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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최근 엔화 환율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일본이 와인 애호가들의 쏠쏠한 구매처로 급부상하고 있다. 애초에 같은 와인이라도 대체로 일본이 더 저렴했는데 환율까지 떨어지니 애호가들은 일본 출장이나 여행을 다녀오며 면세 한도를 꽉 채워 와인을 사는 일이 많다. 특히 고급 부르고뉴 와인은 가격 차이가 유독 커서 왕복 비행기 가격을 뽑고도 남을 정도다.

국경을 넘나들며 장사하는 이들에게 이러한 가격 차이는 좋은 사업 기회가 된다. '비타트라 일본'이 바로 그런 인터넷 사이트이다. 와인, 위스키, 사케, 맥주 등을 일본에서 구매해 한국 소비자에게 배송하는 구매대행 서비스인데, 세금과 배송비를 포함한 와인 가격이 국내 소매점 가격보다 저렴한 데다가 구하기 어려운 와인도 종종 보인다. 현관 앞으로 배송된다는 점도 편리하다.

하루는 비타트라 일본에 접속해 와인을 살펴보는데 어떤 와인이 눈에 들어왔다.

프리모직 피노 그리지오 '스킨'
Primosic Pinot Grigio 'Skin'

오렌지 와인과 로제 와인은 다르다
 
프리모직 피노 그리지오 ‘스킨’ 오렌지 와인은 화이트 와인 양조용 청포도로 만들지만 레드 와인을 만들 때처럼 껍질과 씨를 함께 발효시킨다.
프리모직 피노 그리지오 ‘스킨’오렌지 와인은 화이트 와인 양조용 청포도로 만들지만 레드 와인을 만들 때처럼 껍질과 씨를 함께 발효시킨다. ⓒ 임승수
 
오! 내가 좋아하는 가성비 최강 품종 피노 그리지오다. 근데 이 녀석은 왜 이렇게 비싸? 4만 원이나 하네? 피노 그리지오는 저가형 화이트 와인이라 대체로 1만 원대다. 궁금해서 상품 정보를 자세히 살펴보니, 아하! '오렌지 와인'이구나.

오렌지 와인은 화이트 와인 양조용 청포도로 만들지만 레드 와인을 만들 때처럼 껍질과 씨를 함께 발효시킨다. 그래서 특유의 오렌지색을 띠게 되고 타닌 함량도 높아 화이트 와인보다 한층 무겁고 풍부함 바디감을 가진다. 제조 공정도 복잡하고 생산량도 적은데 최근 인기가 상승해 같은 품종의 화이트 와인보다 가격이 높은 편이다.

로제 와인과 비슷한 것 아니냐고? 로제 와인은 오렌지 와인과 달리 레드 와인 양조용 적포도를 사용한다. 다만 껍질과의 접촉 시간을 레드 와인 양조 때보다 짧게 가져가다 보니 빨간색이 아닌 옅은 분홍색이 감돌게 된다.

원래 유행에 둔감한 편이라 오렌지 와인 경험이 많지는 않았는데 일단 피노 그리지오 품종이라 호기심이 동했다. 하지만 결제에 이르기 위해서는 통과해야 할 관문이 아직도 여럿 남아 있다. 가격은 적절할까? 전 세계 거래 평균가를 알려주는 와인서쳐 앱으로 확인하니 대략 4만 8천 원(세금 제외)이라고 나온다. 비타트라 일본에서는 세금과 배송료를 합산해 4만 원 정도니 훌륭한 가격이다. 통과!

이제 후기를 살펴봐야지. 네이버에서 'primosic pinot grigio'로 검색하는데, 이런! 체험담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와인 정보가 담긴 블로그를 딱 하나 발견했는데, 웃프게도 비타트라 일본 관리자의 블로그였다. 내용을 살펴보니 프리모직이 이탈리아 프리울리 지역에서 손꼽히는 생산자라고 나와 있긴 했다. 하지만 나(작가)도 다른 사람한테 내 책을 소개할 때 희대의 명저라고 하지 않는가. 음, 어쩌지? 그래. 척척박사(챗지피티)에게 물어보자.

"이탈리아의 primosic이라는 와인 생산자는 평판이 어때? 유명한 편이야?"
"이탈리아 프리울리-베네치아 줄리아(Friuli-Venezia Giulia)의 콜리오(Collio)에서 와인을 생산하는 유명한 와인 생산자입니다."
"이 와이너리의 피노 그리지오 오렌지 와인을 구매하려는데, 어떻게 생각해?"
"매우 좋은 선택일 수 있습니다. 특히 오렌지 와인은 일반적인 화이트 와인과는 다른 독특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배송비와 세금을 모두 포함해 40,000원 정도에 구매하려고 하는데 좋은 가격이야?"
"40,000원이면 약 $30.77에 해당합니다. 평균 가격은 $34 정도이니 비교적 좋은 가격으로 보입니다​. 특히 배송비와 세금이 포함된 가격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유명한 생산자가 만들었고, 내가 좋아하는 피노 그리지오고, 색다른 오렌지 와인이고, 심지어 좋은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데, (예상되는 아내의 바가지를 제외하고는) 내가 구매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찾기가 어려웠다. 뭐 어차피 아내와 마실 텐데, 이해해 주겠지. 흐흐.

