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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함은 오랫동안 나의 관심이었다. 스스로 선보다는 악과 가까이 있다는 자각에 오랫동안 곤란해 했던 탓이다. 남과 다른, 남보다 못하게 다가오는 성질과 기질이 스스로를 갉아먹을 때가 많았다. 왜 나는 남들과 다르게 느끼는가. 왜 나는 남들과 달리 사고하는가.

선과 악을 오래 바라본 결과, 나는 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낼 수 있었다. 선은 나 아닌 무엇을 위하는 마음이다. 악이란 오로지 나를 위하는 마음이다. 선한 이는 자주 나를 희생하여 남을 이롭게 한다. 나의 시간을, 노동을, 때로는 그보다 큰 희생을 감당하며 나 아닌 무엇을 위한다. 악한 이는 그 반대다. 나를 위해 나 아닌 것을 해치길 주저하지 않는다. 때로는 이익을, 때로는 그저 쾌락을 위하여 나 아닌 것을 해한다.

남보다 악에 가까이 태어나고도 남보다 선 가까이 다가서는 삶, 그것이 오랫동안 나의 관심이었다. 역사와 철학은 내게 그 길을 보여주었다. 수없이 많은 선한 이가 악을 이루고, 또 적잖은 악한 이가 마침내 선을 이루었음을 나는 알았다. 그리하여 나는 꾸준히 스스로를 선한 길로 인도하는 삶을 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선과 악에 대하여 오랫동안 이어온 고민은 자연히 그에 대해 민감한 감각을 갖도록 했다. 그로부터 나는 선한 이와 악한 이를, 또 일상의 선행과 악행을 곧잘 구분하곤 한다. 세상엔 남보다 훨씬 선한 이들이 있고, 그 반대도 있다. 타고나길 더욱 선한 자들에게 나는 어떤 위화감과 함께 경이로움을 느끼고는 한다.
 
삶은 그렇게 납작하지 않아요 책 표지
▲ 삶은 그렇게 납작하지 않아요 책 표지
ⓒ 책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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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의 시선이 닿는 곳을 읽어보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선한 사람들에겐 내 눈에 띄지 않는 것이 눈에 띌 때가 많다. 6인실 병실에서 누구도 돌보지 않는 화분을 살려내는 사람처럼, 나는 있는 줄도 몰랐던 화분이 목말라 한다며 물을 주던 내 아버지처럼 말이다. 올해 초 출간된 짧은 호흡의 에세이집 <삶은 그렇게 납작하지 않아요>의 저자 김나리가 바로 그런 선한 이다.

300여 페이지의 책 안에 80여 편의 글이 들어찬 에세이집엔 김나리라는 한 인간의 삶을 다각도에서 조망할 수 있는 단서들이 가득 담겨 있다. 그중 하나의 에피소드는 고시원 앞길에 쌓인 봉지와 그 앞을 지키는 50대 여성의 이야기다. 당시 저자는 서울 도심 S리빙텔이란 고시원에 살던 모양인데, 개인사로 며칠 간 이곳을 떠나 있게 된 모양이다. 그는 고시원 앞에 쫓겨나 있던 이 여성이 신경 쓰였던지, SNS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린다.
 
'혹시 종로/서대문 근처 계시는 분 계시면 'S리빙텔' 앞을 지나는 척하며 거기서 계시는 50대 여성에게 말이라도 걸어주세요. 제가 내일부터 여행이라 살펴보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저를 대신해서 도와주실 분이 계시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제가 맛있는 식사 대접할게요. 그 분께 바로 먹을 걸 사다 주셔도 좋아요. 관계 맺는 게 시작되면 부담스러워하시지만, 지나치는 사람의 온정은 고마워하십니다. (후략)' -191p
 
월세를 내지 못해 퇴거당한 세입자는 봉다리 몇 개에 제 온 짐을 다 넣은 채로 갈 곳이 없이 고시원 앞에 가만히 섰다. 그런 그녀를 안쓰럽게 여긴 저자는 수시로 그녀에게 말을 걸고 어떻게든 도울 방법을 모색한다. 마음을 쓰고 관심을 준다.

