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암은 남씨 부인과의 사이에 박래원·박래철·박래천 등 세 아들을 두었다. 여기에 종숙인 박상호의 아들 박래홍이 사자(嗣子)로 수양되었다. 아들들도 모두 동학·천도교에 입도하여 치열하게 항일투쟁을 벌였다. 원래 가난한 살림인데다 춘암이 동학과 천도교 활동에 나서면서 재산을 일굴 겨를이 없었다. 해월이 투옥되자 그나마 가지고 있던 토지를 모두 팔아 옥바라지에 썼다.
한말~일제강점기 민족운동가들의 삶이 대부분 가정을 돌볼 처지가 못되었지만 춘암 역시 다르지 않았다. 전셋집으로 전전하다가 78세 때에 독지가 홍명희(벽초 홍명희와 동성이명)의 지원으로 겨우 집을 갖게 되었다.
춘암상사댁은 1908년 대도주가 된 이후 다동(茶洞)에 있다가 1910년대에는 가회동 의암 성사댁 길 건너 동쪽 언덕에 위치한 가희동 27번지(현재는 천주교 노틀담교육관이 자리하고 있음)에 있었다. 3.1운동 이후에 중앙총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1922년 11월에 의암 성사 집과 마찬가지로 가희동 집을 매각을 하고 의암성사 가족은 홍성으로, 춘암상사댁은 의암 성사가 거주하던 동대문 밖의 상춘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상춘원까지 보성전문학교로 넘어가게 되자 1927년 4월 15일 상사댁은 궁정동 전셋집으로 옮겼다가 1932년 9월 5일에는 다시 서대문정 2정목 14번지 전셋집으로 이전하였다. 이와 같이 전셋집을 전전하던 상사댁은 1933년 7월 3일 황해도 독지교인 홍명희가 마련해 준 수창동 92번지(현 동명은 내수동으로 서울경찰청 건너편 오피스텔 '경희궁의 아침'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의 집을 겨우 마련하게 되었다. (주석 1)
춘암은 과도기에 그리고 국난기에 천도교 종통을 계승하여 제4대 도주가 되어 재위(在位) 33년 동안 의암성사의 명을 받들고 자신의 구상을 설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크게 성사시킨 일을 들면 다음과 같다.
-. 교리 천명을 위하여 경향 각지에 교리강습소를 세우고 청년 도제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 의암성사의 신사병상의 도장 앞 후일 3.1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이 된 지방두목 500인의 수련 도장이었던 우이동 봉황각을 건립.
-. 경성(서울) 송현동 교당과 중앙총부 건립.
-. 지방에 36개 대교구와 수 백개소의 교구 설립.
-. 상사시대에 와서 3백만 교도로 늘어난 대교단 조직.
-. 보성전문학교·보성중학교·보성소학교·동덕여학교·전주·대구·청주 등 지방에 10여 개의 학교를 설립 또는 인수하여 교주(敎主)로서 10여 년 교육 사업을 하였다. 포덕 60년에 성사, 민족대표 33인과 같이 3월 1일 조선독립을 선언하실 때 성사께서 2월 28일에 유시문을 춘암 대도주에게 수하시었다. (주석 2)
주석
1> 박래원 엮음, <춘암 상사의 생애와 사상>, 천도교중앙총부, 1971.
2> 앞의 책, 1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동학·천도교 4대교주 춘암 박인호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