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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암 최익현 영정(충남 청양군 소재 모덕사)
 면암 최익현 영정(충남 청양군 소재 모덕사)
ⓒ 모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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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이 1896년 2월 11일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을미사변과 단발령 등으로 반일감정이 극도로 높아진 상태에서 이범진·이완용 등 친러파와 러시아 공사 베베르가 공모하여 일으킨 변란이었다. 국왕이 외국 공관으로 피신한 것은 일찍이 없던 일이다.

고종의 친일 내각의 각료를 모두 체포·처형하라는 업명에 따라 총리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대신 정병하가 처형되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로써 친일내각이 무너지고 이범진·이완용·윤치효 등 친러파가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고 단발령 등을 보류하여 갑오개혁 정책을 폐기하는 등 민심수습에 나섰다. 

이 무렵(1896) 경기도 이천의 의병들이 남한산성을 점령하고, 백범 김구가 대동강 하류에서 일본인 육군 중위 스치나 조스케를 민비 살해범이란 이유로 처단하였다. 갑신정변으로 미국에 망명했던 서재필이 귀국하여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만민공동회가 열렸다.

1년여 만인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하였다. 여기에는 위정척사파와 개화파가 한목소리를 냈다. 면암은 의정부 찬정을 사직하면서 <시무 12조>의 상소를 올렸다.

  1. 경연을 열어 성학(聖學)을 보도(輔導)할 것
  2. 음식을 삼가 성체(聖體)를 보호할 것
  3. 사인(私人)을 물리쳐 궁금(宮禁)을 엄숙히 할 것
  4. 관리의 임면을 살펴 조정을 바르게 할 것
  5. 백관을 감독하여 실지의 일을 힘쓰게 할 것
  6. 법률을 바로잡아 기강을 세울 것
  7. 민당(民黨)을 혁파하여 변란의 계제(階梯)를 막을 것 
  8. 상중 출사(出仕)를 금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것
  9. 세금을 용도에 맞게 쓸 것
 10. 군법을 정돈하여 무비를 닦을 것
 11. 원수와 역적을 단죄하여 대의를 밝힐 것
 12. 중화와 이적의 구분을 엄격히 할 것. (주석 1)

면암은 지극히 보수적인 인물이었다.

출발이 위정척사 계열이었고, 평생을 이를 가치관으로 삼아 살아왔기에 자신의 신념에 충실한 셈이다. 하지만 역사와 시대의 흐름은 그와 같은 가치관 중에 낡고 퇴보한 것도 적지 않은 것도 자명한 사실에 속한다. 그는 대원군의 사대사상의 상징인 만동묘와 서원철폐와 같이, 다수 백성들이 원하는 것까지도 대원군 탄핵의 탄알로 쏘았다. 그리고 단발령 역시 시대의 흐름이었다. 

<12개조 시무책> 가운데 '7, 민당(民黨)의 혁파'는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만민공동회 개최 등을 타파하라는 주장이다. 민회는 1896년 7월 2일 서재필 등이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8월부터 정치·경제·교육·문화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회를 열면서, 열강의 이권 침탈을 비판하고 의회 설립을 추구하는 등 근대적 시민단체의 역할을 하였다.

독립협회가 임금을 없애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는 죄목으로 간부 다수가 체포되고 1898년 12월 일체의 활동이 금지되었다. 최초의 입헌공화제 주장과 민회 활동이 금지된 것이다. 여기에는 면암을 비롯한 보수세력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면암은 국왕의 정당한 처신을 비롯하여 공정한 법률의 집행, 그리고 대의와 명분을 바로잡는 데 이르기까지 12개 조목으로 나누어 당면한 급무를 제시한 것이다. 그 가운데 제7조목에 언급한 '민당혁파'는 당시 자주국권·자유민권·자강개혁을 부르짖던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개최 등을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 것이었다. 

이것은 면암이 지녔던 성리학의 보수적 가치의 일단을 극명하게 드러낸 조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제일 마지막 12조목의 끝에는 "땅 밑의 미약한 양(陽)을 받드신다면 천만다행"이라고 하여 존화양이론의 구현을 시대적 소임으로 절급하게 인식하고 있다. (주석 2)


주석
1> 박민영, 앞의 책, 115~116쪽.
2> 앞의 책, 116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면암 최익현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최익현평전#최익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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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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