코로나19 가운데 세입자 퇴거 조치 금지조항을 마련했던 독일과 한국의 현실을 비교하며, 국가의 사회보장의 허실로 생각을 뻗쳐나간다. 저자가 있었던 곳에 내가 섰다면 나는 과연 다른 누구의 사정에 눈을 돌렸을까를 생각한다. 아마도 그와 같지 않았을 테다.

존중, 소통 그리고 빵... 한국에서 찾지 못한 3가지

저자 김나리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40대, 여성으로 태어났으나 성정체성은 통상의 여성과 같지 않다. 스스로를 레즈비언이라 공표하는 이이고, 제주도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한국에서 기계공학과에 입학했으나, 대학교 1학년 때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가 영화를 전공했다.

다큐멘터리 편집 일을 오래 했고, 한국으로 돌아와선 미디어 콘텐츠 사업을 벌여 제법 주목받았으나 결과적으로 쫄딱 망해버렸다. 수억에 이르는 빚을 어찌어찌 갚아내었고, 잔고 9만 얼마쯤을 갖고서 생에의 의지를 불태운다.

책을 통해 내게 다가온 첫 인상은 그가 선한 사람이란 것이다. 내 눈에 띄지 않는 많은 것이 그의 눈에 띈다는 것, 그중 약하고 외로운 것에 기꺼이 손을 내민단 것, 기본적으로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 등이 모두 내게는 그와 같이 다가온다. 그 선한 마음으로 독일과 한국에서 살아낸 지난 세월을 읽어내는 것이 내게는 사회를, 특히 한국사회가 어떤 모습인지를 깊이 이해하는 계기로써 다가든다.

스스로 경계인이라고 표현하는 그의 글 가운데서 한국의 오늘이 읽힌다. 독일에선 자연스러운 것이 한국에선 그렇지 않을 때다. 이를테면 그는 독일에서 동성 애인과 결혼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에선 그럴 수가 없다. 동성 결혼이 허락되지 않아 법적 가족이 될 수 없다. 법적 권리는 물론, 장례식에서 상주가 되거나 병원에서 보호자 역할을 할 수도 없다. 그밖에도 얼마나 많은 소소한 차이와 차별이 있을지 책 몇 줄 읽고서 감히 그를 안다고 말하기가 어렵겠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다가 다시 찾은 독일이었다. 독일 친구가 그에게 '한국에서 살며 독일의 무엇이 제일 그리웠느냐'고 묻는다. 그의 답이 무엇이었을까.

Respekt, Kommunikation und Brot.

존중과 소통, 그리고 빵이었단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그가 한국에서 채우지 못한 것이, 그러나 독일에는 있는 것이 존중과 소통이라니, 못내 반박하고 싶어진다. 이곳 또한 사람이 사는 곳인데 어째서 그것이 없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가며 그곳과 이곳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니, 이것이 경계인이 쓴 책을 읽는 맛이 아닌가 한다.

소비하지 않는 사람이 더 초라한 나라

그는 적는다. 한국에서 찾기 어려웠던 소위 '스몰토크'의 상황들을, 어쩌다 마주한 대화도 일방적 배설로 끝나기 일쑤였던 모습들을 말이다. 또한 갑과 을의 이분법적 권력관계가 흔히 작동되는 한국사회의 일면들도 인상적이다.

이와 같은 특징에 대하여 독일의 어느 친구는 '한국은 독재를 얼마나 오래 겪었느냐'고 묻고 자살률이 어떠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구 동독 사람들도 서독보다 적은 사회적 소통과 권력관계에서의 존중 부족으로 괴로워하는 상황이 많았다며.

