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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림마을 국사암 가는 길
▲ 구림마을 국사암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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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月出山)은 여인을 닮았다. 봄날 유채꽃 위 월출산은 노란 스커트에 연녹색 탱크톱을 입은 발랄한 아가씨였다. 여름날 장마와 장마 사이 구름 아래 월출산은 옷깃 여민 다소곳한 중년 여인 같았다.

향찰식 표기로 '월(月)'은 '달'이 아닌 '돌'이라고 한다. 본래는 '돌이 솟아나는 산'이 었다. 남쪽으로 구림리 모정마을이 있다. 마을 앞 저수지에 달밤에 비치는 모습이 아주 예뻤다고 한다. 이 고장 출신 하춘화의 '영암 아리랑'도 한몫했을 터이고. '달이 뜨는 산'이 되었다.

비가 오는 것도 오지 않는 것도 아닌 장마가 2주 넘게 계속되었다. 마른장마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그런 날이. 비가 잠시 주춤한 7월 13일, 영암으로 갔다. 불어오는 바람에 구름이 흘러가고 지나가는 바람에 풀잎이 기우는, 나들이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었다.

영암을 기(氣)의 고장이라고 했다. 월출산이 지상의 기를 모아 하늘로 솟구치는 형국이기 때문이라며. 이천이백여 년 전, 그 기를 받아 들어선 마을이 있다. 구림이다. 왕인이, 도선이, 최지몽이 태어난 곳이다. 예전에는 천호 이상 되는 큰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눈에 띄는 건 큼직큼직 널찍널찍했다. 전통 한옥 마을이라는 정취는 느낄 수 없었다.

신라 말엽, 어느 겨울. 이 마을에 사는 최씨 집안의 처녀가 시냇가에 나갔다가 떠내려오는 커다란 오이를 먹었다. 이후 배가 점점 불러오더니 이듬해 가을 아들을 낳았다. 부모는 갓난아이를 바위 아래에 내다 버렸다.

며칠이 지났다.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 가보니 비둘기 떼가 날개로 아이를 덮어 보살피고 있었다. 그 아이가 풍수도참의 시조인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다. 아이가 버려졌던 바위는 '국사암(國師巖)', 마을은 비둘기 떼가 많다 하여 '구림(鳩林)'이라 불리게 되었다.
 
백의암  본래는 섬이었다.
▲ 백의암  본래는 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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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와 관련된 전설이 있는 바위가 하나 더 있다. 흰돌바위 또는 백암이라고도 불리는 백의암(白衣巖)이다. 국사암에서 5분 거리에 서구림리 백암동 마을 앞 들판 가운데 있다. 간척 전에는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이었다.

중국 황제가 묫자리를 잡으려고 도선을 데려갔다. 배를 타고 가던 도선이 이 바위 앞을 지나다가 옷을 벗어 던지며, 살아 있으면 바위가 하얀 채로 있을 것이며, 죽으면 검게 변할 것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어떤 이는 도선은 중국에 간 적이 없다고 잘못된 표현이라고 한다. 아무렴 어떤가. 오이 먹고 태어난 분인데. 데크로 둘러싸인 바위는 대부분이 검었다. 이곳이 섬이었다면 바닷물에 씻겨 흰색이었을 것을. 아주 일부지만 하얀 부분도 있었다. 영원히 살아 있기를 소원했다.

상대포(上臺浦)로 갔다. 백의암에서 큰길을 건너면 되었다. 연못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호수라고 하기에는 작았다. 바위 절벽 아래 배를 댈 수 있었고, 건너편에는 상대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했다. 돛배 한 척이 여유로웠다. 산책로가 있었고, 다리가 물 위를 가로질렀다. 잉어가 반겼고 연꽃이 여름임을 알렸다. 

"구림마을은 상대포가 중심이었습니다. 고대 서남권의 국제 무역항이었어요. 왕인 박사도 이곳에서 배를 탔어요. 최치원이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상대포에서 흑산도까지 이틀, 그곳에서 중국 영파항까지 다시 이틀거리였습니다.

상대는 여기 바위 이름입니다. 배를 대기 좋은 높은 곳이지요. 지금 같으면 선착장을 콘크리트로 만들었겠지요. 현정은이라고 아시죠. 현대그룹 회장님요. 1943년도에 그분 할아버지께서 바닷물을 막았어요. 간척지가 한 260만 평 생겼죠. 그러니까 바닷물이 안 들어온 지도 벌써 80년이 넘었습니다."

 
상대포 사진 하단 바위가 '상대'다. 절벽 바위로 이곳에서 배를 탔다.
▲ 상대포 사진 하단 바위가 '상대'다. 절벽 바위로 이곳에서 배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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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포가 국제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치던 시절, 첨단산업은 도자기였다. 바로 앞에 자리잡은 도자기 박물관으로 갔다.

