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소도시 워킹투어의 마지막 날이다. 곧 부모님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고, 동생은 여름휴가를 받아서 드디어 3대가 함께 캠핑카에 올라탄다. 조카 고래 양의 유치원은 이미 오래 전에 여름방학을 시작했다. 한가로운 나만의 아트 투어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라이프치히와 드레스덴에 이어 마지막으로 선택한 소도시는 바로 데사우(Dessau)다.
데사우는 독일 바우하우스(Bauhaus) 운동이 전성기를 맞았던 곳이다. 고전미술에서는 예술의 변방에 머물렀던 독일이 바우하우스의 등장으로 모더니즘 예술의 정점에 올라섰다. 특히 산업 디자인과 현대 건축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니, 지금도 바우하우스 정신을 목표로 삼고 좇아 가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바우하우스를 모르더라도 이케아, 무인양품, 애플, 브라운 같은 브랜드를 떠올릴 때 공통된 느낌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바우하우스 정신이다. 실제로 이들 회사의 CEO들이 '나는 바우하우스의 후예'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은 건축가 루이스 설리반(Louis H. Sullivan)이 주장한 'Form follows function'과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가 외쳤던 'Less is more'에 있다. 장식을 위한 장식을 배제하고 덜어낼 수 있는 모든 것을 덜어내어 예술의 본질만 남기자는 미니멀리즘 예술 정신이 바우하우스의 기능주의와 만나 현대 산업 디자인과 모더니즘 건축의 기준을 세웠다.
바우하우스 정신의 시작은 1919년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가 예술과 공예와 건축을 통합하기 위해 독일 바이마르에서 바우하우스 예술학교를 세우면서 시작되었다.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면서 근대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손꼽히는 바우하우스 빌딩을 지었다. 당시 바우하우스 정신에 공감한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파울 클레(Paul Klee),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등이 교사로 학생을 지도했다.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늘 책으로만 보던 그곳이 라이프치히에서 불과 한 시간 거리에 있었다. 유럽 여행을 여러 번 했지만, 옛 동독 지역을 둘러볼 기회는 없었는데, 이번 여행에서 드디어 바우하우스 학교를 직접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오늘은 조카 고래양을 유치원에 보내 놓고 고래 엄마도 같이 가기로 했다. 둘째 조카가 뱃속에 있으니 세 명이다. 태교에는 역시 예쁜 걸 보는 게 최고이지 않을까?
데사우는 인구 7만 명 정도의 소도시이다. 주차장에 캠핑카를 주차하고 주차요금을 내려는데 동전만 가능했다. 난감한 상황에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할머니 두 분이 오셔서 동전이 필요하냐고 묻는다. 고래 엄마의 뛰어난 독일어 덕분에 할머니께 동전을 교환하고 주차권을 받았다. 동독 사람들이 무뚝뚝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다 거짓말이었다. 성급한 일반화라도 괜찮다. 여기는 예술의 도시 데사우니까.
바우하우스까지 길을 걸으며 고래 엄마에게 바우하우스에 대해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슬로건과 함께 장황하게 설명하며 아는 척을 했다. 그랬더니 고래 엄마는 동독 사람들과 동독 건축의 특징에 대해 실전 지식을 알려줬다. 판넬 주택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Plattenbau는 동독 시기 폭발하는 주택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지어진 건축 양식이다.
마침 사회주의 이념과도 맥락을 같이 하며 아름다움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는 기능주의 건축이 대거 들어섰다. 데사우 역시 대로를 중심으로 양옆에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주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길 끝에 바우하우스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 외관을 얼핏 보면 요즘 건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점이 바로 바우하우스의 뛰어난 유산이다. 무려 10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기 때문이다. 건물 외벽을 유리로 만든 것도 바우하우스가 최초였다. 바우하우스를 새긴 폰트조차 지금 당장 웹페이지에 적용해도 멋스러울 정도로 훌륭했다. 지금도 디자인 교육기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기 때문에 바우하우스 기념관은 전체의 50% 정도만 관람객들에게 공개되어 있었다.
데사우 바우하우스는 1925년에 세워졌다가 나치에 의해 폐교된 후 다시 베를린으로 옮겼다가 완전히 해체되었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시기를 겪으며 완전히 폐허가 된 건물을 1976년에 복원을 완료했고, 1996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바우하우스 박물관은 비교적 최근인 2019년에 개관했다.
