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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기사(글쓰기 하나로 9백만 원 받고 호주 다녀왔습니다 https://omn.kr/29cie )에서 이어집니다.

지난 5월 말, 2주간의 호주 여행에서 여러 한국 청년들을 만났다. 이들을 가장 먼저 만나고 싶었던 이유는, 많은 청년들이 워킹홀리데이나 유학 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고 어떻게든 호주에서 정착하고자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였다(호주는 시간당 최저임금이 한국의 약 두 배로, 급여를 높게 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이야기가 바로 내가 만난 청년들의 이야기였다. 소설의 주인공은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20대 청년 '계나'다. 좋은 대학 졸업장도, 번듯한 직장도, 부유한 부모도 없이 한국에서 팍팍한 계약직 생활을 전전하던 계나는 20대의 끝자락에 워킹홀리데이 막차를 타고 호주로 떠난다. 학력과 직장, 재력, 외모 등 한국에서의 사회적 족쇄를 모두 벗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서다.

나도 비슷한 이유로 한국을 떠나 스웨덴으로 이민가는 걸 꿈꾼 적이 있다.
 
 호주에서 한국이 교민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시드니. 하버브릿지와 오페라하우스가 장관이다.
 호주에서 한국이 교민이 가장 많이 사는 도시, 시드니. 하버브릿지와 오페라하우스가 장관이다.
ⓒ 김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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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호주에 방문해, 호주 시드니와 멜번, 퍼스에서 한국 청년들을 만나며 나는 호주가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여전히 '기회의 땅'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각자가 원하는 행복을 쟁취할 수 있는 기회의 땅 말이다.

다양한 한국 청년들을 만났다.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동생과 함께 유학 온 학생, 16살에 호주로 이민 왔다가 한국으로 취업 후 다시 역이민 온 청년, 워킹홀리데이 프로그램으로 호주에 왔다가 아예 자리 잡고 영주권을 받으려 준비 중인 청년, 호주에서 자기 이름을 내건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전 세계에서 인정받는 석조 조각가 등.

그런데 이 대한민국의 청년들은 영어라는 언어의 장벽, 외로움, 한국보다 비싼 물가 등을 차치하고라도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 즉 호주에 남기로 택했다. 왜일까?

불편하고 힘들지만 호주 남으려 하는 이유

한국에서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호주로 온 청년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언어 장벽, 수많은 행정 절차와 정착 비용,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기 위한 수고로움을 감수하더라도 호주에서의 삶이 더 행복해요. 무엇보다도 여기는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곳이거든요. 그 행복이 모든 힘듦을 상쇄시켜요."
 
 2024년 5월 23일 당시, 호주 멜번대에서 한국과 호주 청년들이 다양한 사회 이슈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2024년 5월 23일 당시, 호주 멜번대에서 한국과 호주 청년들이 다양한 사회 이슈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 James Fretw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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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한 곳, 나아가 소중한 가족이 있는 곳이지만, 역설적으로 한국에서는 그 자신이 가장 편하지 않고 모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진다고 그들은 말했다.

한국 사회 안에서의 '성공'은 너무 한정적이다. 서울권 4년제 대학, 대기업 취업, 브랜드 아파트 소유 등 사회가 소위 성공적이라고 정해 놓은 길이 너무 좁다. 그 길을 벗어나면 취업, 임금, 자녀 양육에 있어 성공을 이룩한 사람과 격차가 난다. 

때문에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청년들은 거의 늘 피 터지게 경쟁하며, 각자의 고유한 관심사와 재능은 일단 묻어두게 마련이다. 한국에서는 내 모습 그대로 존재하고자 하는 노력은 유별나게 여겨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인간은 개별적인 존재다. 내가 나로서 온전히 인정받고 살아갈 수 있는 자유를 쟁취하는 것만큼 큰 성취와 행복이 어디 있을까?

호주에서 내가 만난 서른 초반의 한 청년은, 호주에서는 학력, 전공, 과거 경험 등 편견 없이 취업이나 커리어 전환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에서는 이직 시 유사 경력 여부가 굉장히 중요한데, 호주에서는 다른 분야로도 이직이 유연하다는 얘기다.

그는 자신도 그랬다며, 호주에선 한국보다 더 주도적으로 내 삶을 설계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저는 실용 음악 전공 후 호주에서 바리스타로 서비스직에서 오래 일하다가 처음으로 서비스 분야의 사무직 일을 시작했어요. 어쩌면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이직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면접을 본 호주 매니저는 제 서비스직 경력을 높게 쳐주었어요.

