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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이 넘어 채식과 복싱을 시작했다. 얼핏 보면 어울리지 않는 이 두 가지가 나의 관심사. 생활 챔피언의 먹고 사는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기자말]
'No boxing, No life'

"너무 허세 아니야?" 복싱을 좋아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복싱이 없으면 삶도 없다니.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를 보고 옆에 있는 아내에게 '노 복싱 노 라이프'라는 말에 대한 느낌을 솔직하게 전했다. 그렇게 1년여 뒤, 주 4회 복싱을 하고, 점심시간에는 복싱 영상을 보고, 퇴근 시간 전이면 복싱할 생각에 떨린다.

문제는 일상뿐만이 아니라 휴가에 가서도 복싱 생각뿐이라는 것이다. 휴가지에서마저 촬영해 둔 스파링 영상을 보면서 보완해야 할 점을 상기한다. 경치 좋은 곳이라도 지나칠 때면 섀도 복싱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두고 싶다. 누가 보면 정말 복.친.자(복싱에 미친 자)로 보일 테다.

낭만 복싱의 진한 맛을 알게 해준 복싱장과의 만남
 
 생활복싱대회 풍경
 생활복싱대회 풍경
ⓒ 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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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복서는 오늘날의 글래디에이터다. 복싱은 링 위에서 단둘이 주먹으로 결판을 내는 스포츠다. 화려한 회피 기술과 스텝에도 흥분하지만, 관중은 피 튀기는 혈전에 더욱 열광한다. 복싱 기술을 잘 모를지라도 앞뒤를 재지 않는 난타전에는 눈을 떼지 못한다.

요즘 사람들이 복싱을 하는 목적은 다양해졌다. 단순히 링 위에 올라 누군가와 겨루고 강해지는 복싱만을 추구하지 않는다. 길을 걷다가 복싱 간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정통복싱, 뮤직복싱, 다이어트복싱. 건강과 다이어트를 이유로 많은 이들이 복싱을 선택한다. 실제로 복싱장에 가도 링 위에서 스파링을 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 스파링을 하지 않고도 줄넘기, 섀도, 미트, 스피드볼, 탭볼 등 다양한 훈련 과정을 통해서 운동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싱과 나의 인연은 꽤 복잡하다. 코로나를 지나며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체력 증진을 위해 운동이 필요했다. 일종의 '생존 본능'이 피어오른 것이다. 이사 오기 전에 유도를 했었기 때문에 유도를 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농구 동호회에 나갔다가 발목 인대가 파열되면서 석 달 동안 걷지 못했고, 발목 회전과 지지가 중요한 유도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도보 거리로 가장 가까운 복싱장을 찾았다.

오로지 '체력 증진'이 목적이었다. 정말 실전 복싱을 잘해보겠다는 목적은 아니었다. 복싱장 관장님은 한국 챔피언 출신이었다. 수많은 프로복서를 배출했고 현역 상위 랭커 프로복서들이 운동하는 복싱장이었다(한국 챔피언을 무려 4명 배출한 체육관이다).

복싱장에 다닌 지 한 2주가 지났나. 관장님이 스파링을 제안하셨다. 뭐든 도전하고 새로운 경험은 좋아하는지라 곧바로 링 위에 올랐다. 그날의 경험이 나를 'No boxing, No life'로 이끌었다. 그날 이후 거의 매주 스파링을 하고 있다.

복싱 초보자, 스파링 매력에 빠져버렸다

나는 복싱의 꽃은 스파링 혹은 시합이라고 생각한다. 스파링이 주는 재미는 긴장감에서 온다. 물론 상대와 나의 실력 차에 따라서 긴장감의 정도는 다르다. 매니 파키아오가 나랑 스파링을 하면 긴장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스파링 초기에는 주로 관장님과 스파링을 했다. 내 실력에 맞춰 안면은 살살 타격하고 복부(복싱에서는 보디라고 부른다)를 강하게 때리셨다. 특히 간이 위치한 오른쪽 복부를 때리는 걸 일명 '간장샷(리버샷)'이라고 한다. 폐를 비롯한 모든 장기에서 산소가 빠져나간 느낌이었고 다리가 풀리면서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글러브에 갇힌 손마저도 숨이 막힌 것처럼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숨이 정말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상하게도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교회에서 목사가 매주 똑같은 설교를 하지 않듯, 스파링하는 날마다 '링 위의 설교'도 달랐다. 어느 날은 너무 욕심을 내서 주먹을 던지는 바람에 허공을 가르다가 내 팔꿈치가 아프기도 했고, 어느 날은 상대의 주먹을 보지 않고 고개를 숙이다가 유난히 많이 맞았다.

이후로도 가끔 프로선수와 스파링할 기회가 있었다. 잘해서가 아니라 잘하고 싶어서였다. 묵직한 펀치도 맞아보고 빠른 펀치도 맞아봤다. 세상에 강자는 정말 많다. 이렇게 체육관만 해도 강한 사람이 차고 넘치는데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강한 사람이 있겠는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스파링 후 다운 당했을 때 모습(기절한 게 아니라 누워서 쉬고 있는 모습이다)
 스파링 후 다운 당했을 때 모습(기절한 게 아니라 누워서 쉬고 있는 모습이다)
ⓒ 이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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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링 상대가 프로선수이기에 압도적으로 기량 차이가 나는 건 당연하다. 내 한계를 직면할 수 있었다. 포기하고 싶은 좌절감보다는 성장하고 싶은 도전심이 차올랐다. 압도적인 기량 차는 열심히 노력한다면 올라갈 곳은 많다는 걸 의미하기도 한다. 감히 그들과 '비벼볼' 실력을 갖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파링을 하고 내려오면 내 장점과 단점이 명확히 보였다. 훈련 효과를 체감할 수 있었고 땀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단점과 한계를 마주하는 건 링 아래에서 다시 훈련에 매진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되어주었다. 유튜브에서 가드를 올려야 한다는 복선생들의 메시지를 백 번 듣는 것보다 스파링에서 펀치 한 방을 강하게 맞는게 훨씬 효과가 있다.