"8~9세기 당시 영암은 영산강에서 바다로 나가는 남서해안의 중심지였습니다. 국내 연안 항구 도시뿐만 아니고 국제 중국과 일본으로 연결되는 국제 항구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대규모 생활도기 산업단지였고요.

도자기는 도기(陶器)와 자기(瓷器)를 아우르는 말이에요. 편하게 도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고 낮은 온도에서 구운 것을, 자기는 유약을 바르고 1200℃ 이상 고온에서 구운 것이지요. 구림도기는 유약이 없는 무유도기에서 유약 바른 시유도기 문화로 전환되는 계기를 마련한 곳입니다. 고려 때 강진에서 청자가 만들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하지요."


왕인을 만나보기로 했다. 영암을 물으면 그를 먼저 이야기하고, 그의 이름을 딴 축제가 있기도 해서다. 왕인 박사는 4세기 백제 사람이다. 학문에 두루 밝은 사람을 박사라 하였다.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갔다. 아스카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했다. 소통과 상생의 산증인이자 영암의 자랑스러운 인물이라고 안내했다.

왕인박사유적지는 구림마을 위쪽에 있었다. 규모에 압도당했다. 60만 평, 축구장 270여 개의 면적이다. 청와대 본관 닮은 전시관이 기를 죽였다. 양념처럼 동상이 있고, 일대기를 표현한 석조 부조가 있고, 일본에서 선물했다는 조그마한 정원이 있고, 가묘가 있다. 소박한 시설이 더 무게감 있지 않았을까, 아쉬웠다.
 
갈낙탕 소갈비와 산낙지를 넣고 끓인 맑은 탕이다.
▲ 갈낙탕 소갈비와 산낙지를 넣고 끓인 맑은 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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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출산도 식후경이다. 남쪽으로 10여 분 달려 독천 낙지 거리로 갔다. 연포탕과 갈낙탕 사이에서 망설였다. 갈낙탕이야 갈비와 낙지로 끓인 탕이라고 짐작이 갔지만, 연포탕(軟泡湯)은 와 닿지 않았다.

네이버에 물었다. 국어사전은 "쇠고기, 무, 두부, 다시마 따위를 맑은장국에 넣어 끓인 국. 초상집에서 발인하는 날 흔히 끓인다"라고 하였다. 연폿국이라고도 했다. 나무위키에서는 "낙지를 넣고 끓인 찌개로 해산물 찌개의 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독천식당 주인장은 갈낙탕을 이렇게 소개했다.

"이곳 지명이 독천인데, 큰 시장이 있었어요. 소를 많이 팔았대요. 그래서 송아지 독(犢)자를 써서 독천이라고 불러요. 지금도 오일시장이 서요. 부모님이 이곳에서 갈비탕을 팔았어요.

문수포라고 바다가 가까웠습니다. 그곳 뻘에서 낙지가 엄청 많이 잡혔어요. 이곳 독천장에서 팔았답니다. 우리 집 앞이 전부 낙지를 파는 빨간 대아였어요. 갈비탕에 낙지를 넣어서 끓여봤답니다. 손님들이 맛있다고 그러더래요. 70년대에 열었으니까. 벌써 50년이 넘었네요."


지리한 장마에 눅눅해진 이불을 쨍한 햇살에 말린 듯한 개운한 맛이었다. 연포탕이 건조만 한 것이라면 갈낙탕은 다림질까지 한 것이라고 할까. 세하(細蝦)젓도 일품이었다. 아주 작은 새우로 만든 젓인데, 자하젓이라고도 했다. 하얀 새우가 숙성되면서 보랏빛으로 변하기 때문이란다. 조선시대 때 증국 사신이 이 젓을 먹고 너무 맛있어서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감동젓이라고도 불린댔다. 눈처럼 새하얀 쌀밥에 젓갈 넣어 비벼 한 입, 눈물을 흘렸다던 중국 사신이 이해되었다.
 
도갑사 사진 속 사진은 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대웅보전. 성보박물관에서 촬영했다.
▲ 도갑사 사진 속 사진은 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대웅보전. 성보박물관에서 촬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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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맛을 찾아 도갑사로 방향을 잡았다.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구림마을에서 멀지 않았다. 구정봉을 지나 천황봉에 이르는 월출산 등산로 초입이다.

신라의 4대 고승에 속하는 도선국사가 헌강왕 6년에 창건했다. 이전 문수사라는 쇠락한 절이 있었다고 하니 중창이라고 보아도 될 듯하다. 수미선사가 1456년(세조 2년)에 966칸의 대가람으로 중창했다. 절 뒤편 월출산 오르는 길로 용추폭포를 지나면 도선수미선사비가 있다.

