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30점 좋아해!"
시험이 있다고 하는 아이들에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최선을 다하되 시험 결과에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으면 해서 한 말이었다.
그런데, 아빠를 너무 사랑한 탓일까? 어느 날 둘째가 '대단히' 기뻐하면서 말했다.
"아빠! 나 30점 맞았어요!"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파악하기 위해 버퍼링을 거쳐야 했다. "어? 어...어... 잘했네~ 우리 따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버퍼링에 걸렸다.
어렵사리 1년 치 쿨함을 다 소진하고 사실 확인에 나섰다. 뒤 페이지까지 문제가 있는 줄 몰랐다는데 앞 페이지도 반 정도 틀린 걸로 봐선 실수로만 나온 결과는 아니었다.
해맑게 웃는 아이. 아빠의 바람대로 아이는 기죽거나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문제는 나였다. 분명 원하던 모습인데, 너~무 해맑아서 어쩐지 가슴이 시렸다.
괜찮다고 했는데 괜찮지 않았던 마음. 뒤늦게 조금 안도했던 마음까지. 줏대 없고 말랑한 이 마음이 걱정된다. 나, 잘하고 있는 걸까?
아이가 흘린 눈물의 의미
그 일이 있은 후, 둘째 아이가 수학 숙제를 할 때였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학교에서 받아 온 문제지를 풀고 있는 아이. 그런데 아이의 뒷모습이 왠지 너무 고정되어 있는 듯하여 다가갔는데…
"… 왜 울어?"
아이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그러고 있었는지 문제지가 얼룩덜룩했다. 슬픔에 빠지면 입을 잘 열지 않는 아이였기에 별수 없이 스무고개를 시작했다.
"어디 아파?" 아니란다. "하기 싫어서 그래?" 그것도 아니란다. "잘 모르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 허… 모르면 물으면 될 것을 혼자 울고 있다니.
쉽게 이해되지 않아 스무고개를 더 이어가니 '잘 하고 싶은데 뜻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해'가 아이의 심정이었다. 그랬다. 나 혼자 괜찮다고 마음을 다잡는다고 아이까지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부담주지 않으려 했던 내 마음과는 달리 아이의 마음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다.
괜찮음의 방향이 지나치게 나를 향해 있었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한 '괜찮다'는 판단은 내가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학교에선 학업에 매진하고 집에선 다양한 경험을 쌓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에 작은 변화가 필요했다.
명문대 진학이라는 '로또'
대학 진학을 위한 공부엔 여전히 회의적이다. 노력이 반영되는 로또를 십수 년간에 걸쳐 맞춰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열심히 하면 어느 정도 맞출 순 있는데 당연하게도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ChatGPT에게 문의해본 이 통계를 보면 모두가 선호하는 대학진학이 로또 1등 당첨을 바라는 것보다는 굉장히 높은 확률이다. 로또 5등 당첨확률과 같으니 해볼 만해 보인다. 하지만 일 년에 한 번이라는 기회의 제한 때문에 시간에 대한 리스크가 생긴다.
3수를 전제로 하면 확률이 세 배로 커지지만 로또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모두가 아는 것처럼 대학진학이라는 노력 보상형 로또는 당첨이 되어도 보상이 바로 주어지지 않는다. 당첨금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졸업 때까지 노력과 경쟁은 멈출 수 없다.
대학진학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명문대 진학이 곧 인생의 탄탄대로를 약속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 무엇보다 큰 리스크인 셈이다.
어린 시절의 6년, 길게는 십수 년을 경쟁하듯 지내며 시험 결과에 연연하고, 매 순간 촉각을 곤두세우며 지내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그 과정에서 나름의 성취와 성장도 있겠지만 한쪽으로만 치우친 생각과 마음이 아이를 다치게 할까 걱정이다.
따지고 보면 내 시대의 대학 진학은 4개, 아니 3개의 번호를 맞추는 로또와 같았다.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어른들의 말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조금은 더 확실했고 어느 정도의 당첨금을 알 수 있었으니까.
반면에 지금은 분명했던 하나의 길이 좁아지고 알 수 없는 여러 갈래 길이 생긴 느낌이다. 한 가지 선택을 강요할 수 없다. 게다가 불확실하지만 하고 싶은 걸 조금은 더 쉽게 할 수 있는 세상이다. 이전엔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면 이제는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 그래서 공부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싶지 않다.