전시실에는 처음 개교 당시의 건축 자재들이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이 아니라면 건축 폐기물을 모아 놓고 환경 운동을 하는 전시실 분위기였다. 하지만 보존되어 전시 중인 건축 자제들은 당시로서는 혁신 그 자체였다. 지금은 너무나 익숙한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이 초기에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흑백 영상과 함께 공부할 수 있었고, 깨진 유리 조각 하나까지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100년 전 건축에 커튼 월(Curtain Wall) 개념을 적용했다는 것도 대단한데, 여기에 사용된 유리는 채광과 개방성을 극대화하고 미적 가치를 높이기 위해 높은 투명도와 반사도를 지닌 최첨단 기술이 적용된 것이었다. 이런 역사들이 하나씩 쌓여서 문화적 역량이 되는 것이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떠올랐다. 건립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신고전주의 건물이었고, 철근콘크리트 구조가 적용된 화강암 건물이었다. 치욕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우리의 근대사를 명징하게 상징하는 건축이었다. 꼭 폭파해야만 했을까? 조선총독부 건물이 산산조각 나고, 한 세기 동안 가려졌던 경복궁이 위용을 되찾는 순간에 국민들이 느꼈을 통쾌함과 짜릿함이 우리의 역사보다 중요했을까? 이전하여 보존할 수는 없었을까? 아픔을 잊지 않을 수는 없었을까? 일본의 사도 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들은 왜곡하고, 우리는 잊어간다.
바우하우스는 일상과 예술을 통합하려 했다. 실용성과 아름다움을 모두와 나누려고 했다. 그 정점에 있는 것이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가 만든 바실리 체어(Wassily Chair)다. 데사우에 오기 전부터 바우하우스에서 바실리 체어에 앉아 멋지게 사진을 찍는 모습을 상상했었다.
바티칸 미술관의 <라오콘 군상>도 아니고 루브르 박물관의 <사모트라케의 니케>도 아닌 겨우 의자 하나를 상상했다니. 어쩌면 호치민의 짝퉁 가구점에서도 구할 수 있을 보편적인 의자다. 하지만 마르셀 브로어이어가 바실리에게 헌정한 이 의자에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이 담겨 있다.
이전까지의 가구는 나무로 만드는 것이었다. 가구라는 것이 등장한 순간부터 늘 그랬을 것이다. 지금도 고급 가구는 좋은 나무로 훌륭한 장인이 만든다. 하지만 바실리 체어는 철제 프레임에 가죽을 덧씌워 만들었다. 공장에서 대량생산할 수 있는 구조인 것이다. 왕이나 귀족이 가졌을 멋진 개인 의자를 모든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거기에 예술가의 미적 감각까지 더해졌다. 의자 하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자 하나에 담긴 생각이 위대한 걸작을 만든 것이다.
전시실을 걷다가 또 하나 인상적인 작품을 보았다. 그것은 바로 욕조였다. 욕조가 마치 뚜껑이 열린 이집트 미라의 관처럼 생겼었다. 고래 엄마가 욕조를 가까이서 보더니 까만 대리석이라고 했다. 바우하우스가 대리석을 사용했을 리가 없다며 나도 다가가서 봤지만 긴가민가했다.
전시물이라 손을 댈 수는 없어서 코에 닿을 듯 가까이서 보고 있으니 관리인이 웃으면서 만져봐도 된단다. 손으로 두드렸더니 둥둥둥 철판 울리는 소리가 났다. 철판으로 만들었는데 대리석 느낌이 나는 욕조를 규격화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한 것이다.
바우하우스는 실용만 추구한 것이 아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추앙받는 예술운동으로 남지 않았을 것이다. 바우하우스의 기념품 점은 정말 팔고 있는 모든 것을 모조리 사서 호치민에 가져가고 싶은 것들이었다. 고래 엄마는 이미 바실리 체어에 앉아 WG24 조명을 살펴보고 있었다. 심플하고, 모던하고, 깔끔하고, 세련되고… 예뻤다.
태교에는 예쁜 게 최고다. WG24를 생산하는 테크노루멘의 조명은 상품이라고 해야할지, 작품이라고 해야할지 헷갈렸다. 제품을 보면 상품인데 가격을 보면 작품이었다. 바실리 체어도 색깔별로 모두 가져가고 싶었지만 제품의 가격이 작품이었다. 나는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마음에 담았다. Less is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