"하나의 비석에 창건한 도선국사와 중창한 수미선사 두 분의 업적을 기록했습니다. 높이는 5m가량 됩니다. 비석을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아마도 우리나라 비석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아닐까 싶어요. 받침인 거북은 이곳 돌이지만 몸체는 대리석이에요. 익산에서 배로 싣고 왔다고 해요. 예전에는 밀물 때 이곳까지 합니다. 보호각을 좀 크게 지어 여러 각도에서 입체적으로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관음32응신도 성보박물관에서 쵤영했다.
▲ 관음32응신도 성보박물관에서 쵤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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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갑사에서 빼놓지 말아야 할 곳이 성보박물관이다. 주말에만 볼 수 있다. 해탈문에 있던 코끼리 탄 보현보살과 사자 탄 문수보살상도 이곳에 있다. 코끼리와 사자 엉덩이가 너무 예쁘다. 오동통한 뒤태가 상큼하고 귀엽다. 제일인 것은 '관음 32응신도(觀音三十二'應身圖)이다. 아쉽게도 원본은 아니다. 실물대 정밀 복사본이다. 유홍준은 이렇게 평했다.
 
"조선시대 불화의 최고 명작이다. 일본의 지은원이 소장하고 있다. 높이 2.3미터, 폭 1.3미터다. 이 두루마리 탱화는 화려한 고려 불화의 전통과 조선 전기의 산수화풍이 어우러진 명작이다. 1550년 인종 왕비인 공의왕대비가 돌아가신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이자실(李自實)에게 그리게 하여 이곳 도갑사에 봉안했다.

관세음보살이 32가지로 변신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그림으로 풀어낸 것이다. 1996년 국내에 공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몽유도윈도> 못지않게 이 작품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임진왜란, 또는 그 직전 이 일대에 빈발하던 왜구들이 약탈해 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월출산 들판이 지금은 벼가, 봄날엔 유채꽃이 주인이다.
▲ 월출산 들판이 지금은 벼가, 봄날엔 유채꽃이 주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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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났던 문화관광해설사들은 월출산 둘레길인 기찬묏길를 이야기했다. 조훈현 바둑기념관과 트로트 전시관이 있는 가야금산조 테마파크 기찬랜드도 추천했다. 여름에는 물놀이장도 개장한다며. 하늘 아래 첫 부처길도 빼놓지 않았다. 국보 제144호 '영암 월출산 마애여래좌상'을 최단 거리로 만나볼 수 있는 등산로라면서.

그 바람을 여행기에 넣지 않았다. 내가 찾던 영암적인 것에는 어울리지 않다고 여겨서였다. 미안할 뿐이다. 영암 여행을 정리하며 상전벽해(桑田碧海)를 떠올렸다.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었다라는 뜻으로 세상이 몰라 볼 정도로 바뀐 것을 말한다. 이 말을 뒤집었다. 영암은 '벽해상전'라고. 바다에서 육지로 바뀐.

왕인 유적지를 나오길 해설사가 무화과 빵을 소개했다. 무화과 모양의 빵에 무화과 잼을 넣었다고. 예로부터 영암은 무화과가 유명했다면서. 삼호읍 대불공단 쪽이었다. 귀갓길 방향이 맞지 않았다.
 
영암고지도 하단 하얀 원이 상대포가 있는 구림이다. 지금과 다른 모습이다.
▲ 영암고지도 하단 하얀 원이 상대포가 있는 구림이다. 지금과 다른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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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의 중심은 시대에 따라 물길을 따라 오르내렸다. 영암의 옛 이름은 옹주였다. 신라 때는 도호부가 설치되었다. 고려 때 중심이 나주로 옮겨가서 조선 때 번영을 구가했다. 지금은 무안으로 옮겨갔다.

백의암 바위가 검어질 것 같지 않다. 민주주의의 미덕은 다양한 의견일 것이다. 이 미덕이 불편할 때가 있다. 무언가 옮길 것을 정할 때다. 이때 만능열쇠가 풍수다. 비둘기가 지켜 낸 한반도 최대의 설득 시스템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전라남도청도 무안에 자리 잡으며 명당이라고 자랑했다. 문득 그 입지가 궁금해졌다.

여행을 계획하고 안내한 화순군 최순희, 여행지에서 만난 영암군 한은화, 유승열, 정희봉 전남문화관광해설사님께 고마움 전한다.

덧붙이는 글 | 화순매일신문에 실린다. 네이버블로그(cumpanis) <쿰파니스 맛담멋담>에서도 볼 수 있다.


#영암군#월출산#화순매일신문#쿰파니스#전남세계관광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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