물론 선택엔 용기가 필요하다. 선택 후에 따르는 과정이 편하다는 보장도 없다. 힘든 과정은 같을 테다. 쉽지 않으며 긴 시간이 필요하다. 무엇을 선택하든 그 선택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넓은 시야를 가지고 스스로 한 선택이었으면 하는 거다.
아이가 스스로 괜찮을 수 있도록
둘째의 심정을 안 이후, 우리 집에는 '25분 공부경험' 시간이 생겼다. 집에서 하는 다양한 활동에 25분간 스스로 공부하는 '강제체험'을 추가한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책상에 앉아 있는 습관을 길러 주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경험을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즐거움,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 익숙해지는 만족감, 그리고 무엇보다 꾸준함의 힘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컸다.
25분 동안 아이들은 수학 공부만 한다. 만국 공통으로 힘든 일이 수학 문제를 푸는 일이라면, 매일 25분씩 그 어려운 일을 했을 때의 효과는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수학 실력 향상이 목적이 아니다.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자세를 기르는 것이 목적이다.
어차피 해야 할 것 이왕이면 잘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없진 않지만, 싫든 좋든 앞으로 수년은 더 해야 할 일을 부담 없이 할 수 있기만 해도 큰 성과라고 믿고 있다.
25분의 시간을 채우고 나면 나머지는 하고 싶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다. 피아노를 치고 그림을 그린다. 아빠와 코딩을 하거나 체스를 두고 함께 춤을 추기도 한다. 요즘엔 댄스 챌린지에 푹 빠졌다.
25분의 고통(?) 끝에 맞이한 자유 시간은 모두에게 달콤하기만 하다. 끝났다는 해방감과 해냈다는 만족감이 세로토닌으로 변화해서인지 더 큰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요즘은 아이들이 공부 시간이 끝나고도 풀던 문제를 마저 푸는 경우가 많아졌다. 가끔은 내가 같이 놀고 싶어 읽던 책을 덮고 아이들에게 기웃거린다. "어~이. 25분 지났는데~" 아빠의 방해에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는 아이들에게서 자진하여 경험을 추구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내 입가엔 미소가 걸린다.
하루 25분의 효과
25분 공부를 시작한 지 5개월가량이 되었을 때다.
"매일 25분씩 공부하고 달라진 거 없어?"
"음.... 좀 쉬워졌다?"
첫째 아이는 문제를 푸는 것이 예전만큼 막막하지 않고 별거 아닌 일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익숙함으로 얻은 편안함과 경험을 통한 자신감이 엿보였다. 흐뭇하다.
"우리 둘째 딸은 뭐 달라진 거 없어?"
"음... 없어요..."
"...아니, 뭐... 이제는 크게 부담되지 않는다든지..."
"아... 여전히 하기 싫은데...."
당돌하고 분명한 태도에 살짝 당황했지만,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다. 하기 싫은 것이야 인지상정.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을 매일 같이 가장 먼저 챙겨서 하고야 마는 둘째이기에 오히려 기특한 마음이 들었다.
"지난번 시험도 잘 봤다며~"
"... 뭐... 그건... 쉬운 거라..."
아이는 거만인지 겸손인지 모를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그게 25분 공부체험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제는 모르는 문제를 앞에 두고 하염없이 눈물을 떨구진 않는다.
연초에 사주었던 문제집을 다 풀고 난 아이들의 표정이 아직도 선하다. 언제 이걸 다 풀었는지 스스로도 놀라워하는 모습. 꾸준함의 힘을 스스로 깨달은 순간 아이들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걸렸다.
못나게도 25분 공부체험을 권장한 스스로를 먼저 추켜세우고 말았지만, 모든 것은 아이들 스스로 해낸 일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만큼 많은 박수와 격려를 보냈고 함께 뿌듯해했다.
아직도 무엇이 정답인진 모른다. 이것이 최선이라는 확신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답을 몰라서 불안하기 보다는 뭐가 맞는지 모르기 때문에 용감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더 이상 혼자만의 생각으로 기회를 차단하거나 혼자만의 용단으로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으려 한다. 그 모든 게 걱정이었고 두려움이었음을 인정한다. 무엇이 되었든 아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경험을 만들어 주고 그 길고 긴 과정에 함께 하겠다는 결심만 남겼다. 덕분에 모든 것이 괜찮아진 느낌이다. 그리고 말랑한 마음이 조금 단단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