결제하고 6일이 지나니 와인이 도착했다. 아내가 알아채기 전에 택배 상자를 얼른 방으로 들여다 놓았다. 상자를 개봉하니 사제복처럼 검은 라벨에 주둥이 부위에 선명한 오렌지색 포일을 두른 와인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놈 참 쌔끈하구먼. 무슨 음식이랑 곁들여야 좋으려나.

피노 그리지오 화이트 와인이라면 어울리는 음식을 열 가지 이상 술술 읊을 수 있겠다만, 오렌지 와인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구나. 프리모직 홈페이지에 추천 음식이 있을까 싶어 방문했는데, 빙고! 영어로 적힌 내용을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음식 페어링: 생선 및 해산물 수프, 토마토가 들어가면 더 좋음. 아시아 요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매운 요리나 새콤달콤한 요리.  피망 소스를 곁들인 구운 문어나 클래식한 파스타 아마트리치아나와 환상적인 조화를 이룬다.

배달로 시켜 먹기 좋은 건 역시 파스타 아니겠어. 그나저나 파스타 아마트리치아나? 이게 뭐지? 아나스타샤도 아니고 아수라 백작도 아니고. 아무튼 이름이 참으로 어렵구먼. 검색해 보니 이탈리아 아마트리체 지역에서 유래한 음식이며, 관찰레(햄의 일종)가 들어가는 매콤한 맛의 토마토 스파게티라고 한다.

이 요리를 배달해 주는 음식점을 찾아 주문한 후 와인을 꺼내어 잔에 따르기 시작했다. 포도로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오렌지 와인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는 색이 또르르 차오른다. 신기해서 한참을 쳐다보는데, 필터링을 하지 않는 와인에서 종종 확인되는 (음용에 아무런 문제 없는) 미세한 부유물이 보인다.

레드와 화이트의 장점만 뽑아 놓은
 
오렌지 와인과 아마트리치아나 약속이나 한 듯 와인, 스파케티, 병 주둥이 포일 색이 깔맞춤이다.
오렌지 와인과 아마트리치아나약속이나 한 듯 와인, 스파케티, 병 주둥이 포일 색이 깔맞춤이다. ⓒ 임승수
 
이내 초인종 소리가 나고 파스타가 도착했다. 배달 음식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제법 괜찮네. 시큼하고 눅진한 토마토소스, 동물성 감칠맛을 한껏 뽐내는 치즈, 팝핑 캔디처럼 혀와 입천장을 쏘아대는 매콤한 향신료. 이것들이 덕지덕지 코팅된 요망한 서양 국수 가락이 젓가락을 타고 보무당당하게 구강 내부로 입장하자 뇌에는 다음과 같은 지식이 업데이트됐다. '매콤한 토마토 스파게티? 상당히 맛있음.'

그러고 보니 약속이나 한 듯 와인, 스파케티, 병 주둥이 포일 색이 깔맞춤이네. 맛에서도 깔맞춤이려나? 맞은편에 앉은 아내와 건배하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셨다.

"와! 이거 진짜 괜찮지 않냐?"
"정말 그래. 레드와 화이트의 장점만 뽑아 놓은 것 같아."

"화이트 와인처럼 상큼하면서도 레드 와인 못지않게 타닌이 묵직해서 구조감이 탄탄해. 파스타의 새콤매콤한 풍미와 오렌지 와인의 상쾌한 타닌이 정말 잘 어울려. 서로 느낌이 비슷하거든."
"색깔이 예쁘고 독특해. 특별한 와인을 원한다면 매우 만족하겠어. 그나저나 피노 그리지오는 항상 만족스럽네."


붉은 체리 향에 화사한 신맛. 은은하게 깔린 삼나무 향과 꿉꿉한 연기 향. 그 뒤에서 은근하게 받쳐주는 묵직한 타닌. 무엇보다도 비눗방울을 떠올릴 정도로 미끌미끌한 유질감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브라보! 멋진 공연을 관람했을 때나 나올 박수갈채를 와인에게 보냈다. 제대로 취향을 저격당한 여파인지 빈 병을 버리지 않고 진열장에 살포시 놓았다. 아내 몰래 한 병 더 주문한 건 안 비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네 녀석은 빈 병을 남기는구나.'

옆자리의 리슬링이 쌔끈한 친구가 왔다고 반겨주는 눈치다. 아무래도 당분간 오렌지 와인을 더 자주 만나게 될 듯하다.

#오렌지와인#아마트리치아나#임승수#프리모직#피노그리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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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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