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이주 열풍'이 분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지난 10년 동안 제주를 떠난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진짜 삶이 궁금해 직접 인터뷰에 나섰다.[기자말] |
인터뷰라는 낯선 세계에 발을 디딘 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다른 작업과 병행하느라 아직 열 명도 채 안 되는 사람들을 만났지만, 하면 할수록 인터뷰가 얼마나 이 시대에 필요한 작업인지를 알아가고 있다. 그럴수록 생각이 많아진다. 나는 앞으로 어떤 인터뷰를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더 의미 있게 담을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하던 찰나 나보다 훨씬 앞서 제주 이주민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어느덧 10년차 이주민이자 최근에 책 <남자가 많은 곳에서 일합니다>를 펴낸 박진희(43)씨다. 타인의 목소리와 함께 박동하며 살아온 그의 지난 10년의 삶은 어땠을까.
'적게 벌고 적게 쓰려고' 온 제주
- 우선 정확히 언제, 왜 제주에 오셨는지 궁금합니다.
"제주에 온 건 2015년 1월이에요. 2014년에 시부모님이 제주로 이주하셨는데 남편이 먼저 와서 본가를 오가며 직장을 잡았고, 저는 서울에서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내려왔어요. 그해 5월에 제주에서 결혼식을 치렀고요.
남편이 저를 꼬실 때 부모님이 섬에 계셔서 자주 만날 수 없다고 했거든요.(웃음) 그래서 처음에는 제주에서 살 생각을 하지 않았고, 부산에 있던 남편이 서울로 올라와 함께 사는 걸 생각했어요. 제가 일하던 출판 업계는 대부분 수도권에 있는 반면, 약사인 남편은 서울에서도 직장을 잡을 수 있었거든요. 둘 다 모아둔 돈이 별로 없어서 전세를 얻으려면 대출을 끌어 모아야 했어요.
북한산 둘레길을 함께 걷다가 문득 제주도 이야기가 나왔고, 제주도에는 연세라는 아주 훌륭한 제도가 있어서 큰 보증금 없이도 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지금 가진 돈으로 빚 없이 시작해, 적게 벌고 적게 쓰자는 제안이 너무 좋더라고요. 그래서 결혼과 동시에 이주를 하게 됐어요."
- 제주의 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작은 결혼식을 올리셨어요. 당시는 <오마이뉴스>에 '가장 나다운 결혼식'이라는 글을 연재하실 때이기도 했죠. 당시 뜨거운 반응을 얻었는데, 그 연재가 결혼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예전에 결혼식을 진짜 많이 다녔어요. 하루에 두 탕 뛴 적도 있고요. 나중에는 얼굴 도장만 찍고 식은 보지도 않고 밥 먹으러 갔다가 사진만 찍고 오는 경우도 있었어요. 집으로 돌아오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더라고요. '식에 초대한 사람도, 초대받은 사람도 즐겁게 기억할 수 있는 결혼식은 없을까' 하는 고민이 들었죠.
그러던 중에 동료가 색다른 결혼식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줬어요. 학교 운동장에서 결혼을 했는데 신부가 경운기를 타고 입장했다는 거예요. 또 마침 업계 동료가 결혼을 했는데, 청첩장에 집을 합치면서 나온 중복되는 책들을 답례품으로 준다고 적었더라고요.
하객들 복장도 자유롭게 와도 된다, 신부 대기실이 따로 없고 신랑 신부가 하객 한 명 한 명을 직접 맞을 거다, 이런 내용도 있었는데 참 좋더라고요. 그때 이걸 시리즈로 연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글을 쓰면서 나도 이렇게 결혼식을 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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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나다운 결혼식https://omn.kr/1pxi6]
인터뷰를 계속 하는 이유
- 제주로 오기 전에 여행을 많이 다니셨더라고요. 남편분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나셨어요. 제주에 정착한 분들 중에는 유독 해외 경험이 많은 분들이 계세요. 그런 경험이 제주 정착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요?
"이전 인터뷰를 찾아보니 저 말고도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분이 있더라고요. 제주 올레길이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님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나서 벤치마킹해 만든 길이잖아요. 그러니 산티아고를 다녀온 사람은 제주를 떠올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슷한 아름다움이 있거든요. 구름 모양이라든가, 지평선에 맞닿은 하늘이라든가. 이런 넓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데가 사실 우리나라에 많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런 건 아닐까 싶네요."
- 제주로 오면서 출판 일을 그만두고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하셨어요. 제주에서 프리랜서로 산다는 게 녹록지 않을 것 같아요. 결혼하고 바로 임신을 해 한 아이의 엄마가 된 것도 일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듯한데, 어땠나요?
"결혼식 마치고 한두 달은 바쁘게 지냈는데 이후에 갑자기 '나 이제 뭐 하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출판사는 연말에 다음 해 12월까지 일정이 다 짜여 있거든요. 그래서 다음 일에 대한 압박감이 되게 큰 편이에요. 그게 사라지니까 내가 너무 준비를 안 했구나 싶더라고요. 결혼하고 바로 아이가 생겨서 더 일에 대한 생각만 크고, 몸은 막상 할 게 없었던 것 같아요.