분야는 다르지만 고객과의 최접점에서 일한 경험과 직원들을 관리하며 쌓은 리더십이 새로운 업무를 수행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과거 경력을 편견 없이 바라봐 준 매니저 덕분에, 새로운 분야에서 또 다른 경력을 쌓아 나가고 있어요."


일이든 사람이든, 편견을 벗겨내고 볼 때 우리는 본질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 호주에서 만난 1.5세대 교민분도 있었다. 45년 전 호주로 왔다는 이 교민 분은 호주인들이 요즘 선호하는 결혼 상대의 직업이 배관공이라고 말씀하셨다. 상상조차 못했던 직업이라 깜짝 놀라서 내가 그 이유를 여쭤봤더니, '수입이 좋고 업무 시간이 유연하며, 가족 중심적인 삶을 살 수 있어서'란다.

배관공은 전문 기술직이라 시급도 높은 데다 회사에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얽매여 있을 필요가 없다고. 그래서 내 하루를 주도적으로 운용할 수 있어 각광받는다고 한다.

아무리 수입이 좋더라도, 배우자나 내 직업을 '배관공'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하는 게 한국에서는 과연 가능할까?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에 괜스레 뒷맛이 씁쓸해졌다.

개개인의 고유성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곳

서호주에서는 석조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는 Jina Lee는 서울에서 대학원까지 공부를 마치고 여러 나라를 여행하다 호주에 정착했는데, 호주를 넘어 한국, 프랑스 등 글로벌 무대를 바탕으로 활동한다.
 
 호주 퍼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석조 조각가 Jina Lee
 호주 퍼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석조 조각가 Jina Lee
ⓒ 김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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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호주가 이민자의 나라인 만큼, 호주로 온 사연이 각기 다르고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숫자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하며, 그 이야기에 사람들이 관심이 많다고 했다.

여러 작품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I'라는 조각상이었는데, 호주로 이주하면서 한국인으로서 평생 지녀온 정체성의 일부를 싹둑 자르고 호주에서 자기만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를 나무를 옮겨 심는 것에 빗대어 표현했다.

'나로서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 여기선 공허한 말이 아니었다. 가족조차 잘 인정해 주지 못하는 각자의 고유성이 온전히 인정받고, 이를 바탕으로 살아갈 수 있는 곳. 이런 의미에서 호주에서 많은 청년들이 각자의 몫을 해내며 더 행복한 것이 아닐까? 

정신과 의사 정혜신은 자기 저서에서 "존재 자체를 몸에 비유한다면 외모, 권력, 재력, 재능, 학벌 등은 몸을 감싼 여러 겹의 옷들이다"라고 말하며, 이런 것을 다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 존재에 집중하지 못하면 인간은 허기질 것이라고 강조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존재 자체보다 그가 어떤 옷을 입는지, 몸을 감싼 '옷들'이 뭔지에 대해 먼저 집중하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드는 무언가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서로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인정하는 다정함, 그리고 서로의 다양함을 인정하는 유연함만 있으면 된다. 존재에 대한 관심은 한 사람을 살릴 수 있고, 나아가 사회 전반적으로 다양한 문화유산을 키우는 씨앗이 될 수도 있다.

가족도 못해 주는 일을 낯선 나라의 제도와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 해주는 덕분에, 이민자로서의 고생길이 뻔하지만 많은 청년들이 호주에서 제2의 삶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장강명 작가의 원작 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오는 8월 영화로 개봉한단다. 홍보 포스터에 적힌 "나는 새롭게 시작하기로 했다!"라는 강렬한 카피가 호주에서 만난 청년들의 외침으로 다가왔다.

호주는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곳에서 그들은 더 큰 자유와 행복을 찾아가고 있는 듯 보였다.
 
 오는 8월 개봉 예정인 <한국이 싫어서> 영화 포스터
 오는 8월 개봉 예정인 <한국이 싫어서> 영화 포스터
ⓒ 엔케이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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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enerdoheezer)에 최근 게재된 글을 보완해 작성했습니다.


#호주#N포세대#청년#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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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까지 여권도 없던 극한의 모범생에서 4개국 거주, 36개국을 여행했습니다. 영국인 남편과 함께 현재 대만에 살고 있습니다. 다양한 해외 경험을 통해 '자기 성찰'의 기회를 많이 얻었습니다. 여행과 질문만이 내 세계를 확장시키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하며, 글을 통해 해외에서 배운 점을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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