그가 독일과 한국의 차이를 또 달리 묘사하는 대목이 있다. 내게는 이 또한 인상적이었는데, 그는 이렇게 표현한다. 그에게 독일은 '소비하지 않는 사람이 덜 초라한 곳'이다. 반면 서울은 '돈을 열심히 벌어도 초라하지만, 그럴수록 도시는 더 화려해지는 곳'이다. 어쩔 수 없이 한국과 독일을 모두 고향처럼 여기는 그가 두 나라를 묘사하는 모습이 낯설면서도 어딘지 이해가 되는 기분이다.

글로써 뒤따른 김나리의 삶은 결코 만만치 않다. 아버지의 가정폭력과 이혼한 부모, 십대 학창 시절부터 홀로 꾸려나가야 했던 삶, 가난이 가난인 줄도 몰랐던 오랜 시간들, 다른 성적 지향으로 고통 받아야 했던 나날까지가 하나하나 버겁게 다가선다.

그러나 그는 다른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제 고통을 제 등짝에 진 채로 한걸음씩 나아가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오늘에선 제 삶을 지탱한 어른만의 기개가, 끝나지 않은 삶을 기꺼이 마주하는 이의 진취성이 읽힌다. 그리하여 나는 '삶은 그렇게 납작하지 않'다는 김나리의 말에 깊이 공감하게 된다. 납작하지 않다. 이런 삶은 납작할 수가 없다.

쉽게 지지 않는 선함을 지켜보는 맛

<삶은 그렇게 납작하지 않아요>가 주는 가장 큰 미덕은 현실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선이 패하지 않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김나리는 타고 나길 선한 이다. 그러나 더욱 좋은 점은 결코 만만치 않은 삶 가운데서도 제가 지닌 선을 훼손치 않고 지켜낸다는 점에 있다. 전장연 파업 시위로 회사에 오지 못한 직원의 연락에, 대표였던 그는 SNS에 이와 같은 글을 올렸다.
 
'오늘 우리 직원 한 명은 결국 한참 지하철에서 기다리다가 집으로 돌아갔고 오피스로 출근을 하지 못했어요. 전장연 시위가 길어졌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전장연의 면담 요구를 기재부가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더군요. (중략) 기재부는 기업과 개개인에게 이런 비용을 떠안기고 있습니다. 전장연의 요구를 들어주세요. 그때까지 우리 회사는 지각으로 연대하기로 했습니다.' - 130p
 
글은 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사회에 문제의식을 환기하는 계기가 됐다. 마음처럼 되지 않는 상황으로 회사가 문을 닫게 된 뒤, 제주에서 농사를 짓게 되는 때가 있다. 그때도 그는 이런 글을 써내려 간다.
 
나는 호미질을 하면서도 땅속에 사는 애벌레나 곤충들이 다칠세라 조심하게 됐다. - 232p
 
통상의 수필보다는 훨씬 짧은 글 모음집이다. SNS, 특히 인스타에 올릴 법한 길이로 쓰인 여든 편이 넘는 에피소드가 가난하고, 그리 화목하지 못했던 가정의 자식이며, 레즈비언이고, 많은 소비를 하지 않는 사람인 그의 삶을 조각보처럼 이어붙여 내보인다. 무척 짧은 호흡의 글뿐이라 보다 문학적이고 깊이 있는 무엇을 원하는 이에게는 아쉬움이 느껴질 수 있을 듯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이 읽을 가치가 있다 믿는다. 선함에 따라붙는 흔한 인식, 선함이 약하고 깨어지기 쉽다는 생각을 수시로 격파해내기 때문이다. 쉬이 지지 않는 선함을 지켜보는 맛이 적잖이 쏠쏠하다. 나는 이 책이 많이 팔려서 저자가 흐뭇하게 웃는 날이 오길 바란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서평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독서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삶은그렇게납작하지않아요#책나물#김나리#에세이#김성호의독서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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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영화평론가.서평가.기자.3급항해사 / <자주 부끄럽고 가끔 행복했습니다> 저자 / 진지한 글 써봐야 알아보는 이 없으니 영화와 책 얘기나 실컷 해보련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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