결국 '스파링 → 복기 → 연습과 훈련 → 스파링'이라는 무한궤도의 삶에 진입했다. 'No Sparring, No Life'. 어느덧 사진첩은 스파링 영상으로 가득하고, 유튜브 첫 화면도 복싱 영상으로 가득해졌다.

초반에는 상대의 주먹을 보면서 맞는 것. 라운드 종이 울리기 전까지 버티는 것. 이 두 가지가 가장 중요하다. 날아오는 상대의 주먹을 쳐다보는 게 첫 숙제였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지고 눈을 질끈 감게 되었다. 가드를 하든 주먹을 피하든 주먹을 뻗든 어쨌건 두 다리로 링 위에서 버텨야만 한다. 기초체력을 키우는 시기였다.

생활복싱대회 도전... 결과는?

여기에 목표까지 더해지면 큰일이다. 생활체육대회를 나가보기로 했다. 그러자 내 뇌와 신체는 스스로를 '선수'라고 착각하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주말에도 복싱과 러닝을 가볍게 할 정도인데. 일주일에 운동량을 어떻게 해서든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과 함께 이틀 이상 휴식시간을 갖는 것에도 죄책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게 '복신(boxing神)'의 목소리가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첫 생활복싱대회를 출전했다. 평소 실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아 스스로가 원망스럽고 부끄러웠지만, 링 위에 오른 용기와 도전은 스스로를 위로할 만했다. 복싱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는 성실한 땀방울과 도전하는 용기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반복 또 반복. 스파링과 체력 훈련, 기본기 연습을 반복하고 두 번째 생활복싱대회에서는 무승부. 하지만 놀랍게도 최우수선수상이라는 예기치 못한 선물을 받는다. 졌을 땐 억울하더니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할 땐 '기분이 하늘을 찌른다'라는 표현을 실감했다.

어느덧 삼십 대 중반에 들어섰다. 취미로만 즐기는 것도 좋지만 나의 한계는 어디인지,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는지 궁금하고 기대된다. 차근차근 도전하고 한 계단 한 계단 밟아가고 싶다.

현재 내 목표는 어떤 상대를 만나든 덜 긴장하고 몸에 힘을 빼고 여유롭게 스파링하는 정도의 실력을 갖추는 것이다. 욕심을 좀 부려본다면 생활복싱대회보다 수준 높은 신인선수권대회와 같은 대회에 출전해보는 것이다. 신인선수권대회는 3분 3라운드, 헤드기어를 벗고서 시합한다. 생활체육대회는 1분 30초 혹은 2분 2라운드다.

체육관에서 스파링을 50번을 훌쩍 넘게 했다. 이제는 내 의지대로 힘을 조절하면서 할 수 있는 상대가 생길 정도로 실력이 성장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실력과 함께 자신감도 부쩍 올라온 느낌이다. 반면 여전히 프로선수나 관장님과 할 때면 가드도 올리지 못할 정도로 체력이 소진되기도 한다. 자신감이 오만함으로 갈 새가 없다. 가끔 안면 찜질로 코가 얼얼해지고 보디블로우로 숨이 막히고 다리가 풀리는 경험을 하면 자연스럽게 겸손을 배우게 된다.

이제는 정말 '노 복싱 노 라이프'
 
 아마존 사이트에서 팔고 있는 'No boxing, No life' 티셔츠
 아마존 사이트에서 팔고 있는 'No boxing, No life' 티셔츠
ⓒ Ama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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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 짧으면 2시간 길면 2시간 30분을 복싱에 쏟는다. 노력한다기보다 즐기고 있다. 늘 되새기는 마음가짐이 있다. 즐거움 8, 의무감 2 정도랄까. 복싱 그 자체를 즐기자는 것이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3분 동안 종소리, 샌드백 소리, 그리고 호흡소리와 내 동작에 집중하다 보면 세상의 소란스러운 이야기는 전혀 끼어들 틈이 없다. 복싱장에서 땀 흘리는 동안에는 시간뿐만이 아니라 걱정과 근심, 자랑거리를 잊게 만든다.

가끔 식당 앞이든 횡단보도 앞이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골프 스윙을 하는 사람을 보게 된다. 길거리가 골프장이다. 유독 왜 아저씨들만 그러시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다. 내게는 섀도복싱을 거리에서 하는 꼴이다. 거울을 보니 'No boxing, No life' 티셔츠를 입고 있다. 턱을 숙이고 다리를 벌려 중심을 낮춘다. 그리고...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 계정(@rulerstic)에도 실립니다.


#복싱#노복싱노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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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게 덜 폐 끼치는 동물이 되고자 합니다. 그 마음으로 세상을 읽고 보고 느낀 것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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