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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암 손병희 선생 사진
의암 손병희 선생 사진 ⓒ 국가보훈처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그랬듯이 1919년 3.1혁명 역시 일제의 무력에 의해 처절하게 짓밟혔다. 3.1혁명은 시종 비폭력 평화적인 시위였는데도 일제는 포악무도하게 한국인을 살상하고 투옥하였다. 춘암은 경성복심원(최종심)에서 2년형을 선고 받고 1년 9개월의 옥고 끝에 1920년 10월 31일 출옥하였다.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갈수록 심해졌다. 동학혁명과  3.1혁명의 진원지가 동학 - 천도교라는 사실을 꿰고 있으면서 갖은 방법으로 탄압을 가중하였다. 엄연한 종교단체인데도 총독부는 종교부서가 아닌 경무부에서 천도교를 직접 관할했다. 동학의 3대 교조이고 천도교의 창설자인 손병희가 옥고와 고문 후유증으로 1922년 5월 19일 62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숨지기 전 잠시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물을 찾아 마시고는 대도주 춘암과 간병인·신도들에게 말하였다.

"나를 좀 일으켜 주게. 내 보여 줄 것이 있네.… 춘암, 내 어깨를 좀 보시오. 손으로 좀 만져 보시오. 어떻소? 보통 사람의 어깨와……"
"좀 두드러진 것 같습니다."
"그럴 것이오. 춘암도 잘 알지만은 내가 20년 가까이 해월 신사를 모시면서 가마 앞채를 혼자 메었소. 나도 사람인지라 힘인들 왜 들지 않았겠소. 꾹 참고 말 한 번 한 적이 없소. 아직 굳은살이 풀리지 않았을 것이오."

손병희의 얼굴에는 추연한 빛이 감돌았고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한 채 스승과 함께 보낸 옛 일을 회상하는 듯 하였다. 

"여러분들 수고했소이다. 나는 이제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하오. 우리 교회에서는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 뒷 일은 청년들에게 부탁하오. (주석 1)

해월이 노쇠하여 산간마을을 순방할 때 춘암이 가마를 메고 다니면서 팔에 굳은 살이 박혔던 것이다. 

의암의 서거는 춘암에게는 큰 기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총독부의 악랄한 포위망 속에서 천도교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존재가 큰 버팀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일제의 광풍을 막아내면서, 못 이룬 자주독립과 광제창생·후천개벽의 과제를 이루어야 했다. 

박인호는 천도교단 전체의 총력을 기울였던 3.1혁명에서의 의암의 지시에 의해 운동의 지원과 교단을 담당하는 등 2선의 책임을 맡았었다. 그는 3.1혁명 민족대표 48인 중 1인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박인호는 1920년 10월 출옥한 이후 3.1혁명의 자금마련을 위한 빌미로 추진하였던 대교당 건립에 박차를 가해 이듬해 2월 준공을 마쳤다. 그리고 1922년 1월에는 교주 취임식을 거행하여 실질적인 교단의 최고 지도자에 올랐다. 

그러나 박인호의 교주 활동은 순탄치 못했다. 3.1혁명 이후 천도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감시는 가장 극렬했다. 일부 지방교구라든가 전교실이 폐쇄되는 데도 있는 등 천도교의 3.1혁명으로 인한 후유증이 심대하였다. 특히 의암 손병희의 사망 이후 교단의 분화는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이미 1922년 천도교의 급진파인 천도교연합회 측이 분열해 나갔을 때 연합회파 측에서는 청년조직인 청년당에 대항하는 천도교유신청년회를 결성해 지방을 순회 강연토록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천도교의 본격적인 위기는 1925년의 제4대 교주인 춘암 박인호의 교주직 인정여부를 놓고 벌인 신구파의 분열이었다. (주석 2)
  
천도교는 의암의 사후 내우외환에 시달렸다. 절대적 권위가 사라지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여기에 총독부의 농간도 작용하였다. 내부의 분열이 나타났다. 천도교에서 3.1혁명 준비에 앞장섰던 최린이 차츰 변신하면서 그를 따르던 신파계열이 1925년 천도교의 기념일을 정비하면서 춘암의 승통기념일을 제외시켜버렸다. 그의 종통 승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천도교의 기념일은 먼저 천일(天日) - 4월 5일로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일으킨 날을 말하며 지일(地日) - 8월 14일로 해월 최시형이 수운으로부터 도통을 승계 받은 날이며 인일(人日) - 12월 24일로 의암 손병희가 해월로부터 도통을 전수 받은 날이고 도일(道日) - 1월 18일로 춘암 박인호가 의암으로부터 대도주의 종통을 전해 받은 날이다. 매 기념일에는 수 천명의 지방교인들이 서울로 올라와 성대한 기념식을 치렀다. 천도교 세력의 대 사회운동들은 이 행사들을 전후해 주로 일어났음이 의미 있다. (주석 3)

이 일을 계기로 천도교는 분열상태에 이르렀다. 천도교의 전위조직인 청년당도 분열상을 면치 못 했다. 

당시 천도교청년당의 주류는 신파인 최린계열이 다수였고 또한 중앙교단의 간부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복구운동 방지단'을 만들어 기존의 개정제도를 옹호하는 입장을 밝히고 '천도교청년에게 격하노라'라는 유인물을 배포하기도 했다.

그러자 구파 계열의 청년당간부인 박래홍·손재기·정정호 등과 일부 지회에서는 구파 종리원을 지지하여 천도교청년당을 탈퇴, 1926년 4월 5일 천도교청년동맹을 만들었다. 청년 조직의 양분과 활동의 이원화가 발생한 것이다. (주석 4)

춘암은 넓은 아량과 인내심을 갖고 분규를 조정하면서 질서유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박인호는 삶의 규범을 '한결같은 기도', '가식 없는 성실함', 그리고 '솔선수범하는 실천력'으로, 그의 성품을 '포용력', '지조정신', '비폭력'으로 규정한 것은 무극대도의 깨달음과 하늘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 정직성의 원칙과 상통한다." (주석 5)


주석
1> 성주현, <의암성사(손병희의 해외망명과 활동)>, 미간행 원고, 238쪽.
2> 임형진, 앞의 책, 208~209쪽.
3> 앞의 책, (주석 24)과 같음.
4> 앞의 책, 209~210쪽.
5> 조극훈, 앞의 책, 15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박인호평전#박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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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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