치되다시피 하던 제승당 활터가 박제된 공간에서 벗어나, 시민에게 열린 공간, 역사적 의미를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무척 고무적이었다. 늦었지만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산도 제승당을 찾은 어린이 관람객이 활쏘기를 체험하는 모습 (국궁145협동조합 제공)
 한산도 제승당을 찾은 어린이 관람객이 활쏘기를 체험하는 모습 (국궁145협동조합 제공)
ⓒ 국궁145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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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 활터에 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4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마치 이순신 장군과 마치 함께 활을 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와 백성을 지켜낸 충무공의 애민정신, 항일구국정신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코끝이 찡해진다.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곳은 대한민국에서 한산도 활터가 유일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계속해서 '한산도 습사투어'를 추진해 볼 생각이다. 이 벅차고 멋진 감정들을 보다 많은 이들과 공유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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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활, #활쏘기, #한산도, #통영, #이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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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생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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