그때 혼인신고를 하러 갔는데 객관식으로 직업을 고르는 항목이 있더라고요. 제조업, 전문직, 가정주부 등이 적혀 있는데 어디에도 제가 속할 수 없는 거예요. 타인을 만나도 저를 설명하려면 말이 괜히 길어지는 상황들에 놓이게 됐고요. 그런 부분에서 마음의 부대낌이 좀 있었어요."
- 그래도 아이 낳고 일을 꾸준히 하셨어요. <오마이뉴스>에 육아글을 잠시 연재하시기도 했고, 로컬 매거진 사름(SARM)에서도 필진으로 일하셨고요. 제주와 서귀포 기관에서 진행하는 일도 지속하셨어요.
"아이 엄마이기 이전에 박진희를 알아줬던 사람들이 간간히 일을 제안해줬어요. 시어머님이 도와주셔서 작은 일이지만 지속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가계에 큰 도움이 되는 일들은 아니었고 아주 귀여운 기여를 했지만, 제가 그때 그걸 마다하지 않고 계속한 것에는 제 자신을 쓰다듬어 주고 싶어요. 못한다고 했으면 새로운 일이 들어왔을 때 받아들이는 데 두려움이 무척 컸을 것 같아요. 그 순간에는 전혀 쌓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이게 일인지 아닌지 수없이 의심했지만, 그것들이 조금씩 모여서 지금의 제가 된 것 같아요."
- 제 경우는 인터뷰를 하기 전에 제 이야기를 쓰는 시간이 길었어요. 제 안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뒤에야 타인에게 시선이 갔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작가님은 처음부터 인터뷰를 하셨고 최근에도 인터뷰 책을 내셨어요. 계속 인터뷰를 하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1차적으로 나를 위해서인 것 같아요. '가장 나다운 결혼식'도 그렇고, 이전 책 <누구의 삶도 틀리지 않았다>도 그렇고, 모든 게 나와 관련된 것들이에요. 특히 제가 자발적으로 한 일들은 나보다 조금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보면서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비슷한 결과 가치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괜찮아, 잘 살고 있어'라는 믿음을 얻고 싶었던 거죠.
제가 주로 인터뷰하는 분들은 유명인이 아니에요. 제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인데 이 분들이 인터뷰라는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 환기되는 경우가 많아요.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을 정화하고 '자기 삶이 괜찮구나' 느낀다는 걸 눈빛으로 알 수 있거든요. 그런 모습을 보는 게 참 좋아요. 서로에게 위로를 얻는 지점이 너무 좋아서 계속하고 있는 것 같아요."
- 그렇게 보면 이번에 출간하신 <남자들이 많은 곳에서 일합니다>는 그간 하신 작업과 결이 좀 달라 보여요. 간략히 소개를 해주신다면요.
"아, 그건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해주신 거라?(웃음) <남자가 많은 곳에서 일합니다>는 건설현장 감독, 일등항해사, 항공기 조종사 등 남초직군에서 일하는 여성들을 인터뷰한 책이에요. '남초 직군 속 여성'이라는 주제를 출판사에서 먼저 잡아주셨고, 그 키워드만 가지고 제가 자유롭게 인터뷰이를 선택하고 글을 썼어요. 그래서 처음의 기획과는 조금 다른 결과물이 나온 것 같아요.
어쩌면 여성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며 받은 부당함이나 어려움이 더 담겨야 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의 인터뷰이들은 모두 여자로서 받는 부당함에 집중하기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어떻게든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골몰한 분들이었거든요. 출판사 제안으로 시작한 일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제 결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지금 제주 이주민을 인터뷰하고 있지만, 저보다 훨씬 앞서 수십 명의 제주 원주민과 이주민을 만나셨어요. 남다른 경험을 하신 것 같아요.
"서귀포시가 법정 문화도시로 선정되면서 여러 형태로 노지문화 아카이빙 작업을 했는데, 저도 작업에 참여했어요. 저는 감귤재배·해녀·비석 장인 등 노지문화 1세대 어르신들의 삶을 짧은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담는 일을 했어요. 그때야 '원주민'이라 느껴지는 분들을 만났어요. 지난 10년간 여러 분야에 있는 사람들과 꽤 많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인터뷰이들이 90퍼센트는 이주민이었어요. 왜 그럴까? 의문이 생기더라고요.
생각해 보면 이런 일들이 대부분 '문화'와 관련된 것인데, 먹고살기 바빴던 윗세대 어르신들이나 문화가 닿지 않는 시골 지역분들에게는 '생소한 일',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겠더라고요. 나에겐 문화가 삶을 풍요롭게 하는 원동력이지만 누군가에겐 접해 보지 않은 사치였겠구나, 싶어요. 그래서 어르신들과 함께했던 작업이 오래 기억에 남아요. 그분들의 삶은 문화 그 자체였거든요. 저도 그분들에게 문화라는 씨앗을 선물해 드린 것 같기도 해요."
- 같은 인터뷰어로서 정말 부러운 대목입니다. 어렵겠지만 그간 인터뷰한 분들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을 꼽아주실 수 있을까요?
