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알아? 훌리안 알바레즈가 '알레띠'로 이적한대."
"뒷북 치고 앉았네. 오피셜만 안 떴을 뿐, 이미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야."
지난 시즌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우승팀인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수 훌리안 알바레즈가 스페인 라리가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팀을 옮긴다는 걸 두고 아이들끼리 이야기가 오갔다. 딱히 해외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면서도 이는 상식에 속한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축알못'에게는 우리말 대화가 아니라 죄다 알아듣지 못하는 암호나 외국어일 테다.
언제부턴가 남자 고등학생들에게 해외 축구는 가장 흔한 대화의 소재가 됐다. 각자 좋아하는 선수와 클럽이 리그마다 한둘쯤은 있고, 팬으로서 그들의 이력을 줄줄 꿴다. 클럽의 역사와 거쳐 간 선수의 이름은 물론, 주축 선수들의 이적료와 연봉까지 알고 있는 '찐팬'도 적지 않다.
그들 앞에서 차마 말 꺼낼 순 없지만, 그걸 외울 정성으로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머리가 굵은 아이들 중엔 축구 해설가나 마케터 등의 분야를 염두에 두고 진로를 탐색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바야흐로 남자 고등학교는 해외 축구 전성시대다.
'
보탬이 안 되는' 역사 잊은 아이들
한 시간 넘도록 축구 이야기만 하길래, 슬그머니 끼어들어 몽니 부리듯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요즘 아이들이 시사적인 내용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최근 가장 '핫한' 이슈인 데다, 적어도 훌리안 알바레즈라는 부르기조차 어려운 선수 이름보다야 익숙해할 줄 알았다. 인터넷 포털에서도 며칠 동안 맨 위에 배치됐다.
얼마 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확정된 일본의 사도 광산 문제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었다. 이는 우리나라 역대 정부 최악의 외교 참사로 비판받고 있는 사안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왔다는 내용을 일본 정부가 누락시킨 사실을 우리 정부가 사전에 알고서도 묵인했다는 의혹에 여론이 들끓고 있다.
"축구는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지만, 그걸 안다고 지금 우리에게 무슨 보탬이 되나요?"
축구는 친구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언제든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소재가 되지만, 생뚱맞게 사도 광산 문제를 들먹였다간 '진지충' 소리를 듣기 십상이라는 거다. 강제 징용과 외교 참사에 대한 문제 제기는커녕 사도 광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다는 아이도 있었다. 그가 주로 접속하는 인터넷 사이트와 SNS에선 보지 못 했다고 했다.
아이들도 세상 돌아가는 뉴스를 궁금해할 거라는 건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나이로 범주화하긴 섣부르지만, 그들이 궁금해하는 분야는 보통의 기성세대와 사뭇 다르다. 스포츠와 연예계 뉴스가 단연 맨 앞이고, 주식과 부동산 등이 그다음이며, 정치와 시사, 일반 교양은 뒷자리다. 특히 역사나 문학, 철학 동향 등은 아예 거들떠보지조차 않는 분야다.
말하자면, 그들의 스마트폰 알고리즘에서 사도 광산은 아예 없는 단어인 셈이다. 아이들은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과 가자 지구의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갈등에서 시작된 확전 일로의 중동 국가들의 전운에 대해서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보단 프리미어 리그 선수 중 누가 최고의 이적료를 기록하느냐에 귀를 쫑긋 세웠다.
그게 무슨 보탬이 되느냐는 아이들의 반문이 종일 머릿속을 맴돈다. 곡해일지는 몰라도, 사도 광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고 손해 볼 일도 없고, 지정이 되지 않았다고 득 될 일도 없다는 뜻이다. 이는 "100년 전 일로 일본을 무릎 꿇게 할 순 없다"며 윤석열 대통령이 배짱을 부릴 수 있는 배경일지도 모른다.
참혹한 아이들의 역사 인식
힐끗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워하긴 해도, 친구들 앞에서 막말에 가까운 주장을 스스럼없이 펼치는 아이도 있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누구 앞에서건 감히 꺼낼 수 없는 이야기다. 좋게 해석하면, 세계 10대 경제 강국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일본에 꿀릴 것 없다는 거고, 달리 보면, 치욕적인 과거사를 덮고 가자는 이야기다.
"대체 언제까지 일본 정부에 구걸하듯 위안부와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해 사과하라고 외칠 겁니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다 보니, 식민지 지배로 인한 피해자의 목소리가 지겹다는 친구들도 있어요. 이제 우리가 일본보다 더 잘살게 된 마당이니, 일본 정부의 역사의식 수준이 딱 그 정도구나 하고 넘어가면 되지 않을까요?"
이런 '망언'에 발끈 화를 내기보다 짐짓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아 보인다. 피해 당사자가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면 자연스레 잊힐 것 같은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아이들은 기성세대의 거울일진대, 그들의 이렇듯 천박하고 매몰찬 역사 인식은 우리 사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된다지만, '오늘만 사는' 요즘 아이들의 가슴과 머릿속에는 망각할 역사조차 드물다. 동서고금에 시간은 망각의 편이며, 불의한 권력은 허송세월하며 장삼이사들의 망각을 부추긴다. 특히 아이들은 권력과 결탁한 자본에 더욱 쉽게 포획되었고, '보탬이 안 되는' 역사를 과감히 버리는 형국이다.
아직은 소수라고 믿고 싶지만, 이들이 이끌어갈 대한민국 사회의 미래가 두렵다. 지난해 말 전국의 대학교수들이 비루한 세태를 반영해 올해의 사자성어로 '견리망의(見利忘義)'를 가장 많이 꼽았는데, 모든 걸 '보탬이 되느냐'로 판단하는 요즘 아이들에겐 차라리 '진리'다. 그들에게 '견리사의(見利思義)'는 말 그대로 공자님 말씀일 뿐이다.
현 정부 들어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퇴행적인 모습이 확연하다. '눈 떠보니 후진국'이라는 말은 비유적 표현이 아닌 명징한 진실이었다. 누군가 내게 퇴행의 증거를 대보라고 하면, 주저없이 이렇게 답할 것이다. 불과 한두 해 만에 남녀노소 불문하고 '교양의 퇴조'가 뚜렷해졌다는 것. 곧,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염치를 잃어버린 사회로 전락했다는 뜻이다.
개운찮은 뒷맛을 남긴 채 아이들과 헤어질 즈음, 귀를 의심케 하는 황당한 뉴스가 전해졌다. 윤석열 대통령이 광복회가 '뉴라이트'로 지목한 김형석 고신대 석좌교수를 신임 독립기념관장으로 임명했다는 거다. 줄곧 친일파 백선엽을 옹호하고,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에 비로소 건국되었다고 주장해 온 자다. 결국 그는 8일 취임식을 진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정신을 부정하는 자가 다른 곳도 아닌 독립기념관의 수장이라니, 천인공노할 일이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되찾겠다는 독립운동을 폄훼하면서 멸사봉공 독립운동가들의 숭고한 삶을 기리겠다는 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는 지하의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그 후손들과 나아가 온 국민을 욕보이는 작태다.
독립기념관의 존재 이유와 설립 취지를 안다면, 좌고우면 말고 스스로 물러남이 마땅하다. 대통령부터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염치를 잃어버린 마당에 헛된 바람일지 모르지만, 역사 교사이기 전에 기성세대로서 차마 아이들 보기 부끄럽다.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지 통탄스러울 따름이다.