"제주시소통협력센터에서 인터뷰 잡지 만드는 일을 한 적이 있어요. 그때 발달장애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들, 그리고 그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만났어요. 발달장애 아이들과 함께 갈 수 있는 제주도내 식당이나 카페 지도를 만드는 일을 하셨는데, 제게도 장애가 있는 조카가 있거든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공감대가 형성돼서 인터뷰 분위기가 정말 좋았어요.
선생님은 사명감이 대단한 분이었어요. 장애아를 둔 부모들이 느끼는 힘듦의 강도에 대한 조사를 직접 하실 정도로요. 설문조사도 하시고 직접 만나서 실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알아보셨어요. 주말에 몇 시간이라도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부모가 쉴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주시기도 하고요. 진짜 존경할 만한 분을 만나서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어요."
듣고 싶은 건 제주 아이들의 이야기
- 수십 명 중에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된다는 게 무척 특별해 보이네요. "제주에서 적당히 벌며 아주 잘 살자"는 약속을 하며 남편분과 제주에 오셨다고 책 <누구의 삶도 틀리지 않았다>에 적으셨어요. 어느덧 이주한 지 십 년이 다 됐는데 그 초심대로 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이 질문을 보고 뜨끔했어요. 일단 '아주'는 빼야 할 것 같고요.(웃음) 솔직히 말하면 매일 돈이 많았으면 하거든요. 거듭 생각한 끝에야 다시 돌아와서 '지금 충분히 만족해'라는 결론을 내요. 엄청나게 강한 신념으로 내가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작년에 남편이 건강상의 이유로 6개월 정도 일을 쉬었거든요. 그러면서 더 돈에 대한 생각이 많아진 것 같아요.
돌아보면 서울에 있을 때는 오히려 돈에 대해 신경을 덜 썼던 것 같아요. 서울에는 사람들이 워낙 많고 다들 지하철 타고 다니고... 젊을 때라 주변 친구들도 그렇고 저도 그리 좋은 조건의 집에서 살지 않았거든요. 서울역 쪽방촌 가서 도배하고 거기 사는 아이들도 만나고 그랬어요. 그래서 스스로가 못 산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죠.
그런데 요즘은 아이 등교할 때 서 있는 차만 봐도 왜 이렇게 시골 마을에 좋은 차가 많은지. 아이가 친구 집에 놀러 갈 때도 보면, 제가 살아왔던 집 중에 지금 가장 번듯한 집에 살고 있으면서도 스스로가 가난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제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아이가 생겨서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런 제가 좀 부끄럽기도 하고 이전의 가치관들이 아이를 키우면서 없어진 것 같아 좀 안타깝기도 해요."
- 솔직한 답변 감사해요. 이런 삶의 변화를 겪으시면서 인터뷰를 하고 싶은 대상도 변할 거란 생각이 들어요. 다음에는 누구의 목소리를 듣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최근에 책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를 읽었어요. 서울에서는 많이 봤지만 제주에서는 보지 못해서 가난한 아이들이 사라진 줄로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제 눈에 띄지 않았던 거죠. 서울이라는 곳이 빈부격차가 무척 큰 곳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상대적으로 제주도는 빈부격차가 적지만, 분명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누구도 상처 주지 않으면서 누군가에게 알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한번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최근에 많이 들어요. 아이들을 인터뷰하는 게 어른에 비해 무척 어려운 일이라, 엄청난 도전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 또 하나의 좋은 인터뷰가 나올 것 같아요. 어느덧 마지막 질문입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십 년 전으로 간다면, 다시 제주로 오실 건가요?
"다시 제주로 올 것 같아요. 일단 하늘만 생각해도 그래요.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 중에 하나거든요. 제주의 큰 하늘을 보면서 내 삶에 감사하게 되고, 이대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아요. 그거 하나만으로도 이미 게임 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주를 선택할 거라고 말을 하긴 하지만, 실은 늘 같은 마음으로 살면 어디든 좋은 장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인터뷰한 이주민 중에 제주를 떠난 분들도 있는데, 아마 그분들도 그런 마음으로 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반 년 가량 여기저기를 떠돌며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제자리로 돌아와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가장 기억에 남은 게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때 떠오른 단 하나는 '하늘'이었다. 때와 장소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던 그 넓고 다채로운 하늘.
넋 놓고 바라본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섬에 살다 잠깐씩 서울을 들를 때도 하늘을 쫓아 다닌다. 어디에 가면 더 너른 하늘을 볼 수 있을까 하면서. 제주 이주민은 어쩌면 그 하늘을 일상의 영역에 들여놓은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다정한 눈빛, 솔직한 언어, 섬세한 제스처. 타인의 삶을 존중하고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할 줄 아는 사람에게서는 맑은 빛이 뿜어져 나온다. 인터뷰어는 듣는 사람이 사라져 가는 시대에, 끝까지 경청하려는 사람들이 아닐까.
기계는 할 수 없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 듣고 맞장구치며 공감하고 감응하는 일. '누구의 삶도 틀리지 않았다'며 평범한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그의 언어가 세상이라는 공기 속에 오래 공명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